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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금수강산

伴鷗亭

손자와 함께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190에 있는

황희정승 유적지를 역사탐방을 했다

황희선생 영당지에서



황희(黃喜)

호 방촌(厖村)

생졸년 1363 (공민왕 12) - 1452 (문종 2) 향년 90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하였다.

1. 고려 공민왕·태조 대의 관력

1376(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고,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 1389년에는 문과에 각각 급제하고, 1390(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는데, 1394(태조 3)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이후 직예문춘추관·감찰을 역임하였다.

1398년 문하부우습유(門下府右拾遺) 재직중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의하였다고 문책되어 경원교수(慶源敎授)로 편출되었다가, 1398(정종 즉위) 우습유로 소환되었다.

이듬해 초 언사로 파직되었다가 그해 2월경 문하부우보궐에 복직되고, 또다시 언사로 파직되었으며, 곧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를 거쳐 내직으로 소환되어 형조·예조·이조·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2. 조선 태종대의 관력

1401(태종 1)경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이 태종에게 천거하여 도평의사사경력(都評議使司經歷)에 발탁되었다. 이어 병조의랑에 체직되었다가 1402년 아버지의 상으로 사직하였으나, 그해 겨울 군기(軍機)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다.

1404년 우사간대부를 거쳐, 곧 승정원좌부대인에 오르고 이듬해 박석명의 후임으로 승정원지신사에 발탁되었다.

1409년 참지의정부사로 승천(陞遷)되고,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대사헌을 지냈으며,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질병으로 사직하였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1415년 이조판서가 되고 이어 송사(訟事)처리로 인한 육조에의 문책과 함께 파직되었다가 그해 행랑도감제조(行廊都監提調)에 복위되었다. 이어 참찬·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416년 세자(讓寧大君)의 실행(失行)을 옹호하다가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조판서가 되고,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윤, 1418년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이해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交河)로 유배되고, 곧 남원부에 이치(移置)되었다.

3. 세종대의 활동과 관력

세종의 치세가 진행됨과 아울러 상왕(上王: 태종)의 노여움이 풀리면서 1422(세종 4) 남원으로 소환되고,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고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1423년 예조판서에 이어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구휼하고,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대하였다.

1424년 찬성, 이듬해 대사헌을 겸대하고, 1426년 이조판서·우의정에 발탁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하였다. 좌의정 겸 판이조사로 있다가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고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된 뒤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되어 약산성기(藥山城基)를 답사하고, 약산이 요충지라 하여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한 뒤 평안도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하였다.

1430년 좌의정으로서 감목(監牧)을 잘못하여 국마(國馬) 1,000여필을 죽여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太石鈞)의 일에 개입하여 가볍게 다스려 달라.”고 건의하다가 일국의 대신이 죄를 다스리는 데까지 개입함은 사리에 맞지 않을 뿐더러, 대신이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니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된 뒤, 한때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하였다.

1431년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統理)하였으며,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는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고 사리가 깊었으며, 청렴하고 충효가 지극하였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하였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하였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출처. 한국역대인물



황희정승 영당지가 깨끗하게 잘 정리되여있네요!


방촌(厖村)기념관

방촌은 황희정승의 호이다. 厖방 (클 방.다 도탑다)


황희정승은 우리나라 나이로

90세까지 사셨다고 하니 아주 장수하셨단다

손자 왈! 임진강 뱀장어를 많이 잡수셔서 장수하셨나요?


역사탐방 기록을 핸드폰에 사진으로 남겨야지..




반구정 [伴鷗亭]짝반. 갈매기구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190

19839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1449(세종 31) 황희(黃喜)87세의 나이로 18년간 재임하던 영의정을 사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전국 8도의 사림들이 선현을 추모하는 승적(勝蹟)으로 수호하여 내려오던 곳이었는데 6·25전쟁 때 불타버렸다. 그후 황희의 후손들이 복구하였으며, 19676월 옛 모습으로 다시 개축하였다. 문산의 임진강변에 자리하여 앞에는 널찍한 모래톱이 있다. 맑은 날 정자에 오르면 멀리 개성의 송악산을 볼 수 있다.

반구정 옆에는 황희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영당이 있다. 1452(문종 2) 황희가 89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고, 1455(세조 1)에 유림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반구정 옆에 앙지대(仰止臺)와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영당은 6·25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62년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정면 3, 측면 2칸의 규모에 전퇴(前退)는 개방되어 있으며, 측벽은 방화벽으로 되어 있는 겹처마의 맞배지붕이다. 기둥머리는 초익공의 공포형식이며, 단청이 단아하다. 내부에는 중앙에 감실을 두고 그 안에 영정을 모셨으며,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반자가 꾸며진 우물천장이다.

건물 주위에 직사각형의 담장이 둘러쳐져 있으며, 정면 입구에는 솟을삼문이 있다. 1976년 경기도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임진강가 반구정에서 할머님과 함께










음식점이름이 만해치정이라! 그이름 한번 생소하다.

鰻蟹雉鼎(만해치정) 뱀장어.. 꿩등을 요리하는 솥이란 말이다.

황희정승이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내셨던 반구정 [伴鷗亭] 근처에는

음식점이름

鰻蟹雉(만해치) 즉 뱀장어. 게.꿩요리 음식점이 많다.

그러나뱀장어는 임진강의 자연산보다는 양식뱀장어가 많다고 한다.

자연산 뱀장어는 엄청 비싸서 먹을 엄두를 못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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