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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낙양향산사.백거이.보이차

향산산(香山寺)와 백거이

향산사는

뤄양[洛陽] 남쪽 약 14 km 지점에 있는

룽먼석굴龍門石窟 맞은편에있다

뤄양 교외를 흐르는 이허(伊河) 강을

사이에 두고룽먼산(龍門山)과 마주보고있다



용문석굴에서 바라다본 향산사 전경

용문석굴 방향표지


용문석굴 동네 아이들


용문석굴 앞 거리


용문석굴 주차장


향산사 올라가는 계단

달마의 제자 혜가와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기거했다는 향산사에

올라가 둘러보고

향산사 근처에 있는 백거이 묘도 보러 가파른 계단을 올라간다.

향산사는 급경사의 계단을 딛고 올라야 한다.

다리가 시원치않은 사람은 뒤처지게 된다.

향산사는 북위 희평 원년인 서기516년에 지은 고찰이다.

그러나 지금의 향산사 건물은 중국이 ‘해방’ 이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뉘시더라??

1930년에 공산당 입당하여 장정에 참가

하고 건국이후 북경 군구 사령관,

총참모장 대리 등을 역임한 근대의 인물인

양성무(楊成武) 장군의 일생행적을 알리는 전시실를 마련해 놓아 향산사의

본래 모습과 사찰로의 이미지를 훼손하고 있는 느낌이다.

향산사는 이하(伊河)를 굽어보는

아름다운 풍광이 있고 옛 향산사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먼저 왼팔을 잘라 달마대사의 제자가 된

그 혜가(慧可)대사가 신광이라는 법명

으로 바로 이 절에서 출가한 이야기가 있으며,

무측천이 낙양에서 황제로 등극했을때

주위의 풍경이 아름다운 이곳을 자주 찾아

군신들에게 시를 짓게 하고 가장 먼저

지은 사람에게 금포를 내리기도 하였다는 이야기 등이있다.

이 곳 향산사와 인연이 깊은 사람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백거이(白居易)이다.


백거이 (白居易 ; 772~846)


백거이는 58세가 되던 829년에

낙양(洛陽)에 영주(永住)하기로 결심한 후,

태자보도관(太子補導官)이라는 명목(名目)만의 직책(職責)에 자족(自足)하면서

시(詩)와 술과 거문고를 삼우(三友)로 삼아 지내고 있을 때였다.

그는 당시 돌보는 이 없어 퇴락한

향산사(香山寺)를 자신의 사재와 주위의 도움을

얻어 증수를 한뒤,친구인 여만선사(如滿禪師)가 향산사 주지가 되도록 도왔다.

그 후 백거이는 여만선사 등과 함께

승속(僧俗)의 9명이 향산구로시사(香山九老詩社)

를 결사하고 그들과 함께 이곳에서 시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호를 향산거사(香山居士)로

지었을 만큼 향산사를 좋아했는데,

죽을 때까지 이 곳에서 18년간 문필생활을 하였다.

842년 71세의 나이에 형부상서(刑部尙書)의 대우(待遇)로 퇴직(退職)했으며,

74세로 타계 하였다.


백거이의 묘 백원(白園)

향산사 경내를 벗어나 북쪽으로 걸어가니

국민당 때 총통이던 장개석과 부인인

송청령이 피서별장으로 사용하던 건물이 있다.

자동차가 그득히 많아서 무슨 호텔인가 했다

백거이(白居易)는 중국 중당기(中唐期)의

시인으로서 자는 낙천(樂天)이며,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과 향산거사(香山居士)이다.

정주(鄭州)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출생하였다고

하는데 바로 정주 신정국제공항이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의 이름인 ‘거이(居易)’는 '중용(中庸)'에 나오는

"군자는 편안한 위치에 서서 천명을

기다린다(君子居易以俟命)"에서 취한 것이고,

그의 자 ‘낙천(樂天)’은 '역(易)·계사(繫辭)'에

등장하는 "천명을 즐기고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樂天知命故不憂)"는 말에서 얻는 것으로

“천명에 순응하고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행한다(順天與素位而行)”는

유가의 처세

사상이 그대로 그의 이름자 속에 비친 것이다.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으며,

같은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병칭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 때부터 시짓는 법을 배웠으며,

15세가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詩才)를 보였다. 대대로 가난한 관리 집안에 태어났으나,

800년 29세로 진사(進士)에 급제

하였고 32세에 황제의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유명하다.

사실 백거이는 지식인에게 사랑받았던

이백, 두보의 시와 달리 서민들에게 사랑받았다고 한다.

글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그의 시를 외웠고,그

의 시를 베껴 배나 절의 기둥 벽에 붙였다.


심지어 그의 새로운 시가 나오면 사람들이

시를 베껴 쓰기 위해 종이를 사가는 바람에 장안에
종이가 바닥나는 사태가 벌어질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새로운 시를 지으면

허드렛일을 하는 노파에게 가장

먼저 읽어주었다. 한마디로 백거이는 가장 무지한 사람에게

자신의 시를 평가하게 한 것이다.

시를 다 읽어주어도 노파가 눈을 둥그랗게 뜨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

다시 붓을 들고 더 쉬운 한자를 찾아 적었다.

그러고는 다시 노파 앞에서 시를 읊었다.


노파가 다시 고개를 저으면 그는

더 쉬운 한자를 찾고자 고민을 거듭했다.
그처럼 백거이는 노파가 공감할 수 있을 때까지 수없이 고치고 다듬었다.


향산사(香山寺)후문

뤄양 향산사에 머물던

혜가는 달마의 제자가 되기 위해 토굴을 찾아왔다.

그러나 가르침을 달라는 혜가의 애원에 달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혜가도 꼼짝하지 않고 달마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밤, 눈이 내렸다.

밤새 눈을 맞은 혜가는 눈사람이 되어서도 그 자리를 지켰다.

달마는 그 모습을 보고도 모른 채 돌아섰다.

그러자 혜가는 석가모니는 자신을 버려

도를 구했다며 스스로 한 팔을 잘라 달마에게 바쳤다.

혜가의 굳은 심지에 감복한 달마는

가사를 벗어 피가 흐르는 팔을 감싸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지금 소림사 승려들이 수련을 할 때

입는 붉은 옷은 당시 혜가를 감쌌던 달마의 가사를 상징한다.


향산사(香山寺)

백거이가 향산사(香山寺)를 보수 복원하여

‘향산거사’라는 호를 쓰며 불교로 기울어졌다.


향산사(香山寺)에서 바라본 용문석굴

향산사는 용문석굴이 다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좋은 사찰이다.
이처럼 향산사는 주위풍경이

아름다워 측천무후가 극찬했다는 천년고찰이다


백거이 (白居易 ; 772~846)의 비석비문

백씨의 시조

백거이 사촌이며, 백계반의 아들인 백우경은 당나라 조정에서 참소을 입고,

신라에 동래하였다고 한다.

우경(宇經)의 자(字)는 경천(擎天)이며 호(號)는 송계(松溪)이다.

수원 백씨의 시조는 당나라 덕종 때 첨의사(僉議事)

이부상서(吏部尙書)을 지낸 송계공 백우경(白宇經)으로,


당나라 신하들의 세력다툼으로,

간신 두이기(杜以奇), 배현묵(裴玄墨)등에게 모함을 받게 되자,

당나라 덕종(779~805),

신라 선덕왕(780∼785) 때 신라에 동래하여

금성(현- 경주)의 금오산 아래 정착하여,

신라 좌복야사공 대사도(출-송계공 망단비),

또는 위지대상(位至大相, 출-영락보)을 관작하였다.


이후 백우경의 후손 백휘(白揮)는

고려 목종(재위, 997∼1009) 때

대사마대장군으로 수원군에 봉해지므로, 수원 백씨가 창본되었다고 한다.


위키백과


백거이 묘 옆에 있는

한국백씨 전국종친회에서 세운 기념비



백거이 (白居易 ; 772~846)

중국 중당기(中唐期)의 시인으로서

자는 낙천(樂天)이며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이다.


본적은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이며

뤄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 출생이다.

이백(701-762. 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712-770.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으며,


같은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병칭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 때부터 시짓는 법을 배웠으며

15세가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를 보였다.

대대로 가난한 관리 집안에 태어났으나,

800년 29세로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의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유명하다.

백거이는 807년 36세로 한림학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좌습유(左拾遺)가 되어

유교적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정치

·사회의 결함을 비판하는 일군의 작품을 계속 써냈다.

《신악부(新樂府) 50수》(805)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811년 40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에 어린 딸마저 잃자

인생에 있어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백거이 묘


백거이는 829년 58세가 되던 해 뤄양에 영주하기로 결심,

허난부[河南府]의 장관이 되었던 때도 있었으나

대개 태자보도관(太子補導官)이라는

명목만의 직책에 자족하면서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삼우(三友)로 삼아

‘취음선생’이란 호를 쓰며 유유자적하는 나날을 보냈다.


향산사(香山寺)

백거이는 831년 원진 등 옛친구들이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황혼을 의식하고 뤄양 교외의

룽먼[龍門]의 여러 절을 자주 찾았고

그 곳 향산사(香山寺)를 보수 복원하여

‘향산거사’라는 호를 쓰며 불교로 기울어졌다.

그의 생존시에 이미 그의 시는 민중 속에 파고들어,

소치는 아이나 말몰이꾼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리고,

배나 절의 기둥이나 벽에 써붙여지기도 하였으며,

멀리 외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백거이그의 시는 한국에도 일찍부터 전해져 널리 애송되었다.

현재 전하는 것은 《백씨장경집》 75권 가운데 71권이 있고,

《백향산시집》 40권도 있다.

현존하는 작품수는 3,800여 수이고,

그 중에서 《비파행》 《장한가》

《유오진사시(遊悟眞寺詩)》는 불멸의 걸작이다.

<두산대백과사전>

대표작은 비파행(琵琶行)

그가 비파행이라는 명시를 남긴것은 당(唐)나라

시기 그의 나이 45세이던 ,816년 가을이었다.


지금의 중국 강서(江西)성으로 좌천돼

강주사마(江州司馬)라는 한직을 맡고 있던때다.
그해 가을 자신을 찾아왔다가 돌아가는 친구를 강가에서 배웅하면서 짓게된 시다.


친구를 보내려다 술 생각이 난 백거이는 작은 배에 들어앉았다.
이윽고 들려온 처량한 비파 소리~~ 그는 그 소리의 주인공을 찾게 된다.


비파타는 여인은 퇴기(退妓)로 인생을 전전하면서 강서성까지 내몰린 중년

여인이었다.

그녀의 사연을 들으며,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게 된 그는 한편의 시를 탄생시켰다.

장한가(長恨歌)를 지은지 꼭10년되든 해다.



비파행(琵琶行)

심양강 나루에서 밤에 손님을 보낼 제에

深陽江頭夜送客 심양강두야송객

단풍잎, 갈대꽃에 가을바람 쓸쓸하다

楓葉荻花秋瑟瑟 풍엽적화추슬슬

주인은 말 내리고 손님은 배에 타고

主人下馬客在船 주인하마객재선

술을 들어 마시려니 음악이 없구나

擧酒欲飮無管絃 거주욕음무관현

취해도 즐거움 없는 이별을 하려하니

醉不成歡慘將別 취불성환참장별

망망한 이별의 강에 달빛만 젖어 있네

別時茫茫江浸月 별시망망강침월

그때 홀연 물 위로 비파 소리 들려오니

忽聞水上琵琶聲 홀문수상비파성

주인도, 손님도 자리를 뜨지 못하네

主人忘歸客不發 주인망귀객불발

소리 찾아 조용히 누구인지 물으니

尋聲暗問彈者誰 심성암문탄자수

비파소리 그치고 대답이 없구나

琵琶聲停欲語遲 비파성정욕어지

배를 옮겨 가까이가 자리를 청하며

移船相近邀相見 이선상근요상견

술 따르고, 등 밝혀 자리를 잡아 앉네

添酒回燈重開宴 첨주회등중개연

부르고, 또 청해 겨우 나타났는데

千呼萬喚始出來 천호만환시출래

비파 안고 얼굴을 반쯤 가리었네

猶抱琵琶半遮面 유포비파반차면

꼭지를 틀고 현을 골라 두세 번 소리 내니

轉軸撥絃三兩聲 전축발현삼양성

곡조도 이루기 전에 정이 먼저 흐르네

未成曲調先有情 미성곡조선유정

줄 감싸 쥐어 손끝으로 누르니 소리 처량하고

絃絃掩抑聲聲思 현현엄억성성사

평생에 못 다한 마음 속 한을 호소하듯

似訴平生不得志 사소평생부득지

눈썹을 내리깔고 손에 맡겨 비파 타니

低眉信手續續彈 저미신수속속탄

마음 속 숱한 사연 모두 털어 놓는 듯

說盡心中無限事 설진심중무한사

가벼이 누르고 비벼 뜯고 다시 퉁기니

輕攏慢撚撥復挑 경롱만연발부조

처음은 예상곡, 뒤에는 육요로구나

初爲霓裳後六么 초위예상후육요

큰 줄은 소란스런 소나기 같고

大絃嘈嘈如急雨 대현조조여급우

작은 줄은 가냘픈 속삭임 같이

小絃切切如私語 소현절절여사어

소란함과 가냘픔 섞어서 타니

嘈嘈切切錯雜彈 조조절절착찹탄

큰 구슬 작은 구슬 옥쟁반에 떨어지듯

大珠小珠落玉盤 대주소주락옥반

때로는 꾀꼬리 소리 꽃가지 사이 흐르듯

間關鶯語花底滑 간관앵어화저활

샘물이 얼음 밑을 흐느끼며 흐르는 듯

幽咽泉流氷下灘 유열천류빙하탄

찬물이 얼어붙듯 줄을 잠시 멈추니

氷泉冷澁絃凝絶 빙천냉삽현응절

멈추는 그대로 소리 또한 멎었네

凝絶不通聲漸歇 응절불통성잠흘

그러자 깊은 근심 남 모르는 원한 일어

別有幽愁暗恨生 별유유수암한생

소리 없음이 있음보다 애절하네

此時無聲勝有聲 차시무성승유성

갑자기 은병 깨져 술이 쏟아져 나오듯

銀甁乍破水漿迸 은병사파수장병

철기가 돌진하여 칼과 창이 부딪쳐 울듯

鐵騎突出刀槍鳴 철기돌출도창명

곡이 끝나 비파 안고 한번 그으니

曲終收撥當心畵 곡종수발당심화

화장하면 미인들이 질투를 하였다 하네

粧成每被秋娘妬 장성매피추랑투

오릉의 젊은이들 다투어 선물을 주어

五陵年少爭纏頭 오릉소년쟁전두

한 곡에 붉은 비단 수없이 받았었고

一曲紅綃不知數 일곡홍초부지수

자개 박은 은빗을 박자 맞추다 깨뜨리고

鈿頭銀蓖擊節碎 전두은비격절쇄

붉은 비단치마 술로 얼룩졌었다 하네

血色羅裙飜酒汚 혈색나군번주오

웃고 즐기며 한 해 한 해 보내느라

今年歡笑復明年 금년환소부명년

세월 가는 줄을 모르고 지냈는데

秋月春風等閑度 추월춘풍등한도

동생은 군대 가고 양어머니마저 죽고

弟走從軍阿姨死 제도종군아이사

어느덧 나이 들어 얼굴빛이 변하니

暮去朝來顔色故 모거조래안색개

문 앞은 쓸쓸하고 찾는 손도 드물어

門前冷落車馬稀 문전냉락안마희

늙어서 어쩔 수 없이 상인의 아내 되니

老大嫁作商人婦 노대가작상인부

상인은 이익보다 이별을 가벼이 여겨

商人重利輕別離 상인중리경별리

지난달 부량으로 차를 사러 갔다 하네

前月浮梁買茶去 전월부량매다거

강어귀에 왔다 갔다 빈 배만 지키자니

去來江구守空船 거래강구수공선

배 비추는 밝은 달에 강물만 차가와

繞船月明江水寒 요선월명강수한

밤이 깊어 문득 어린 시절 꿈을 꾸면

夜深忽夢少年事 야심홀몽소년사

꿈도 울어 화장 눈물 얼굴을 적신다 하네

夢啼粧淚紅闌干 몽제장루홍난간

비파 소리 듣고 이미 탄식 했는데

我聞琵琶已嘆息 아문비파이탄식

여인의 말 듣고 나니 다시 한숨이 나네

又聞此語重唧唧 아문차어중즉즉

우리는 같은 천애의 불행한 신세

同是天涯淪落人 동시천애윤락인

상봉이 어찌 아는 사이만의 일이랴

相逢何必曾相識 상봉하필증상식

나는 지난해에 서울을 떠나

我從去年辭帝京 아종거년사제경

심양성에 귀양와 병들어 누웠다네

謫居臥病潯陽城 적거와병심양성

심양 땅은 외지고 음악도 없어

潯陽地僻無音樂 심양지벽무음악

한해가 다가도록 악기 소리 못 듣고

終歲不聞絲竹聲 종세불문사죽성

분강 가까이 살아, 땅이 낮고 또 습해

住近盆江地低濕 주근분강지저습

갈대와 대숲만 집을 둘러 무성타네

黃蘆苦竹繞宅生 황려고죽요택생

그간 아침저녁 들은 소리라고는

其間旦暮聞何物 기간단모문하물

피맺힌 두견새와 원숭이의 슬픈 소리

杜鵑啼血猿哀鳴 두견제혈원애명

봄 강의 아침 꽃과 가을 밤 달빛 아래

春江花朝秋月夜 춘강화조추월야

가끔 술을 얻어 홀로 잔을 기울이고

往往取酒還獨傾 왕왕취주환독경

어찌 산 노래와 초동의 피리 없으랴 만은

豈無山歌與村笛 기무산가여촌적

조잡하고 시끄러워 들어주기 어렵다네

嘔啞嘲哳難爲聽 구아조절난위청

오늘 밤 그대의 비파 소리 들으니

今夜聞君琵琶聲 금야문군비파성

신선 음악 들은 듯 귀 잠시 맑았네

如聽仙樂耳暫明 여청선악이잠명

사양 말고 다시 앉아 한 곡 들려 주오

莫辭更坐彈一曲 막사갱좌탄일곡

내 그대 위해 비파행을 지으리니

爲君飜作琵琶行 위군번작비파행

나의 말에 느꼈는지 한 동안 서 있더니

感我此言良久立 감아차언양구립

물러앉아 줄 울리니 곡조는 점점 급해져

卻坐促絃絃轉急 객좌촉현현전급

슬프기 그지없어 앞의 곡과 다르니

凄凄不似向前聲 처처불사향전성

듣는 모든 사람 소리 죽여 흐느끼네

滿座重聞皆掩泣 만좌중문개엄읍

그 중 누가 눈물을 가장 많이 흘렸는가

座中泣下誰最多 좌중읍하수최다

강주사마의 푸른 적삼 흠뻑 젖어 있구나

江州司馬靑衫濕 강주사마청삼습

현실로 돌아와서 차를 산다

중국 여행하면 의례들리는 곳

중국 엽차 하나씩


보이차는

식전 30분, 식후 30분은 보이차를 마시지 않습니다

보이차의 종류에는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아래 사진과 같은

"장성차"라 불리우는 "생차" -

중국 운남성 생산지에서는

진정한 보이차로 생각하고 있는 물건입니다.

전통적인 건창발효 방법으로 만든 보이차 입니다.

두번째는

"허수차"로 불리우는 "숙차"-

1970년대 이후 만들어지기

시작한 습창발효를 통한 보이차로 검붉은 색을 띕니다.

우리나라사람들은 이것을 보이차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번째는

"핀라오차"로 불리우는 "노차"입니다.

"생차"든 "숙차"든 30년이 넘으면 "노차"로 인정을 받습니다.

마시는 물건이 아니라 예술적 가치로 생각합니다.

보이차 떼어내는 방법부터 사진을 보며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잘 만들어진 보이차는

손으로도 떼어낼수

있도록 되어 있고 떼어내더라도 부서짐이 적습니다.

손으로 떼어낸 후의 모양입니다.

하루 엄지손가락 반 만큼

떼어낸 보이차는 하루 종일 우려 마실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보이도"라는

칼을 이용해서 살짝살짝 찔러준다음

찻잎의 부서짐을 최대한 방지하고 떼어내는 방법입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좋습니다.

두번째 보이차 맛나게 우리는 방법 입니다.

마시는 방법은 몇가지가 있지만

전통다구를 이용하는 방법과 간편한

다구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간편한 다구에 마시는 방법입니다]

우선 보이차를

적당량 떼어낸후 차다구 안에 넣습니다.

팔팔끓는물을 다구안에 부어줍니다.

약 30초 정도

찻잎이 다 풀어지는 것을 확인합니다.

처음 우린물은 과감하게 버립니다.

보이차의 더운기운을 깨우고

보이차에 붙어있는 잡기운을 분리하는 과정입니다.

찻주전자 안쪽에 다구를

넣고 두번째 끓인물을 부어줍니다.

약3초 정도 후에 상단의

단추를 눌러서 우려낸 찻물을 아래로 내립니다.

잘 우린 찻물을 찻잔에 따라 마시면 됩니다.

세번째도 네번째도

계속 우려 드시면 되고 하루 20번 이상 우려 마실수 있습니다.

보이차의 맛은 색감을

감상하면서 물의 온도와 시간을 조정하시면

능숙하게 맛있을때

우리는 시간을 경험상 조절하실수 있습니다.

[전통 다구를 이용해 우리는 방법입니다]

보이차를 적당량 떼어낸후 다구 안에 넣습니다.

팔팔끓는 물을 다구에 넣어줍니다.

뚜껑을 닫은후

다구 바깥쪽에도 끓는물을 부어줍니다.

다구에서 손실되는 열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약 30초 후에

첫번째 우린물은 "비에커런"에게 줍니다.

"비에커런"이란

: 찻상의 또 다른 손님입니다.

첫번째

우린물은 마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찻상에 있는 거북이나 두꺼비 등

찻상손님에게 주는 것입니다.

두번째 부터는 마시는 차를 우리는 것입니다.

팔팔끓는

물을 넣은 후 약 2~3초 후에 우린물을 내립니다.

이후 20~30번 가량 우릴수 있습니다.

(녹차와 다른 보이차의 성품)

잘 우린 보이차를

걸음막을 이용해서 거른후 유리 주전자에 내려줍니다.

잘 우린 보이차를

잔에 따라 식기전에 마십니다.

보이차는 더운성품을 가지고 있고

식은 보이차는 효과가 없는것으로 간주하고

마시지 않습니다.

보관후 마시려면 보온병에 보관하여 마십니다.

보이차의 색감 입니다.

["장성차"라 불리우는

"생차"의 색감은 노란색이 강합니다]

["허수차"라 불리우는

"숙차"의 색감은 검붉은 색이 강합니다]

좋은 보이차 드시고 간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이상 보이차조리방법 빌려온 글입니다)

보이차(puer tea)

중국에서 산 유일한 물건,

가짜가 많다고 들었기 때문에 찜찜했다

지금도 안먹고 그냥있다.우리나라 보성녹차가 더 좋다.

푸얼차 [普洱茶(보이차), puer tea]

중국차의 일종. 주재료 차나무 잎
조리시간 2∼3분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들이 마시기 시작한 것으로 발효한 흑차의 일종이다.

여러 지방에서 생산된 차를

푸얼현(普?縣) 차시장에서 모아 출하하기 때문에,

푸얼차[普洱茶]라는 이름이 붙었다.

푸얼차는 운남 대엽종 차잎을 이용하여

햇볕에 건조시켜 만든 모차(母茶)를 이용하여 만든 차를 말하지만,

원료의 부족으로

사천성, 베트남, 타이 등지의 차엽으로도 만들고 있으며, 이런 차를 변경보이차라고도 한다.

오래되면될 수록 떫은 맛이 사라지며,

향기가 오래 지속되는 특징이 있다.

잎을 우려낸 색깔은 옅은 홍색에서 세월이 지날 수록 심홍색 계통으로 변해간다.

포장에는 대나무껍질을 사용하는데 습기를 막고 잡냄새를 여과시키는 기능이 있다.

형태는 잎차인 산차(散茶),

쪄서 덩어리로 만든 긴압차(緊壓茶)가 있으며,

긴압차의 종류는 병차, 전차, 긴차, 방차, 타차등 시중에 다양하게 유통되고 있다.

소수민족들이 주로 마시다가 중국 본토로 알려졌으며

1726년에 이르러서는 공차(貢茶)로 지정되었다.

오래 묵은 차일수록 품질이 좋으며,

가장 오래된 금과공차(金瓜貢茶)인 푸얼차는 100년 정도 되었다.

자연건조법인 건창법으로 만들어진 차는 문화대혁명 때 대부분 사라졌다.

현재 유통되는 것은 악퇴(渥堆)라는

제조공정을 이용하여 미생물을

생성시켜 속성발효시킨 모차를 건조후 긴압해서

출하는 숙병이 대부분이며,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청병보이차는 그 생산량이 적다.

지방과 콜레스테롤을 분해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애용하는 사람들이 증가 추세에 있다.

마시는 방법은 우선 덩어리로 된 것은 잘게 부수고,

산차는 그대로 2∼3g의 찻잎을 다관에 넣는다.

끓인 물을 부어 2∼3분간 우려내어 처음 우려낸 찻물은 버리고

그 다음부터 맛이 다할 때까지

여러 번 우려 마실 수 있다. 홍차보다 색이 짙고 떫은 맛이 없다.

- ⓒ 두산백과사전


보이차(普洱茶 푸얼차)

낙양역

뤄양 [洛陽(낙양), Luoyang]
중국 허난성[河南省] 서부에 있는 도시.

위치 중국 허난성 서부
인구 1,397,051 명(2006년 기준)


황허강[黃河]의 지류인

중국 허난성 서부 뤄허강[洛河] 유역에 위치한다.

중국의 7대 고도(古都)로 꼽히며,

성도(省都)인 정저우[鄭州]와의 거리는 140km이다.

장안(長安:지금의 西安)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자주 국도(國都)가 된 곳으로 유명하다.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난 뒤 쇠퇴하여

오대(五代) 때에 후당(後唐)의 국도가 되고,

북송(北宋) 때까지 서경(西京)이라고 불렀으나

원(元)·명(明)·청(淸)나라 때에는 지방도시로 일관하였다.


낙양역


뤄양 [洛陽(낙양), Luoyang]
중국 허난성[河南省] 서부에 있는 도시.

중화민국 시대에는 한때 성도가 되었고,

1933년에는 난징[南京] 정부가 이전해 왔던 적도 있다.

1948년에 시(市)로 승격하였다.


문화유적으로는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인

바이마사[白馬寺]·중국 미술사상

중요한 문화재로 꼽히는 룽먼석굴[龍門石窟],

이밖에 톈진교[天津橋]·관린[關林]·

뤄양구무[洛陽古墓]박물관·무단[牡丹]공원

·백거이묘(白居易墓) 등 명승지가 많다.

두산백과사전

낙양역 내부모습


낙양역 내부모습

역에서 안내하는 방송소리와

함께사람들이 어찌나 크게 떠드는지 귀가 아팠다

낙양하면 떠오르는 북망산

북망산 [北邙山]
중국의 뤄양[洛陽]땅에 있는 산.

정확히는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시(市) 북쪽에 있는 작은 산 이름이다.

뤄양은 B.C. 11세기에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이곳에

왕성을 쌓은 이래 후한(後漢)을 비롯한

서진(西晉)·북위(北魏)·후당(後唐) 등 여러 나라의 도읍지로서 역사적으로 번창하였던 곳이다.

그만큼 뤄양에는 많은 귀인·명사들이 살았으며,

이들이 죽은 뒤 대개 북망산에 묻히고 있어

이곳에는 한나라 이후의 역대 제왕과 귀인·명사들의 무덤이 많다.

이와 같은 연유로 어느 때부터 인가

북망산이라고 하면 무덤이 많은 곳,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고,

지금도 ‘북망산천(北邙山川)’하면 무덤이 많은 곳,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 ‘

북망산 가는 길’하면 사람의 죽음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현재는 주변 논밭이 생기고 목장도 들어서 있다.

두산백과사전

여기 낙양에서 이 급행 열차(KE869)를 타고 서안으로 간다

소요시간 5시간 30분



열차내부모습

예정시간 보다 40분정도 연착했다.

가이드말에 의하면 40분연착은 연착도 아니란다.

정해진 열차시간에정시도착이란거의 불가능 하다고 한다.


미리 예약한 덕분에

좌석에 앉아 서안으로 편안히 갈수 있었다

정주-성도행 급행열차를

낙양에서서안으로 가고있다


소주한잔을

곁들이면서 이야기 하며 지루하지 않게

5시간 30분의

긴 여행끝에 21시 30분경 서안(시안)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비는 쏟아지는데 역으로 우리를 마중나온 중국인 버스기사가

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해있던

버스안에서 운전대를 잡고 잠이 들어버려

핸드폰연락이 안되여

버스있는 곳을 찾아가느라 비를 흠뻑맞으며 먼길을 걸어가느라 개고생했다.


한식 돼지 삼겹살!

늦은밤 비를 흠뻑맞고와서 모처럼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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