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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4.상트페테르부르크


상트페트르부르크는 우리가 알고있던 레닌그라드

겨울궁전은 외곽도 멋있지만 안에 들어가면 놀래자빠질

정도의 어마어마한 박물관입니다

프랑스의 루부르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함께 세계3대박물관이라고 합니다

상트페트르부르크의 필수코스입니다



상트페트르부르크 교외에 있습니다

참으로 화려한 궁전입니다

이 분수가 흐르는 물이 저앞의 바다로 흐릅니다

비가 온날 찍어서 사진이 좀 안좋습니다



상트페트르부르크

시내중심지에 있는 카잔성당입니다

로마 파르테논신전을 본뜬건축물이라고 합니다



겉에서 본 상트페트르부르크의 겨울궁전입니다



겨울궁전을 다 둘러보고

나오면서 찍은사진입니다

겨울 궁전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궁전으로서 제정 러시아 군주의 겨울을 위해 1754~1762년에 지어졌다.

로코코 양식을 표방한 궁전은 바르토로미오 라스트렐리(Bartolomeo Rastrelli)가 초안을 만들었으며 연둣빛의 색조를 띤다. 1,786개의 문과 1,945개의 창문이 있다. 예카테리나 1세가 첫 번째 주인이 되었다.

궁전은 현재 회화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박물관이기도 한 에르미타쥬 미술관(State Hermitage Museum)의 복합단지에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의 일부로서 1,057개의 홀과 방이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다. 1826년 군사 갤러리가 문을 열어 332개의 국방계 인사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러시아의 2월 혁명 이후 겨울 궁전은 러시아 임시 정부 청사로도 쓰였다. 볼셰비키 정권의 겨울궁전 급습은 10월 혁명의 발단이 되기도 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모습

러시아사람들은 미소가 없습니다. 무뚝뚝합니다



푸슈킨 동상입니다

상트페트르부르크 호박궁전(에카테리나 궁)

근처에 있습니다

알렉산데르 푸슈킨 [Aleksandr Sergeevich Pushkin, 1799.6.6~1837.2.10]

러시아의 국민적 시인.

주요작품 대위의 딸 Kapitanskaya dochka(1836)

모스크바 출생.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확립자이다. 명문 중류귀족의 장남으로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大帝)를 섬긴 아비시니아 흑인 귀족이었다.

유년시대를 백부 바실리와 그 친지인 카람진 제코프스키 등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들의 영향하에서 자랐고, 18111817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차르스코예셀로의 전문학교에 다녔다. 그 곳의 자유주의적 기풍, 나폴레옹 전쟁의 국민적 고양(國民的高揚), 미래의 데카브리스트들과의 교유 등은 그의 사상형성에 커다란 기반이 되었다. 전문학교 재학 때부터 진보적인 낭만주의 문학 그룹 알자마스에 참가하여, 1814년 시 친구인 시인에게를 처음으로 발표하였다.

졸업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외무성에 근무하였다. 혁명적 사상가 차다예프와의 교류, 데카브리스트의 한 그룹 녹색 등잔에의 참가 등으로, 그의 농노제 타도의 정치사상은 차차 확고한 것이 되었다.

차다예프에게 K Chaadaevu(1818) 농촌 Derevnya(1819) 등도 이러한 배경에서 쓰인 것들이다. 1820년 최초의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 Ruslan i Ljudmila를 완성하였는데, 그것은 보수적인 의고전취미(擬古典趣味)에의 통타(痛打)가 되었다. 동년 농촌등 자유를 사랑하는 내용의 시가 화근이 되어 남부 러시아로 유배되고, 키시뇨프 오데사에서 살았다.

이 시절에 데카브리스트 남부회의 구성원들과 사귀고, 그들의 사상에 공감을 가지게 됨과 동시에, 서사시 캅카스의 포로 Kavkazskii plennik(1822) 바흐치사라이의 샘 Bakhchisaraiskii fontan(1823)을 비롯하여, 낭만주의의 특질이 강한 많은 작품을 썼다.

1824년 국외 망명에 실패하고 가령(家領) 미하일로프스코에 마을에 유폐되어 여기서 서사시 집시 Tzygany를 완성, 사실적인 시형소설(詩形小說) 예프게니 오네긴 Evgenii Onegin(18231830)의 집필을 계속하였고, 비극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1825), 풍자적 서사시 누손 백작(1825)을 탈고하였다.

고독하고 불우한 유폐생활은 도리어 시인에게 높은 사상적 ·예술적 성장을 가져다주어, 러시아의 역사적 운명과 민중의 생활 등에 대하여 깊은 통찰의 기회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182512월 데카브리스트 괴멸 후, 그들과 친교가 있던 그는 이듬해 수도로 소환되었다. 친구를 잃었던 수도에서의 고독에도 좌절하지 않고, 1828년 역사시 폴타바 Poltava를 완성하였다.

1830년에는 보르지노 마을에서 소비극(小悲劇) 4인색한 기사 Skupoi rytsari》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Motsart i Salieri》 《돌의 손님 Kamennyi gosti》 《질병 때의 주연(酒宴) Pir vovremya chumy, 그리고 벨킨 이야기 Povesti Belkina등을 탈고하였다. 그 해에 예프게니 오네긴도 완성하였으며, 이것은 러시아 문학사상 최초의 리얼리즘의 달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당시 러시아 사회의 특질을 남김 없이 그렸다.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는 산문소설 스페이드의 여왕 Pikovaya dama(1834) 대위의 딸 Kapitanskaya dochka(1836) 등을 써,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초석을 쌓았다. 마지막 서사시 청동(靑銅)의 기사 Mednyi vsadnik(1833)에서는 전제적 국가권력과 개인과의 대립 모순을 조명(照明)하고, 제정 러시아의 역사적 숙명을 제시하였다.

1837127일 그는 아내 나탈랴를 짝사랑하는 프랑스 망명귀족 단테스와의 결투로 부상하여 2일 후 38세의 나이에 죽었다. 이 결투는 명백히 그의 진보적 사상을 미워하는 궁정세력이 짜놓은 함정이었다고 한다.

푸시킨의 작품은 모두 농노제하의 러시아 현실을 정확히 그려내는 것을 지향(志向)하였으며, 깊은 사상과 높은 교양으로 일관되어, 후의 러시아 문학의 모든 작가와 유파(流派)는 모두 푸시킨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이버 백과사전



에카테리나 궁(호박궁전) 입구입니다



방 전체를 호박보석으로꾸민 방이다.

이 궁의 이름이 호박방궁으로 통한다.

그전에는 촬영이 허용되였으나 최근에는 촬영금지된 방이다. 몰래찍은 사진.

호박이란 무엇인가!

베른스타인(우리 말로 "호박")이라는 보석은, 나무에서 진액이 흘러내려

뭉처저 수 만년의 세월이 지나 돌이 된 것이다. 벌레가 들어있는 것을 고급품으로 친다고 한다.

독일칼링그라더의 베른스타인 광산. 이 도시는 독일 말로는 "쾨니기스부릌"이라고 한다.


당시의 프로이쎈 국, 현재의 리타우엔국(國) 칼링그라더(Kalingrader)에서

가장 많은 베른스타인 즉 호박이 산출되였다고 한다. 돌 이라고는 하지만

나무의 진이 오랜 세월에걸처 돌이 되었음으로 가벼웁고

단단하지 않아 가공에 유리 함으로, 갖가지 장식품으로 조각된다.



상트페트르부르크

시내에 있는 이삭성당입니다



러시아에는 피터대제의 사진이나

동상이 여기저기 엄청많습니다.

표트르대제 라는 이름은 피터대제, 페터대제,등으로 각국별로 발음나는대로 부르는데다 같은것이다.

각국별로 철자 발음등이 달라서 그렇다.

표트르 1세 [Pyotr I, 1672.6.9~1725.2.8] 53세에 졸
표트르데제 피터대제 페터대제 라고도 부른다.

러시아 로마노프왕조 제4대의 황제(재위 1682∼1725).

터키의 요새 아조프를 공격, 차지하였고

총병대(銃兵隊)의 반란 진압을 계기로

러시아의 모든 관습 ·풍속에 일대개혁을 단행하였다.

스웨덴과 북방전쟁을 벌여 잉그리아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등을 손에 넣었다.

1721년 원로원이 그에게 ‘임페라톨’(황제)이라는 칭호를 보내면서 러시아 절대주의왕정이 확립되었다.

알렉세이의 14째 아들이다. 알렉세이 황제의 후처(後妻) 나타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10세 때에 궁중혁명(宮中革命)으로 크렘린에서 쫓겨나

모스크바 근교 프레오브라젠스코에 마을로 이사하였다.

정규 교육이라고는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으나,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건강하여, 초인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정력적인 방법으로,

러시아에 주류하던 외국인들로부터 포술(砲術) ·

조선술(造船術) 등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배워 익혔다.

1682년 이복형(異腹兄) 이반 5세, 이어서 이복 누나 소피아와 병립(竝立)하여

정무(政務)를 보다가,

소피아가 그에 대한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하자, 1689년 정치의 실권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1695년 돈강(江)의 하구(河口)에 있는 터키의 요새 아조프를 공격하다가 실패하자,

많은 외국인 기사(技師)들을 초빙하는 한편 전국의 장인(匠人)들을 소집하여

함대(艦隊)를 편성하고, 이듬해 다시 터키를 공격하여 아조프를 차지하였다.

1697년에는 터키에 대한 서유럽 기독교국들의 동맹 체결이라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워 서유럽에 사절단(使節團)을 파견하면서,

자기 자신도 사절단의 일원으로 변장하여 러시아의 군주로서는

최초로 서유럽 각국을 여행하여 견문을 넓히고, 스스로 직공(職工)이 되어 포술 ·조선술 등을 익혔다.

그의 서유럽 여행은 본국의 총병대(銃兵隊)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를 받음으로써 중단되었으나

, 귀국 후 즉시 반란을 진압함과 동시에 러시아인의 복장을 비롯하여

수염을 기르는 습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관습 ·풍속에 일대개혁을 단행하였다.

1700년 스웨덴과 북방전쟁이 벌어져 21년이나 싸움이 계속되었으나,

니스타트의 화의(和議)로써 잉그리아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등을 손에 넣어

러시아가 목적한 바를 거의 달성하였다. 1721년 원로원(元老院)은 그에게

‘임페라톨’(황제)이라는 칭호를 보내고, 또 ‘대제(大帝)’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로써 러시아의 절대주의왕정이 확립되었다.

1703년부터 네바 하구(河口)의 삼각주에 새로운 수도(首都)

상트페테르부르크(표트르의 도시라는 뜻)를 건설하여, 이곳을 ‘유럽에 대한 창구(窓口)’로 사용함과

동시에 발트해(海) 지배를 위한 기지로 삼았다.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으로서

군사 ·행정 ·산업 ·교육 ·종교 등 각 분야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그 대부분이 즉흥적인 착상에서 나온 것이고,

중심 사상이 결여된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세운 14의 ‘관등표(官等表)’는

경찰제도와 함께 제정(帝政)이 몰락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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