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며느리의 선물! 히야신스
책상앞에서 예쁜 자태를
뽑내면서 향기를 뿜어내며 나를 즐겁게 해주는 히야신스
옆에 작은 코스모스 비슷하게 생긴꽃도 귀엽기만 하다.꽃 이름은 천상초
복주우물 입구에 부착된 안내판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2007.3.14
어머님과 이모님이 처녀시절(1910년대)복주우물 약수터에서 샘물을 길어다가 먹었다는 말씀을 어머님 생전에 많이 들었다. 복주우물이실제로 어느곳에 어떤모습으로 있는지 내눈으로 직접보기 위해 역사탐방 하였다.
원래 복주우물이 있던 약수터는 지금의 이화여대 북문 이화학당건물 뒷켠에 있던것을 이화학당건물을 지으면서 이화학당건물 바로 옆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복주우물(福主井)
복주우물은 위의 안내판과 같이 복주 즉,
귀인(貴人)이 이용하는 우물이라는 뜻이다.
이 우물 뒤쪽의 금화산은 공기와 물이 맑아 장수하는 노인이 많았다.
그래서 복수산(福壽山)이라고도 하였는데
후에 음이 와전되어 복주산으로 불렸다.
이에 따라 산 아랫마을을 복주산동, 그 마을의 우물을 복주우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서대문구 북아현동 1-1616 금화산 기슭인
이화여대 북문 이화학당 바로 옆에는 복주우물이 있어서
인근 주민들이 약수로 많이 이용하였다.
이 우물은 굴레방다리에서 큰재(大峴)로 넘어가는 도중에 위치한다.
복주(福主)란 말은 귀인(貴人)이라는 뜻으로
옛사람들이 즐겨 쓰는 용어로서 귀인이 마시는 물을 복주우물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 마을 뒷산은 전에는 물맑고 공기좋은 살기 좋은
곳이므로 장수하는 노인이 많이 살아서 금화산을
복수산(福壽山)이라 하였다가 음이 와전되어
복주산이라고도 하며 그 아랫마을을 복주산동이라 하였다 한다.
☞ 찾아가기
아현역 3번 출구에서 북아현동 방향
3번 마을버스 타고 종점에서 내려 금화산 기슭 약수터 입구
출처 : 서울특별시, 2004, 역사 문화 유적의 현장을 찾아
봉원사 2007.3.14
또한 수색에서 사셨던 이모님께서 생전에 새절(봉원사)에
다니셨는데 절이 어데쯤있고 어떤모습인지 궁금하게
생각했다. 오늘 역사탐방차 방문했다.어제 박근혜씨가 다녀갔다고 들었다.
봉원사샘물이 시원했다. 두 바가지 마셨다.
봉원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에 있는 절. 신라 진성 여왕 3년(889) 도선이 지금의 연희동 의령원 부근에 지어 ‘반야사(般若寺)’라고 하였다가 조선 영조 24년(1748)에 찬즙·증암이 현 위치로 옮겨 짓고 이 이름으로 불렀으며, 정조 때에 승려들의 풍기를 잡기 위하여 규정소를 두었다. 흔히 ‘새절’이라고 이르기도 한다.
봉원사(奉元寺)는 신라(新羅) 51대(代)(서기 889년) 진성여왕(眞聖女王) 3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년)가 현 연세대(연희궁)터에 처음으로 지었던 것인데 이후 고려시대에는 고려말 공민왕대에 활약한 태고(太古) 보우(普愚)스님이 크게 중창하여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조성하여 당시 사람들로 부터 크게 찬탄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한산군(韓山君)이 이색(李穡)에게 명하여 태고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로 국사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여 봉원사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태조 5년(1396)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삼존불을 조성하여 봉원사에 봉안하였고, 태조 사후에는 전각을 세워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
제14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전각이 소진됨에, 17대 효중 2년(1651)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하였으나 동, 서 요사채가 다시 소실되어 극령(克齡), 휴엄(休嚴) 두 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
제21대 영조 24년(1748) 찬즙(贊汁), 증암(增岩) 두 스님에 의해 지금의 터전으로 이전하였고, 영조는 친필로 봉원사(奉元事)라 현액하였으며, 신도들 사이에는 이때부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제22대 정조 12년(1788)에는 전국의 승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한 8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제25대 철 종 6년(1856) 은봉(銀峯), 퇴암(退庵)화상 등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제26대 고종 21년(1884)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축을 이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 던 이동인(李東仁) 스님이 5년간 주석하였던 갑신정변의 요람지이기도 했다.
고종 31년(1894) 주지 성곡(性谷)스님이 약사전을 건립하였으나 소실되었다.
1911년 주지 보담(寶潭)스님의 중수와 사지(寺地)의 확보로 가람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1945년 주지 기월(起月)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광복기념관을 건립하였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당시 병화(兵火)로 광복기념관이 소진되었고 이때 영조의 친필 현판 등 사보와 이동인 스님 및 개화 파 인사들의 유물이 함께 소실되었다.
1966년 주지 영월(映月)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소실된 염불당(念佛當)을 중건하였는데 이 건물은 대원군(大院君)의 별처였던 아소정(我笑亭)을 헐어 옮긴 것이다.
1991년 32세 주지 김성월 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삼천불전 건립도중 대웅전이 소진됨에 즉시 중건을 시작하여 1994년 주 지 혜경(慧鏡)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대웅전을 복원 낙성하였고 같은 해 1,100평 규모의 삼천불전을 새로이 건립하였다.
현재 봉원사는 한국불교의 전통 종단인 태고종의 총본산으로서 전법수행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바 대중은 50여스님, 신도는 10만을 헤아리며,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단청) 이만봉 스님과 제50호(범패) 영산재보존회에서 단청과 범패분야의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옥천범음대학, 불교교양대학이 있고, 신행 단체로는 관음회, 화엄법회, 청년회, 학생회, 인경회, 거사림 등 법회가 개최 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도 교도소, 소년원, 양로원, 고아원, 군부대 등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교화활동을 펼치고 있어 태고종 총본산으 로서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
서울에 있는 사찰이름 서로 비스무리 해서 참으로 휏갈린다
봉원사 봉은사 봉운사
1.봉은사(奉恩寺)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794년(원성왕 10)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
2.봉원사(奉元寺)
서대문구 봉원동 산1번지
신라(新羅) 51대 진성(眞聖) 여왕(女王) 3(889)년 도선(道詵)이 지음
3.봉운사
서울 은평구 응암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