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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章陵]

장릉 [章陵]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산141-1번지.

장릉 [章陵]

조선 제16대 왕 인조 아버지의 능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산141-1번지.

추존왕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조선 선조(宣祖)5번째 아들이자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으로 쫒겨갔다 청태종에게 무릅꿇고 개망신당했던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아버지로,

1632(인조 10) 왕으로 추존된

원종(元宗 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15781626)의 무덤이다.

호칭은 정원군(定遠君)이였다가

나중에 아들이 왕이 되자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으로 불려졌고

그후에는 논쟁 끝에 원종(元宗)으로 추존된 인물이다.

정원군(원종)1619년에 죽어

아들 인조가 왕이되기 4년전에 죽었다 (인조 재위 1623-1649)

원종의 무덤은 원래 양주군에 있었으며,

1622(인조 즉위) 흥경원(興慶園)이라는 원호(園號)를 받았다.

1627(인조 5) 현 위치로 옮겨졌고,

1632년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면서 장릉(章陵)이라는 능호를 받게 되었다.

한편 1626년 조성된 인헌왕후의 무덤은

현 위치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가 1627년 원종 옆으로 이장되었다.


장릉


김포 이종인사장의 초대로

초교동창모임을 역사탐방차 공기좋은 여기 장릉에서 모임을 가졌다


여기 장릉의 주인공의 아들 인조와

정묘호란.병자호란 그리고남한산성에 대한 역사를 이야기 하며

즐거운 초등학교 모임을 가졌다


역사강의도 듣고

참외 포도 잡수셔요!



장릉입구

장릉주차장

장릉은 여기 김포의 장릉[章陵] 외에

2개의 장릉이 더 있어 혼동하기 쉬운데 한문으로는 다른글자이다

章陵莊陵 長陵

장릉 [莊陵]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릉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33-1번지

장릉 [長陵]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능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5-1번지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으로 쫒겨갔다 청태종에게 무릅꿇고 항복했던

조선 제16대 왕 인조와 원비 인열왕후 한씨의 능


조선시대 대원군 총집합

대원군하면 흥선대원군만 있는줄로 알지만 흥선대원군외에

3명의 흥선대원군의 선배들이 더 있다

덕흥대원군(14대 선조의 생부)

정원대원군(16대 인조의 생부)

전계대원군(25대 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26대 고종의 생부)

덕릉을 아시나요

덕릉고개 이정표

대원군
우리들이 알고 있기로 대원군이라고 하면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만 알고있다.


 

흥선대원군 (1820-1898)

그러나 대원군은 선조(宣祖)의 아버지

덕흥군(德興君)을

덕흥대원군으로 추존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철종의 아버지 전계(全溪)대원군도 있다.

대원군은 조선시대에 왕위를 계승할

적자손(嫡子孫)이나 형제가 없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이어받을 때 신왕의 생부(生父)를 호칭하는 말이다.

대원군은 임금의 생부지만 그 묘는 능이라 하지않고 그냥 묘라고 한다.

왜냐하면 능 이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덕흥대원군(선조의 생부) 정원대원군(인조의 생부),

전계대원군(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고종의 생부)은

                        임금의 생부였지 전직 왕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우리네 일반인들의 묘처럼 그냥 묘라고 부른다.

즉, 덕흥대원군묘 흥선대원군묘 이렇게 부른다.


덕릉

소재지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5-13
선조의 생부(生父)인 덕흥대원군 이초(1530-1559)의 묘


덕흥대원군은 중종(中宗)의

제7남으로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소생인데

1530년(중종 25)에 태어나 1559년(명종 14)에 별세하였다.

소년시절의 덕흥군(1530-1559)

14대선조의 아버지


기록을 보면 덕흥대원군도

그리 올바른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명종대에 사헌부에서 올린글중에서

"덕흥군 이초는 성품이 교만하고

패려하여 재상을 능욕하고

士類(사류)를 구타하여 娼妓(창기)와의

사랑에 빠져 變服(변복)으로 나돌아다니고 있으니

지금 다스리지 않으면 불의에 빠지고 말것입니다.

파직시켜 마음과 행동을 고치게 하소서"

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명종은

"이초가 연소하여 사체를 몰라서

망령된 행동을 하는것인데 파직까지야 할수있겠는가.

敎誡(교계)를 가하여 이런행동을 하지 못하게 해야한다"


(조선왕조실록 명종 13권 7년(1552) 4월 23일 2번째기사)

 

13대 명종임금(1534-1567)


라고 하면서 이복동생인 덕흥군을 감쌋다.

이렇듯 바르지 못한 행실들로 세간의 지탄을 받은

아비를 닮아서인지는 몰라도 선조임금도 괴팍하고 독선적이였다.

 

 

선조가 임금이 된 에피소드

14대 선조임금(1552-1608)


명종은 이따금씩 종친

자제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됨됨이를 살펴보았다.

한번은 머리크기를 재어본다고

익선관(임금이 곤룡포 차림으로 집무할 때 쓰던 관)을 가져다가

써보게 하였는데

다들 아무 생각없이 좋아라 했으나

덕흥군의 3남인 하성군 이균(선조)만은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쓰는 것이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익선관을 공손히 받들어 도로 가져다 놓으며 사양했다고 한다.

 

 

13대 명종의 부인 인순왕후

(1532-1575)


이러한 하성군 이균을 마음에 들어한

명종과 인순왕후는 후계자로 점 찍었고

명종이 죽자 인순왕후는

곧바로 하성군 이균에게 왕위계승 교지를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예의 바른 모범생이였던

선조는 임진왜란당시 이순신이 전공을 세우자

임금자리를 빼앗길가 두려워 이순신을 시기하여 감옥에

가두는등 못쓸 임금으로 후세에 지탄을 받는 임금이 되였다.

 

 

정순왕후

21대 영조의 둘째왕비

(1745-1805)

마치 먼훗날 제21대왕 영조의

둘째왕비 정순왕후가

고개중에 어떤고개가 제일 넘기 힘드냐고 물었을 때

보리고개가 제일 넘기 힘들고,

꽃중에 무슨꽃이 제일 예쁘냐고 물었을때

목화꽃이 제일 예쁘다고 대답해,

중전으로 간택은 되였으나

사사건건 정조대왕을 시기하던 일을 연상케 한다.

 

 

14대 선조임금(1552-1608)

1567년 명종(明宗)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그의 3남인 하성군(河城君) 이균(李均)이 즉위하였는데 그가 바로 선조임금이다.

이에 따라 1569년(선조 2)에

선조의 생부 덕흥군은 대원군(大院君)에 추존되었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같이 이 때부터

왕이 아닌 왕의 아버지를 대원군이라고 하는 제도가 시작되었던것이다.

이후로 정원대원군(인조의 생부),

전계대원군(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고종의 생부)이 있었다.

무덤의 호칭에 대해서 알아보자

 

 

무덤에는
능(또는 릉), 원, 묘 등이 있다.

이 능·원·묘는 왕족과 다른 신분을 구분하기 위해 만든 무덤 명칭이다.

능은
일반적으로 왕과 그 비의 무덤을 말한다.
예를 들면 장릉은 단종의 무덤이고, 광릉은 세조와 그 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무덤이다.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세손과 왕세손비나
 왕의 생모인 빈(嬪)과 왕의 친아버지의 무덤이다.
소경원 紹慶園 : 인조의 자 소현세자의 묘
순창원順昌園 : 조선 최초의 ‘원’으로 명종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의 무덤
수경원綏慶園 : 영조 후궁 선희궁 영빈 이씨, 장조 생모


왕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은

추존왕은 왕으로 보지만 왕위에 있었으나 축출된 왕은 왕으로 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각각 장조와 헌경황후로 추존되어

융릉이라 불리지만 왕위에서 축출된 연산군과 광해군은 묘로 불린다.

즉, 연산군, 광해군등은 왕으로 보고 있지 않는것이다.


총은

주인공은 누구인지 알 지 못하지만

벽화 등 특징적인 것이 무덤에 있을 경우에 붙인 무덤이다.

예를들어 장군총은 광개토대왕의 묘와

장수왕의 묘라는 설이 있지만 정확히 누구의 무덤인지는 모르는경우다.

분은

주인공도 모르고 특징점도 없을 때 붙이는 무덤이다.

 


 
선조가 임금이된후

그의 생부 덕흥군의 무덤 호칭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

동문으로 들어오는 나무장작

경기도 남양주시 수락산 자락에

선조의 아버지의 무덤인 덕릉이 있는데 이 덕릉은 당시 묘라고 불렸다.

효심이 깊었던 선조는

자기 아버지의 무덤을 왕릉으로 하고 싶어했지만

법도에 어긋난다는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못했다.


 

선조는 동문밖에서 柴炭商(시탄상.

땔나무와 숯을 취급하는 상인)을 하는 사람을 불러 명하기를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무수레와

숯수레를 불러들여 어디를 지나서 이곳으로 왔느냐고 물어

그 장사꾼이덕흥대원군 묘소를 지나왔다고 하면 그대로 보내고,

덕릉을 지나왔다고 하면 안으로 불러들여

술과 밥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 장사꾼의 나무와 숯을 고가로 사들이라"고 하였다.


 덕릉에서 왔다고 하면 이렇게 잘 대접받았습니다

명을 받은 시탄상은 그 후 그대로 시행하니

그 소문이 퍼지면서 동문으로 들어오는 나무꾼만이 아니라

서문쪽을 이용하던 사람들도 동문으로 돌아 들어와

너도 나도 모두

덕릉에서 왔다고 하면서 땔감과 숯을 고가에 팔고 갔다고 한다.

돌아 돌아서 멀더라도 동문으로 가자

덕릉에서 왔다고 해서 고깃국도 대접받고

비싸게 나무땔감 팔게 어서 동문으로 나무 팔러가자.

이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덕흥대원군의 묘를 덕릉이라 부르게 되어

지금까지도 덕릉이라고 부르고

남양주시 별내면의 마을이름도 덕릉마을,

상계동과 남양주를 잇는 고개이름도 덕릉고개라고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위의 사진들은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빌려온 사진들입니다

편집.유유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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