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방문일기-3
죽마고우 가인 강신봉
정몽주 선생의 묘 탐방
정몽주의 죽음
정몽주 [鄭夢周, 1337~1392 향년56세]
고려의 멸망을 예견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소신을 굳건히 지키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였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결국 선죽교(善竹矯)에서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을 시켜 정몽주를 죽인다.
이때 정몽주의 나이 56세
이성계 58세, 이방원 26세 였다.
이성계가 건국을 앞두고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크게다쳤다.
이때 정몽주가 문병을 간다고 통보를 했는데
이방원과 그 측근들은 문병오는
것을 막으려고 했으나
이성계가 허락함으로서 정몽주가 문병을 오게된다.
이에 이방원을 비롯한 측근들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이성계의 옆에서 호위를 하였다.
문병하고 난 정몽주는 이방원과 함께 다과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게 된다.
담소를 나누다가 이방원이
먼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진심을 떠보고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시조를 읊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방원의 '하여가'입니다.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젊은나이 이방원의 시조실력이 대단하다.
하여가에는 '이미 타락할대로 타락한 고려 왕조를 그만 포기하고,
자신(이방원)과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칡덩굴처럼 얽히어져 함께 조선왕조를 세우자' 라는 뜻으로 시조를 읊픈것이다.
이렇게 이방원이 '하여가"를 읊고 나자,
정몽주는 자신도 시조를 하나 지어보겠다고 하였다
이방원이 흔쾌히 승낙하자 정몽주는
시조 한수를 읊었다.
이 시조가 유명한 정몽주의 '단심가이다.
'단심가(丹心歌)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자신의 몸이 백 번이라도 죽는 한이 있고
뼈가 사무치더라도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 라는
뜻으로 이성계를 절대로 지지할수없다는 단호한 입장이였다.
백로가
정몽주선생 어머니의 시비
그 때 정몽주가 흘린 피가
아직까지 핏자국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때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을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가 호되게 야단을 쳤다고 하니
이성계도 정몽주를 깊이 존경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몽주의 묘
개성에서 죽은 정몽주의 묘가 어떻게 용인에 있나?
선죽교에 피를 뿌린 포은의 묘는 원래 개성 풍덕군에 있었다.
'生居眞川 死居龍仁'
살아서는 진천이요, 죽어서는 용인이라는 말처럼
포은 선생도 살아서는 용인과 인연이 없다가 복권이 된후
고향인 영천으로 천장되던도중에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불어
상여의 명정(銘旌)이 날아가 이곳 모현면 능원리에 떨어겼다고 한다.
그래서 지관을 불러 알아보니 이곳이
명당임을 확인하고 묘를 이곳에 쓰게 됐다고 한다.
모현이라는 지명은 포은 선생의
어진 마음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현재 정몽주의 묘는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바로 이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