본문 바로가기

팔도금수강산

미리내성지

역사탐방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강원도 산골에 사는

 어느 할머니께서 아들에게

죽기전에 미리내 성지를 꼭 한번 가보는것이 소원이라고 했다한다.

가난한 농부인 그 아들은 별르고 별러서

노모를 모시고 어버이날을 기념하여 머나먼 미리내성지를

 버스타고 택시타고 와서 구경시켜드리고 돌아갔다고 한다.

노모가 여기를 다녀가시고 난후 매우기뻐하시며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노모께 효도한것같아 마음이 흐뭇햇다고 하는 기사를 읽었다.

나는 이 기사를 보고반나절이면 다녀올수있는

 거리에 살면서 안가볼수가 없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나의역사탐방의 계기는 이런것이였다.

그리고 학창시절 책에서만 배웠던역사를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

 


미리내의 유래


미리내 성지의 ’미리내’는 은하수(銀河水)의 순수 우리말로서

시궁산(時宮山 515m, 神仙峰으로도

 전해짐)과 쌍령산 중심부의 깊은 골에 자리하고 있다.
골짜기 따라 흐르는 실개천 주위에,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점점이 흩어져 살던 천주 교우들의

집에서 흘러나온 호롱불빛과 밤하늘의 별빛이 맑은

 시냇물과 어우러져 보석처럼 비추이고,

그것이 마치 밤하늘 별들이 성군(星群)을 이룬

 은하수(우리말 ‘미리내’)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아름다운 우리의 옛 지명이다.



미리내는 경기도 광주, 양평(양근),

용인, 안성, 화성, 시흥 일대와, 충청도 천안 목천,

진천 배티, 동골 등, 교회 초기에

우리의 신앙선조들이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 중에서,

 중부내륙 용인과 안성에 깊숙이 위치한

초기 비밀교회인 미리내, 한덕골, 골배마실, 굴암, 검은정이 중 한 곳이었다.


미리내와 인근의 이십리 안에 있는 한덕골, 골배마실,

검은정이 등의 교우촌들은 본래 신유박해(1801년) 이후에

크고 작은 박해를 거치면서,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의 신자들이

 산속을 찾아들어와 미리내 인근 산골짜기로 옮겨 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고, 훗날 미리내는 공소와 본당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신자들은 이곳 골짜기 마다 작은 마을들을 이루며

 주로 척박한 밭을 일구고 그릇을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미리내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옛 무덤이 그대로 남아있다.




미리내 성지


미리내 성지(안성시 양성면 미산리)는,

한국 최초의 방인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묘소와,

 이윤일 요한 성인의 묘소 유지(遺址),

그리고 <16위 무명순교자의 묘역>이 있는 거룩한 성지이다.

또한 김대건 신부의 묘역에는 김대건 신부에게

부제품과 사제품을 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高주교,

 미리내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1929년까지 33년간 본당을

지킨 초대주임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세 번째 방인사제 중 한 분) 신부와,

간도지방 최초의 방인사제였던

 미리내 본당 3대주임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의 묘소가 함께하고 있다.


묘역 왼쪽 윗 편으로는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高) 우르술라의 묘소,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소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예수님께서하나님께기도드리는 모습!

미리내의 오늘을 있게 한 당사자인

 이민식 빈첸시오 자신도 92세에 세상을 뜨니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묘역 곁에 묻히게 되었다.





미리내 성지의 성역화와 성지순례


미리내의 성역화 작업은 지난 1972년부터 시작되었다.
미리내 성지 초입 우측 편에는,

초대 주임 강도영 마르코 신부와 본당신자들에 의해

1906년에 건립된 <미리내 성 요셉 성당>과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신자들 자녀에게 천주교리와

 초등교육을 실시했던 미리내 교우촌의 <해성학원 교사> 건물이 잘 보존되어 남아있다.
이곳 요셉 성당과 해성학원은 교우촌 선조들의 땀과

 나눔과 섬김의 전설을 침묵 속에 담아서

 100년 세월을 지켜온 옛 이야기를 오늘에 전해준다.

성당 제대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유해, 하악골(아래 턱 뼈)이 안치되어 있다.





할아버지 있는곳으로 채원이가 신나게 뛰여오는 모습이다.



미리내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 중 하악골(아래턱뼈)과

발뼈 및 관조각의 일부가 보존되어 오다가,

한국순교복자 시성 운동이 전개되면서 종아리뼈도

 이곳으로 돌아와 함께 안치되어,

성지 순례자들에게 참배 현양과 친구의 큰 선물을 안기고 있다.




김대건 신부


사제가 되어 이 땅에 돌아온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9월 16일 만25세의 나이로 극히 짧은 사목 활동을 마치고는

 형장의 이슬이 되어 한 점 흠결 없이 순교하였다.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우는

참수된 자리에 시신을 파묻고 파수 경비를 두어 지키게 했다.
교우촌 어른들의 걱정과 격려를 받은 17세의 미리내 청년 이민식 빈첸시오는

 파수군졸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님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1846년 10월26일, 몇 몇 교우들과 시신을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서 빼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험한 산길로만 1백50여리 길을 밤에만 걸어서 닷새째 되는

날인 10월 30일 자신의 고향 선산이 있는 미리내에 도착하여 신부님을 무사히 안장 시킬 수 있었다.





미리내 성지에는 병인박해의 순교자 <이윤일 요한 성인>과

 미리내 인근 교우촌 부근에 매장되어 방치되어 오던

 16인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도 1976년 이곳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미리내성지의 본당전경 모습이다



미리내성지 본당앞 정원



채원이와 신화의

 모습이 꼭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우리 채원이 최고!









뭘 뒤져!

신화는 사진찍는 것에는 관심없고

가방을 뒤지며 사탕을 찾고있다.











향기 좋네..







미리내 인근은 일찍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어 굳건한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1846년 10월 30일 순교자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 김대건신부의 석상은

 얼굴이 서양사람 얼굴같이 조각되였다. 난 웬 서양사람이 서있나 했다.


김대건 [金大建, 1822-1846]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이다.

 금가항 신학교에서 탁덕(鐸德)으로 승품(陞品),

한국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신부가 되어 미사를 집전하였다.

충남 강경에 잠입하여 각지를 순방하면서 비밀리에 신도들을 격려하고 전도하였다.

본관 김해
별칭 세례명 안드레아, 아명 재복·보명·지식
출생지 충남 당진군 우강면

성인. 본관 김해. 세례명 안드레아.

 아명(兒名) 재복(再福)·보명(譜名)·지식(芝植).

충청남도 당진군 우강면(牛江面) 출생.

증조부 진후(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1814년 순교하고,

아버지 제준(濟俊)도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하는 등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7세 때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內四面)으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

 모방(P.Maubant)에게서 세례를 받고 예비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상경하였다.

역관(譯官) 유진길(劉進吉)에게 중국어를 배운 후,

모방의 소개장을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조선 전교(傳敎)의 책임을 진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새로운 서양 학문과 프랑스어·중국어·라틴어를 배웠다.

1842년 수업을 끝낸 다음 기해박해 이후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는 고국에 밀입국을 시도하였다.

처음 의주를 거쳐 서울로 향하다가 감시가 심하여 되돌아갔고,

얼마 후 페레올 주교로부터 고국에 잠입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번에는 두만강변 경원을 거쳐 입국하려다가

또 실패하고, 바쯔자[八家子]로 돌아가 매스트르 신부 문하에서 신학을 연구하였다.

1845년(헌종 11) 단신으로 국경을 넘어 서울 잠입에 성공,

천주교 대탄압 이후 위축된 교세확장에 전력을 기울이다가

 다시 프랑스 외방전교회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쪽배를 타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금가항(金家港) 신학교에서 탁덕(鐸德)으로

 승품(陞品), 한국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신부가 되어 미사를 집전(執典)하였다.

 8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주교와 함께 상하이를 떠나 충청남도 강경에 잠입하여,

서울을 향하여 각지를

 순방하면서 비밀리에 신도들을 격려하고 전도하였다.

1846년 선교사의 입국과 선교부와의 연락을 위한 비밀항로

 개설을 위하여 백령도 부근을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후 6회에 걸친 혹독한 고문 끝에 선교부와

신부들에게 보내는 편지 및 교우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쓴 후 순교,
경기 안성군 양성면(陽城面) 미산리(美山里)에 안장되었다.

 

1857년(철종 8) 교황청에 의하여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고,

1925년 교황청에서 시복(諡福)되어 복자위(福者位)에 오르고

1984년 4월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시 시성(諡聖)되어 성인위(聖人位)에 올랐다.











 

'팔도금수강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진여행  (0) 2007.11.29
시도  (1) 2007.11.05
서울대공원-2  (0) 2007.10.19
방화수류정  (0) 2007.10.12
용주사  (0) 2007.08.02
1 남산한옥마을  (1) 2007.04.23
2 남산골한옥마을  (1) 2007.04.23
왕송저수지  (0) 2007.04.05
서울숲  (1) 2007.03.25
봉원사  (0) 2007.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