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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에서부산까지

유관순기념관

토론토에서 고국을 방문한 가인 죽마고우함께

유관순기념관 방문

유관순

[柳寬順, 1902.12.16~1920.9.28]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아우내 장터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충청남도 천안(天安)에서 태어났다.

1915년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에 편입하였으며,

1918년에는 고등과 교비생으로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고,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만세시위를 지휘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유관순 [柳寬順, 1902.12.16~1920.9.28]

천안·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협의,

4월 1일 아우내[竝川]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중권(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는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고, 집마저 불탔으며, 자신은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영명학교(永明學校)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끌려온 오빠 관옥(寬玉)을 만났다.

그후 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 5월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네장터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벌였던 아우내 장터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은 1919년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은 천안 병천 시장에 있던

3,000여 명의 군중이 일제의 조선 식민지배에 반대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일제 경찰은

총검을 이용하여 강력한 제지를 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네장터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벌였던 아우내 장터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한 유관순은 3월 13일

귀향하여 아버지 유중권과 조인원

그리고 숙부 유중무에게 서울의 상황을 전하자

이들은 4월 1일 병천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31일 밤 자정에 병천 시장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과 수신면 산마루

및 진천 고개마루에 거사를 알리는 봉화횃불을 올렸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네장터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벌였던 아우내 장터

야간을 이용해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고,

천안쪽 길목은 조병호가, 수신면 쪽은 조만형이,

충북 진천 쪽은 박봉래가 맡아 만세를 권유하기로 하였다.

4월 1일 홍일선과 김교선 등은 병천시장에

나가 만세시위의 참여를 권유하였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은 시장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네장터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벌였던 아우내 장터

이에 시장 군중들이 크게 외쳤다.

시장에서 약 50보 정도 떨어진 병천

헌병주재소의 소산 소장 등 일경 5명은 만세 소리에 놀라

시장으로 출동하여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시위대가 불응하자 즉시 발포하였다.

사상자들의 친지는 시신을 헌병 주재소를 옮기고

항의를 하였고 김교선, 한동규, 이백하, 이순구 등이

군중 100명과 함께 주재소로 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으며

사망자에 대한 조치와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네장터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벌였던 아우내 장터

유중권은 헌병에게 총검으로 옆구리와

머리를 찔려 빈사 상태에 이르렀는데 동생 유중무는

형을 업고 주재소로 가서 치료를 요구하였다.

군중이 점차 늘어나서 1500명이

이르렀을 때 헌병들이 권총을 발포하였다.

시위대는 헌병 보조원 맹성호와 정수영에게

동족으로 같은 민족을 죽이느냐고 항의를 하였고,

유관순은 주재소장을 잡아 낚아채면서 항의를 하였다.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7] 교사 김구응이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일경은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김구응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그의 두개골을 박살냈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네장터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벌였던 아우내 장터

비보를 듣고 온 그의 모친 최씨가 아들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자 노모마저 창과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일제의 강제 진압으로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은 19명이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 투옥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병천리


"아우내"란,

충남 천안시 병천(竝川)의 순수한 우리말 이름입니다..
병천이라는 지명을 한글로 풀이한 것이지요.

병(竝)자가 아우를 병자고요 천(川)자가 내 천자입니다


그러니까 동생네를 가리키는것도 물론 아니고

집냇물이라는내(川) 이므로 아우네.가 아니라 아우내 입니다.
옛날엔 '아오내'라고 했습니다.


"아우내"란 여러개가 모여 합치지다는 뜻의 "아우르다" 와
강보다는 적은 하천을 뜻하는 "내" 를 합성하여 부른 지명이름 입니다.

이 "아우내"를 한자로 표기하여 병천(竝川)으로 부르고 있고요..
위의 지도와 같이 병천지역이 산방천등

여러개(2개 이상)"내"가 모여서 합쳐지는 위치에 있어

"아우내"란 지명으로 불른것입니다.


병천순대의 역사와

병천순대가 유명해진 이유


병천에 순대 전문 식당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직후다.


햄 공장이 병천에 들어서면서 돼지고기 부산물을 활용한 식당들이 덩달아 생겨났다.
순대 식당도 그중 하나였다.


먹을거리가 귀한 시절에 값싸고

영양 많은 순대는 서민층에게 환영받는 음식이었다.


병천에 장이 서는 날이면 순대국밥을

먹으려는 이들로 순대국밥 식당 앞은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

자료출처. Yonhap Imazine

우리일행은 밀양에서

추풍령을 거쳐서 병천에 도착하여

두부전문점에서 순두부백반으로 점심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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