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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앨범

6월이오면

6.25

해마다 6월이 오면

생각나는 홍영선 큰형님

누가 이 어른(홍영선 선생)의

소식을 모르시나요??

1921.6.16일생

왜정시대부터 육이오 당시까지 서울역근무

1940년대 그 시절에도 이렇게 멋진신사이셨는데..

(가 사)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떠난 이별 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뜨고 헤매일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손 꽁꽁 묶인 채로

뒤 돌아 보고 또 돌아 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半夜月 作詞/ 李在鎬 作曲

(대 사)

여보 어린 영구는 오늘밤도 아빠를 그리다가

이제 막 잠이 들었어요

동지 섯 달 긴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

십년이 가고 백년이 가도 부디 살아만 돌아와요 네? 여보!... 여보!

(대 사)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던 그 때 그 날

나는 당신이 떠나시는 모습을 뒤로 한 채

어린 것을 등에 없고 폐허가 된 거리를 헤매이면서

한없이 흐르는 눈물로 어린 것의 두 뺨을 적시곤 했답니다.

(대 사)

여보! 왜 우리는 한 핏줄이요 한 형제이거늘

왜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를 증오해야만 한단 말입니까?

우리들의 젊은 날들은 아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채

이젠 백발이 되었어요

(대 사)

제발 백발이 되였드라도 좋으니 꼭 살아만 계세요

머지 않아 우리 민족이 서로 만나 한 자리에 모이는 날

우리 서로를 얼싸 안고 마음껏 자유를 외치면서

행복하게 살 날을 다짐하면서

다시는 이 땅 위에 우리와 같은 비극이 없기를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빌겠어요 여보!

(가 사)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섯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

십년이 가고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 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 창자가 찢어지듯이 가장 아픈 노래가 바로 이 <단장의 미아리 고개>이다. 1950625, 갑자기 북한의 인민군이 남한을 쳐 내려왔다.

홍영선 큰형님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바로 그 해 조카딸 영숙이 돌날 1950.9/8(7/26)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북한 의용군으로 집을 나가신 후 지금까지 소식이 없으시다.

살아계셨는지? 살아계셨다면 언제까지 살아계셨는지? 아니면 의용군으로 끌려가신 그 당시에 바로 돌아가셨는데 그토록 식구들이 애타게 기다리게 하신것인지..

귀중한 우리가족사진


뒷줄 좌측으로부터

최귀태작은형수님. 이금분큰형수님. 홍금선누님.

앞줄 좌로부터

홍길선작은형님. 홍영선큰형님께서 색동저고리입은 장남 승열이를 안고 계시고,

어머니께서는 5개월짜리 손녀딸 영숙이를 안고 계시다.

그옆 어린이가 주인장인 나 유유자적이고, 맨끝이내동생 홍범선이다.


윗사진의 아기남매

사랑하는 나의 조카남매이다.

유수같은 세월속에 조카들도 지금은 손자손녀를 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였으니

세월은 달리는 말처럼 참으로 빠르게도 흘러갔다.


무심한 세월속에 큰아들 돌아 오기만을 그도록 오매불망 애타게 기다리시던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젊디젊던 형수님도 돌아가시고, 형은 꼭 살아서 돌아오실거라고 어머님을 위로해주시던 홍길선 작은형님 내외분도 모두 하늘나라로 가셨다. 살아있는 나와 조카들도 아직도소식을 모르고 있으니 너무나 슬프다.

홍영선형님은 새탐말 박정희(박용구부친) 그리고 한상교(어머니사촌동생)등 세분이서 함께 의용군에 같이 가셨다.

동네에서는 인민공화국 세상이 되자 한 마을에 사는 한아무개씨가 인민공화국의 마을 책임자가 되어서 인민여성위원장을 선출하는데 우리동네에는 학식이 있는 사람이 없으므로 큰형수(이금분 승열모친)에게 인민여성위원장직책을 맡으라고 강력히 요구했었다.

홍영선 형님이 우리 집 사람은 절대 안된다고 해서 여성위원장을 안 하게 되였으나 한아무개 그분은 그렇다면 영선 길선 형제중 한사람은 인민공화국을 위해 의용군에 입대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에 홍영선형님은 내 아우 길선이는 배운 것 없는 순박한 농민이므로 의용군에 나가면 고생한다며 꼭 나가야 된다면 대신 내가 의용군에 나가겠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의용군에 입대하게 된 것이다.

훗날 홍길선형님은 우리형은 한아무개 그 사람 때문에 의용군에 나가게 됐다고 두고두고 원망하셨다.

우리 집의 대들보인 큰형님이 의용군에 징집된 후 어머니께서는 큰아들 생사를 알기 위해 점도 많이 보시였고 십여년 동안을 매일아침 장독대에 정화수 떠놓고 기도 드리고 큰아들 밥을 아랫목에 묻어두고는 큰아들 살아오기만을 학수고대 기다리셨다.

국군에게 포로로 잡힌 의용군들이나 인민군은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고향으로 돌아들 왔다. 이 당시 반공포로 석방은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였다.

반공포로 석방전에 극렬 인민군포로들은 이북으로 안가겠다는 반공포로를 포로수용소 안에서 무더기로 학살도 하고 거제포로수용소 경비사령관 돗드 미군준장도 인질로 잡고 억류하기도 해서 남한의 포로수용소가 아니라 북한인민군 사령부 같았던 일도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 의용군으로 끌려나갔던 몇몇사람은 반공포로로 석방돼서 마을로 돌아와 다시 국군에 입대했다. 하지만 홍영선형님을 비롯한 같이 나간 분들의 소식은 없었다.만일에 포로가 되셨다면 백번천번 집으로 오셨을 분인데 ..

해마다 현충일이 되면 국군 전사자들의 유가족들이 이름과 군번을 갖고 유골이라도 찾으려고 애쓰는 안타까운 모습을 본다.

그러나 우리형님은 국군으로 입대한 것도 아니고 사상이 무엇인지도 잘알지 모른체 북쪽의 의용군으로 징집되여 나간 후 소식이 없으니 어데다 하소할 곳도 알아볼 곳도 없고 군번도 모르고 어데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르니 참으로 답답하고 허망할 뿐이다.

내 큰형님이 의용군으로 끌려 나가신 날이 1950.9/8.금요일이다. 연합군과 국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한 날이 9/15일이다.

그리고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은 날이 9/28일이다. 우리가 당시에 전황만 알았더라면 그야말로 딱 일주일만 피해 다니면 되는 것인데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고 분하다.

북한 인민군이 낙동강전투에서 패퇴하게되자 남한 청년들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모집한 것이다.

길거리에서도 마을에서도 곧 통일이 되어 전쟁이 끝난다고 선전했다. 열흘 후면 부산까지 점령시켜 통일된다고 떠들어대며 늦으면 조국에 충성할 기회도 마지막 기회라며 의용군 나갈것을 독려하였다.

나중 들은 이야기지만 숨어서 남한 뉴스를 듣던 사람들은 낙동강전투에서 인민군이 이미 패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불행히도 우리 집엔 라디오가 없었다.

낙동강전투에서 인민군이 치열한 전투속에 많은 사상자를 내고 밀릴 때 의성군과 군위군의 산봉우리마다 피로 물들이며 한나절의 전투에 양측 병력이 절반으로 줄어들 정도로 치열했고 양측에서 모두 소총중대에서는 사흘만 살아남으면 고참병이고, 일주일만 견디면 신병이 분대장이 됐다고 했으니 얼마나 치열한 전투였을까!

지금도 혹시나 이산가족 상봉때 홍영선형님의 소식을 기다리지만 형님은 낙동강전투가 한창일 때 남쪽으로 내려가셨다. 총 한번 쏴본적도 없는 형님이 낙동강전투에 투입되였는지 아니면 근처에도 못가보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남쪽 이름 모를 어느곳에서 전사하셨는지 알수가 없다.

형님의 생일이 음력1921.06.19일생이시니 재회의 희망은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앞날이 창창하던 29세 젊은이의 인생이 전쟁으로 이렇게 무너질 수 있단말인가! 홍영선 형님 이 너무 불상하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어머니께서는 장독대에 정한수 떠놓으시고 십여년 동안을 큰아들 무사귀환을 빌으시고 밥도 놎그릇에 담아 놓고 큰아들 살아 오기만을 기도 하셨다. 눈물겨운 모정이였다. 묻어놓았던 형님 밥을 내가 많이 먹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머니께서는 우리가 자라면서 위로를 삼으시고 차차 정상생활로 돌아오셨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운명하시는 그 날까지도 오매불망(寤寐不忘) 큰아들을 못 잊으시고 눈을 감으셨다. - 너무나 슬픈일이다. 우리가족에게 전쟁의 상처는 이렇게 아직 아물지 않은 것이다.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를 듣노라면 1950.9/8일 의용군으로 끌려가시며 잘 다녀올것이니 아무 걱정말라시며 집을 떠나시던 큰형님과 큰형님을 애타게 기다리시다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님과 형수님 그리고 작은형님 내외분 생각에 눈물이 난다.육이오는 이렇듯 우리집 가장이며 대들보셨던 홍영선큰형님을 화목했던 우리집에서 앗아간 비극희 전쟁이였다.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것은 잠이들고..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내 어머님과 형수님을 비롯한 우리가족 모두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단장의 슬픈 노래이다.

< 단장의 미아리 고개 >문자 그대로 창자가 끊어 지는 우리 민족의 아픔이 생생하게 들어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이다.*****


오늘날의 미아리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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