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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금수강산

수원화성-3

 

화성행궁 (華城行宮)

 

역사탐방

 

화성행궁 (華城行宮)은 정조가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소에는 부사(府使) 또는 유수(留守)가 집무하던 곳으로 활용되던 곳이다.

 

화성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행궁 중 규모면에서 가장 크며,

성곽과 함께 정치적, 군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축물이다

 

 

 

 

화성행궁은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 아래의 산기슭을 중심으로 경사지가 펼쳐지고,

 

시가지가 시작되는 곳의 평지에 위치해 있다.

구조는 앞쪽으로 긴 형태의 장방형 구조이다.

 

 

 

 

 행궁옆에  있던 신풍초등학교 이전

 

1896년 개교한

수원 신풍초등학교 광교신도시로 이전

 

 

 

 

일제가 우리민족의 정신을 말살하려고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을 훼손한

자리에 옮겨지은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의 신풍초등학교

 

117년이라는 전국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수원 신풍초등학교.

화성행궁복원으로 광교신도시 에듀타운에 새 둥지를 틀었다.

 

 

제정

제사용 우물이란뜻이다

제례에 사용될 정화수를 뜨는 우물로 어정이라고 한다

 

 

 

 

 

운한각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1801)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인 운한각을 비롯하여,

이안청·재실·전사청·향대청·제기고·외삼문·내삼문·중협문이 있었다.

 

이 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정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이곳에 속하는 건물들은

 대부분이 정전인 운한각의 건축규범에 따라 지어졌다.

특히 이안청은 지붕이 있는 복도식으로

 정전과 연결이 되어있어 눈이나 비가 올 때도 젖지 않도록 하였다.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제향은 1920년 일본인에 의해 정조의

 초상화가 창덕궁으로 옮겨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궁궐에 지어진 다른 영전들과는 달리,

수원에 세워진 화령전은 대칭에 의한 격식과 기능에

따른 영역의 구분이 확보된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몇 채의 사라진 건물을 제외하면

비교적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득중정앞에서(하얀 편액이 보인다.뒷건물 ),

우측의 향나무가 이채롭다.오래 살수있을려나??

 

 

[ 華城行宮 得中亭 ]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정조가 직접 편액을 썼으며, 상량문은 홍양호가 짓고 썼다.

 

1790(정조 14) 낙남헌 자리에 처음 건립하였고

 1794(정조 18)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

 

그뒤 일제에 의하여 철거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9812월에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1790(정조 14) 정조가 이곳에서

4발을 쏘아 4발 모두 맞히자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이라고 하였는데,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라는

 구절에서 ''자와 ''자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뒤에 팔달산이 멋있다

 

 

 

 

 

봉수당앞에서

 

 

화성행궁 봉수당

[ 華城行宮奉壽堂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화성 행궁에 있는 건물이다.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 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1789(정조 13) 819일 상량하여 같은 해 925일 완공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것을 1997년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봉수당(奉壽堂)이라는 건물 이름은

 '만년(萬年)의 수()를 받들어 빈다'

뜻으로 정조가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지었으며,

 

뒤에 돈령부지사를 지낸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편액을 썼다.

 

 1795(정조 19) 이곳에서 헌경왕후의 회갑연인 진찬례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봉수당 방문 기념!

 

정조 (1752-1800. 향년 49)가

어머니 오래 사시라고 봉수당을 짖고 회갑연을 베풀어 드린대로 

혜경궁 홍씨 [惠慶宮 洪氏, 1735 ~ 1815 향년81]는

 만 81세 까지 살았지만 정작 정조 본인은

어머니 보다 15년 앞서서 승하했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 [思悼世子, 1735 ~ 1762. 향년 28] 와 동갑으로

 18살에 아들 정조를 낳았고

 28세에 남편을 여의고

아들  정조가 승하한후 15년을 더 살다간 당시로서는 오래 산 여인이였다.

 

 

 

 

주말이면

 이곳에서 기념품을 팔던곳인데..

 

 

 

 

 

오늘 따라  드라마 '장옥정"을

촬영한다고

관람객들의 출입제한으로 많이 불편했다.

 

 

 

 

 

 

 

 

역시 신목이네..

 

다 죽은 기둥에 싱싱한

어린 가지가 보란듯이 자라고 있다

 

담벼락 밑에는

관람객들의 소원들을 적어서 꽂아 두었다(흰줄)

 

 

 

 

 

 

 

좌익문앞에서

 

화성행궁 좌익문

[ 華城行宮左翊門 ]

 

내삼문(內三門)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으로 17903칸 규모로 완공하였다.

 

행궁의 본전인 봉수당(奉壽堂)에 이르는 두번째 문으로 중양문(中陽門) 앞에 있다.

 

문의 이름인좌익(左翊)’'곁에서 돕는다'는 뜻이며,

편액은 정조의 명으로 정동준(鄭東浚)이 썼다.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와 연결된다.

 

 

 

 

 

신풍루(新豊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신풍루는 1790(정조 14)에 세워졌는데 처음 이름은 진남루(鎭南樓)였다.

 

그 후 1795년에 정조의 명으로 신풍루로 변경하였다.

 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때 신풍루 앞에서

 정조가 친히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정문인 신풍루 양쪽으로 남군영과 북군영이 있으며

 신풍루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는데

 왼쪽으로는 서리청과 비장청, 오른쪽으로는 집사청이 위치해있다.

 

서리청과 비장청, 집사청을 좌우로 지나 마당을 가로지르면

좌익문이 있고, 이를 통과하면 중앙문이 나온다.

 

이 중양문을 지나면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이 나타난다.

화성행궁과 따로이 떨어져 있는 화령전은 정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화성행궁의 정문 신풍루에서

 

 

 

 

 

 

 

화성행궁앞 광장생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2&aid=0000026127

 

 

 

 

 

수원하면 갈비가 유명하지 않은가!

 

갈비대신 갈비탕으로

 수원화성 역사탐방 기념으로

 <수원본가 갈비. 031-243-8851> 식당에서 점심식사

 

 

 

수원갈비가 왜 유명한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한반도의 소는 군수용으로 쓰이면서 그 수가 급격히 줄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 사정은 더욱 악화되어 축산 기반을 거의 잃었다.

 

 1930년대 150만 마리에 이르던

 소 사육 마릿수가 1950년대에는 50만 마리도 되지 않았다.

쇠고기는 다시 귀해졌다. 이때에 수원에서 갈비를 구워 파는 식당이 있었다.

 

 

 

수원 영동시장의 화춘옥이라는 식당이다.

1945년 개업할 당시에는

 해장국(갈비우거지탕)을 팔았으며, 1956년에 갈비구이를 내놓았다.

 

그때에 화춘옥은 수원에서 유명하였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수원의 농업연구기관을 수시로 다니면서

 이 화춘옥에 들렀다.

 

 

대통령이 먹는 갈비이니

 이 수원의 갈비가 한반도에서 제일 맛있는 갈비가 되었고,

수원 갈비라는 명성이 만들어졌다.

 

갈비탕.설렁탕. 삼계탕. 갈치찜 식당등 전국어디서나

대통령이 한번 들려서 식사를 하면 그날로 그 식당은 대박나는것이다. 

 

 지금의 수원 갈비집들은

화춘옥의 명성에 기대어 문을 연 식당이라 할 수 있는데,

 1970년대에 개업한 식당들이 많다.

 

그 당시, 수원에 화춘옥 같은 갈비집이 영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수원에 큰 우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흔히 말한다.

 

소가 많으니 쇠고기 먹는 일도 잦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물론 수원 우시장이 제법 큰 규모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쇠고기까지 흔하거나 쌌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소는 도축되고 발골, 정육 과정을 거친 후에나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수원에는

 갈비를 먹을 수 있는 부자들이 많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수원은 한반도 남부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에 있어 조선시대부터 큰 장이 섰고 돈 많은 상인이 많았다.

 

또, 1960년대 이전까지 한국은 농업사회였는데, 그 중심에 수원이 있었다.

농업연구기관이 수원에 있었고,

서울대 농대도 수원에 있었다.

 

한반도가 급속히 산업화하면서 수원이 '주변부'로 밀려났지만,

한때 수원은 갈비를 넉넉하게 뜯을 수 있는 부자 동네였던 것이다.

 

 

대통령이 들른 식당이면  그 식당은 대박난다

박정희 대통령이 들르셨다는

 수원의 화춘옥갈비집,  군포의 설렁탕집 군포식당

 

  

제주도 물항식당

 

 

노무현대통령이 자주 찾았다는

경복궁옆의 토속촌 삼계탕 . 제주도 물항식당

 

노무현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이

 식사하셨다는 제주도의 갈치구이식당 유리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다녀간곳으로 유명한 제주도의 남경미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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