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좋고 인심좋은 충청북도 진천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
충청남도 진천 지방과 경기도 용인 지방에서는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란 말이 구전되어 온다.
이는 ‘살아서는 진천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이 좋다’는
뜻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구절에는 삶과 죽음의 질서를 오가며 생긴
기막힌 사연 하나가 숨어 있다.
옛날 진천 땅에 추천석이란 사람이 살았다.
하루는 그가 잠시 잠들었다가 애절한 통곡 소리에 잠을 깬다.
그 통곡 소리의 주인은 바로 옆에 있던 자기의 아내였고, 곧이어 자식들도 따라 우는 것이다.
“왠 갑작스런 울음이요?”
아내에게 물었지만, 아내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목놓아 울기만 했다.
“우리를 두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가시다니…. 흑흑!”
그는 싸늘하게 누워 있는 바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제야 지금 자신은 혼(魂)이 된 상태라는 걸 알아차리고서 멈칫거렸다.
곧이어 저승사자들을 따라 명부전(冥府殿)으로 인도되어 간 그는 염라대왕 앞에 엎드렸다.
“어디서 왔느냐?”
“예, 소인은 진천에서 온 추천석이라 하는 사람입니다.”
“뭐라?”
염라대왕은 대경실색하였다.
용인의 추천석을 불러들여야 했는데, 저승사자들의 실수로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온 것이었다.
염라대왕은 진천 땅의 추천석을 즉각 풀어주고
용인 땅의 추천석을 데려오라고 명을 다시 내렸다.
일이 꼬이려 했던지 두 사람은 이름과 생년월일이 똑같았던 것이다.
그는 가족과 재회하기 위해 이승의 자기 집으로 쏜살같이 내려왔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육신은 땅에 묻히고 집에는 위패만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몸둥아리를 되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아내를 연이어 불렀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실의에 빠진 채 멍하니 있다가 문득 묘한 생각을 하나 떠올렸다.
용인 땅 추천석의 몸을 빌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용인으로 냅다 뛰었다.
혼이 떠난 용인 땅 추천석의 몸엔 다행히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얼른 몸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슬프게 통곡을 하던 용인 땅 추천석의 가족들은
꿈틀대며 몸을 일으키는 그의 모습을 보며 기뻐 날뛰었다.
“여보, 다시 살아났구려!”
용인 땅 추천석의 몸을 빌린 그는 여인에게 자초지종을 그대로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여인과 아들딸은 죽음에서 깨어난 헛소리로만 여겼다.
어떠한 말도 먹혀들지 않자,
그는 하룻밤을 마지못해 보내고 다음날로 즉시 진천을 향해 내달렸다.
아내라는 여인과 자식들은 그런 그를 실성한 사람인양 생각하고는 붙잡고자 뒤따라 뛰었다.
진천 고향집에 도착한 그는 상복을 입은 아내에게 외쳐댔다.
“여보, 나요 내가 돌아왔소.”
“뉘신지요, 여보라니요…?”
그녀는 돌아온 남편이라 외치는 남자의 말을 곧이들을 수 없었다.
오히려 모멸감이 들었고 이내 동네사람들을 불러모았다.
뒤따라 온 용인 땅 추천석의 아내는 남편이 잠시 미쳤다며 계속 용서를 구했다.
그는 계속 자신의 처지를 필사적으로 설명하지만
동네사람들에게 매질까지 당하고선 결국 관가로 끌려갔다.
고을 원님은 그의 사연을 쭉 듣고서 다음과 같은 명쾌한 판결을 내렸다.
“진천 땅의 추천석은 사자의 잘못으로 저승에 갔다가 다시 살아 왔으나,
자기의 육신이 이미 매장되었으므로 할 수 없이 용인 땅에 살던 추천석이 버리고 간 육신을
빌린 것이라 생각하노라.
진천 땅 추천석은
조상의 내력과 그 가족의 생년월일은 물론 논밭 등의 재산에 이르기까지 소상히 알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지금의 저 추천석은 진천에서 살던 추천석의 혼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앞으로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 死居龍仁할 것을 판결하노니,
양가의 가족도 그대로 실행토록 하라! ”
진천 땅 추천석의 혼이 들어간 그 사내는
생전에 자기의 주장대로 진천 땅에서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고,
이후 세상을 뜨자
그 육신은 본래 용인 땅에 살았던 추천석의 것이므로 그곳 가족이 찾아가게 되었다.
한편 이런 일이 있어서인지 그 이후부터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현재 충북 진천 땅에 입구에 다다르면 ‘生居鎭川’이라는 표지석을 만난다.
진천IC를 나오면 생거진천(生居鎭川) 푯말이 있다
방문기념
조카의 가건물 현장사무소에서
진천에 있는 엄나무집에서 식사후
맑은 시냇물가에 설치한 야외 식당
닭도리탕을 배불리 먹고 기념사진
직접 양계한삼계탕 백숙 닭도리탕의 전문식당이다
진천방문 기념사진
진천 종 박물관
진천 종 박물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장관리 710
한국 종의 연구, 수집, 전시, 보존은 물론 기획전시, 교육 및 다양한 활동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한국 종의 예술적 가치와 우수성을 알리고자 2005년 9월 개관되었습니다.
또한 국내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조사된 진천 석장리 고대 철생산 유적지가 있는 진천에 건립되어 그 의미가 깊습니다.
진천 석장리는 한국 최초로 4세기대로 편년되는 고대제철로의 실례가 발견되었다는 점을 들 때
금속공예의 제작도 가능하였음을 의미 합니다.
또한 진천 인근 지역인 청주 운천동에서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범종이 출토되었고, 고려시대의 용두사지 철당간도 남아있습니다.
고대 유적 가운데 최대 규모의 제철로를 소유했던 진천에 금속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범종의 문화를 기리는
종박물관의 건립은 필연적 인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천의 종박물관 방문기념.
우리나라에서 옛부터 잘 알려진 진천은 종의 고장이다
진천 종박물관에 전시된 각종 종들
진천 종박물관에 전시된 각종 종들
진천 종박물관에 전시된 각종 종들
진천 종박물관에 전시된 각종 종들
진천 종박물관에 전시된 각종 종들
진천 종박물관에 전시된 각종 종들
진천 종 박물관 앞에서
진천 종 박물관 앞에서
진천 종 박물관 앞에서
배티성지 [梨峙聖地]
배티 성지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동상앞에서
배티성지 [梨峙聖地]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있는 천주교 성지(聖地)이다.
배티(梨峙)는
신유박해(1801년)로부터 병인박해(1866년)까지 이어지는 천주교 박해시대 때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골짜기로, 1830년을 전후로 교우촌(비밀신앙공동체)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1866년 즈음에는 교우촌이 15곳에 이르렀던 곳이다.
또 조선교구 최초의 신학교가 있던 마을이고,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자 두 번째 사제였던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의 사목 중심지로 교리서인 <천주가사>가 탄생되었던 곳이었다.
또 배티와 그 주변으로는 27여 기에 이르는 순교자들의 무덤이 산재해 있다.
1976년 9월 성지로 개발된 배티성지에는 1996년 6월 완공된 성당(최양업 신부 탄생 175주년 기념성당)과
성당에서 야외제대까지 연결된 청동으로 만든 십자가의 길,
야외제대 및 성모상, 최초의 조선교구 신학교와 최양업 신부의 성당 및 사제관으로 사용되던
초가집을 재현한 건물, 양업영성관 및 수련관, 무명순교자 6인 묘역 및 14인 묘역, 최양업 신부 동상 등이 조성되어 있다.
배티 성지에서
배티성지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노고산 아래 위치한 배티성지는 많은 순교자의 종교정신을 기리고 기도하는 장소와 피정의 집으로 활용되었으나 십자가와 묵주만이 남아 천주교 박해의 정도를 가늠케한다.
동네어귀에 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란 말이 생겨났고 이것이 순수한 우리말로 배티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조선 영조때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백곡을 지나다 이 마을 노인 이순곤이 이끄는 주민에게 패한 뒤 다시 안성쪽으로 향하다 오명황이 이끄는 관군에게 진압 패전하였다는데서 패치라 불리우다 바뀌었다는 설이다.
1870년부터 다시 신앙이 싹터 1884년에는 선교사들이 진천에 배티, 삼박골, 용진골, 새울, 굴티등 5곳에 공소를 설정하게 되었으며 1890년에는 배티공소에 "교리학교"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신자들이 하나, 둘 떠나 현재 이곳 배티에는 신자들이 생업을 영위하던 옹기점과 무명순교자의 묘 만이 남아있다. 한편, 배티성지에서는 배티성지개발 후원회를 조직 교회사연구소와 피정의 집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배티 성지 최양업 신부동상앞에서
최양업 신부는 조선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사제가 된 사람이다.
그의 생애는 오랫동안 김대건 신부의 활약과 순교에 묻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앙을 증거한 관점에서 볼 때
김대건 신부의 순교는 전형적인 피의 증거이고,
최양업 신부의 사목 활동은 모범적인 땀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배티 성지에서
유래 및 설화
배티성지는 많은 순교자의 순교정신을 기리고 기도하는 장소나 피정의 집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십자가와 묵주만이 남아있다.
조선 영조때에 각 파의 당파 싸움에서 소론이 실각되자 이인좌는 불평불만 세력을 끌어 모았다.
이렇게 모인 반란군을 이끌고 28년 3월 청주에 잠입하여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살해하고 진천 백곡을 지날 때 이 마을의 팔십 노인 이순곤이 마을사람들을 모아 대항하니 반란군들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에 패한 이들은 다시 안성을 향하여 북쪽으로 올라가던 중 결국은 오명황이 이끄는 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 후 이곳을 반란군이 패하였다 하여 패티라 불리우다가 지금은 이티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청주에서 진천을 거쳐 백곡 저수지를 지나 8km정도가면 양백리가 나타나는데 배티마을을 지나쳐 고개를 오르다가 (무명의 숨은 꽃)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이름없는 순교자9인의 묘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 묘지는 배티지역에서 생활하던 신자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고개를 넘어가던 중 집단 순교해 묻혀 있는 곳으로 현재는 십자가와 묵주만이 걸려 있을 뿐이다.
원래 이 지역의 행정명칭은 양백리 이티였지만 지금은 배티마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배티라는 지명은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배나무고개라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병인박해(1866년) 이후 배티와 소학동 일대의 신자촌은 많은 순교자를 내고 일시적으로 와해됐고 신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여러 골짜기의 신촌은 없어지고 백곡공소와 함께 배티성지 너머 잿님골에서 순교한 밀양 박씨 발라바와 시누이 남원 윤씨의 묘가 안장돼 있다.
안성에 소재한 홍승균사장의 양돈장
안성에 소재한 홍승균사장의 양돈장
안성에 소재한 홍승균사장의 양돈장
규모가 엄청나다. 이런 돈사가 여러개 있다
홍승균사장댁 방문기념
안성 홍승균조카 전원주택 방문기념
수필가 김선숙님댁 방문기념
수필가 김선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