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임진에서부산까지

도담삼봉

토론토에서 고국을 방문한 가인 죽마고우함께

도담삼봉(嶋潭三峰)방문


4/15일 김삿갓면의 김삿갓문학관을

관람한후 베틀재를 넘어

늦은밤 단양의 백년모텔이란곳에서

숙박한후 아침일찍 도담삼봉으로 출발하기 앞서 기념촬영


이 모텔은 방을 새로

단장해서인지 방안에서 페인트 냄새가 심했다

아침 7시 30분 도착

도담삼봉의 넓은 주창장에는 한대의 승용차만이 보인다.

바로 우리 승용차다.

도담삼봉(嶋潭三峰)

남한강에 있는 세 개의 바위 봉우리,


세 봉우리 가운데 중봉에는 조선 영조 때

능영정이 있던 자리를 삼도정(三嶋亭)이 대신하고 있는데,

일출 경관이 매우 빼어나

사진작가들이 새벽마다 진을 칠 정도의 명소로 사랑받고 있다.


 능영정이 오래지 않아 철거된 뒤

조선 말엽에 목조 사각정자가 있었지만

1972년 대홍수 때 유실,

현재는 1976년 성신양회가 지은

육각 정자의 삼도정이 아담한 모습으로 관광객을 맞는다

찬란한 단양의 아침햇살을 받으며

도담삼봉의 가운데 봉우리는 중봉이라 부르며

높이가 6m 가량으로 장군처럼 늠름한 기상을 한껏 보이고,

중봉 옆에 교태를 머금은 듯 서 있는

남봉은 첩봉이고 북봉을 처봉이라고 부른다.

 부부는 사이가 좋았지만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남편은 첩을 얻었는데

얼마 후 임신한 첩이 남편 쪽을 향해 배를 내밀고 있고,

아내는 그 꼴을 보기 싫어 등을 돌리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배경 소나무의 모습이 일품이다

빼어난 경치 덕에 도담삼봉은 재미난 설화도 많다.

자주 회자되는 것이 정도전의 일화다.

도담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 때

단양까지 떠내려 와 도담삼봉이 되었다 한다.


삼봉이 물에비치고 맑은물위에

떠나가는 배가 시상을 떠올리게 한다.

조선 개국공신인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37∼1398)이

어린 시절 이 바위를 자주 찾아 벗 삼아 놀았으며,

호를 이 세 봉우리에서 딴 '삼봉'이라 지었을 만큼 이곳을 아꼈다고 전해진다.

모텔에서 아침 커피 한잔만을 마시고

도담삼봉으로 왔답니다.

당시 강원도 정선에서는 이 바위가 정선에서

단양으로 떠내려간 것이라며

주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했는데

주민들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꼬박꼬박 세금을 물면서 불만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 때 일곱 살이던 정도전이

세금을 받으러 온 정선 관리를 가로막으며

"우리는 떠내려온 바위 때문에 오히려 물길이 막혀 피해를 보고 있다"며

"세금을 낼 수 없으니 억울하면 정선으로 다시 가져가라"고 하자

관리가 아무 말 못하고 돌아갔고 이후로는 세금을 내지 않았다 한다.






고려 말과 조선 초 문신이자 학자였던

정도전은 유학은 물론 예악과 제도,

음양, 병력, 의학 등에 두루 능통하였으며

여러 방면에서 활약했는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도담삼봉의 절경에 반해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

경치를 글로 찬양했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은

단양군수 시절 노을이 지는 도담삼봉을 바라보다 시를 남겼다.



시를 잠시 감상해 보면 어떨까.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석양의 도담삼봉엔 저녁놀 드리웠네.

신선의 뗏목을 취벽에 기대고 잘 적에,

별빛 달빛아래 금빛파도 너울지더라.'


 이황의 문하생인 황준량, 황응규 등과 홍이상, 정경세,

김창협, 신광수, 이윤영 등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많은 문인들도

도담삼봉의 절경에 흠뻑 취해 주옥같은 글들을 수 없이 많이 남겼다.

 김정희는 이곳을 둘러보곤 "도담삼봉의 품격과 운치는

신선 그 자체"라고 극찬했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뾰족한 바위가 기이하고 교묘하지만 높다란 절벽이 없는 것이 한스럽다"고 했다.

 


또 이은상은 '가을을 안고'라는 기행문에서 봉우리 이름과 관련해서

"처첩(妻妾) 관계의 못된 풍속도 대신

형제나 남매의 관계로 보아야 깨끗한 자연, 평화로운 자연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 마을에는 시, 전설 외에 많은 민요들이

수백 년을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한강을 따라 올라오던

소금배와 강원도의 뗏목을 나르던 뗏꾼들이 불렀던 '짐배노래', '띠뱃노래' 등이 그것이다.


명물도 등장했는데, 노래방 시설을 갖춘 음악분수로,

관광객들이 노래방 기계에 동전을 넣고 노래를 부르면 컴퓨터가

음향을 감지해 화려한 조명과 함께 36가지 모양의 분수를 연출한다.


 도담삼봉 주차장 끝에 있는 이 음악분수는 도담삼봉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어

관광객들이 도담삼봉과 남한강,

멀리 소백산의 멋진 경치를 감상하며 노래도 즐길 수 있다.


 이와 함께 도담삼봉 관광지 안에는 광공업전시관,

공예전시관 등의 볼거리와 민물고기 매운탕,

산채비빔밥 등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모여 있다.

도담삼봉 나루터에서 유람선도 운항한다.

/단양=방병철기자


정도전 [鄭道傳, 1342~1398]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문신 겸 학자.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였으며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저서에《삼봉집》,《경제문감》등이 있다.




정도전 [鄭道傳, 1342~1398]
본관 봉화 호 삼봉
본관 봉화(奉化). 자 종지(宗之). 호 삼봉(三峰).
1342년 고려 충혜왕 3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밀직제학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성하여 목은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정도전 [鄭道傳, 1342~1398]

당시 동문으로 정몽주, 윤소종, 박의중, 이숭인 등이 있었다.

1362년(공민왕 11)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듬해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내고 부모상으로 사직하였다.

13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거쳐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정도전 [鄭道傳, 1342~1398]

1375년(우왕 1) 성균사예(成均司藝)·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고

이해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親元排明)정책을 반대하다가 회진현(會津縣, 현 전라남도 나주)에 유배되었다.

1377년 유형을 마치고 고향 영주(榮州)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종사하며, 특히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정도전 [鄭道傳, 1342~1398]


1383년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의 막료가 되었다.

1384년 성절사(聖節使) 정몽주(鄭夢周)가 명나라로 가게되자

그의 추천으로 서장관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오면서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정도전 [鄭道傳, 1342~1398]


1385년 성균좨주(成均祭酒), 이듬해 남양부사(南陽府使)로 있다가

1388년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승진하였다.

이성계의 우익으로서 조준(趙浚)과 함께 전제개혁론을 주장,

1389년(창왕 1)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고 창왕(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는데 적극 가담하여

봉화현충의군(奉化縣忠義君)에 책록되었다.


1397년 동북면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역참(驛站)을 신설했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에게 참수되었다.



'임진에서부산까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국사  (1) 2010.04.28
석굴암  (0) 2010.04.27
첨성대  (0) 2010.04.27
뱍대통령생가  (0) 2010.04.27
도산서원  (0) 2010.04.27
김삿갓유적지  (1) 2010.04.25
장릉  (0) 2010.04.25
청령포  (0) 2010.04.25
신륵사  (0) 2010.04.25
영릉  (0) 2010.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