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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소현세자


억울하게 죽은
소현세자 부부 이야기

소현세자

(昭顯世子,1612-1645 향년33세)


비운의 왕자 소현세자 인조의 장남
1625년 세자로 책봉되었고, 부인은

강석기의 딸인 민회빈강씨이고

보통 강빈이라고 부른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소현세자빈 강씨

(1611-1646 향년35세)


조선 제16대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비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


민회빈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로 강감찬의 19대 손녀이다.

1627년(인조 5) 세자빈이 되었으며

소현세자가 병자호란으로 끌려갔다가 귀국한 뒤 죽자,

반목하고 있던 조소용(趙昭容)은 강빈이 세자를

죽였다고 무고(誣告)하여

궁중 후원에 유치(幽置)되었다가 1646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


광해군의 현실적인 대청외교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 정권은

집권 후 외교노선을

「친명배청정책」으로 급격히 전환했다.

만주에서 새로이 흥기하는 여진족의

후예들이 세운 후금(後金), 곧 청나라를 배격하고

한족(漢族)의 명나라를 좇자는 정책이 그것이다.

잠간

인조반정에 대하여

조선의 사관들은 광해군을 폭정을 일삼은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다.그러나 그것은 인조반정에 성공한 사대주의적 명분론자들이 자신들의 반란을 합리화한 측면이 있다.


오히려 광해군은 대명 사대주의자들에 밀려

 자신의 실리적 외교론과 현실감각에 바탕을 둔 정치이론을 완전히 꽃피우지도 못한채 밀려난 불행한 왕이다.

인보반정의 명분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대명 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과
둘째는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시켜 형제를 죽이고 불효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내건 이 명분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우선 이들이 중국의 흐름에 둔감해 시대적 대세를 읽지못했다는 점이다.당시 명은 이미 기울고 있는 나라였고 청은 일어나는 나라였다.

때문에 조선은 중국의 그런 세력 다툼을 이용해 개국 이후 계속되던 중국과의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대등한 위치로 격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이 점을 읽어내고

중립외교 노선을 걸었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대명사대주의의 길을 걸어 결국 뒷날 청에게 왕이 무릅을 꿇고 군신관계를 맺는 대치욕을 겪게된 것이다.

다음으로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비롯해 능창군 인목대비등의 왕권 위협력들을 제거한 것을 폭정으로 몰아간 부분이다.
폭정이란 원래 집권층에게 행사된 정치적 행위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민생을 위협하는 폭력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광해군은 일부 왕권위협세력을 제거하긴했으나 민간을 위협하고 학대하는 정사를 편일은 거의 없다. 그는 오히려 민생 구제에 주력하여 민생경제를 일으키는데 전력을 쏟은 왕이였다.

조선정치사를 볼 때 이른바 성군 내지는

 명군으로 일컬어지는 왕들 역시 자신의 정적 세력제거에는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태종과 세조였다.

태종은 자신의 배다른 형제를 죽였고 동복형제고 유배시켰으며

 또한 계모 강씨의 능을 일개 후궁의 무덤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를 자행하고 심지어 장자인 양녕이 왕이 될 인물이 못된다 하여 폐세자를 단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세조는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죽였으며 형수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혜쳐 관을 없애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신하들을 죽이거나 유배보냈으며 왕권에 대한 도전이 두려워 철저한 심복정치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들의 행적에 비하면 극악스럽다고 말할수도 없었다. 그는 오히려 인목대비를 살려놓기도 했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을 반대한 인물이였다.


따라서 인조반정은 그야말로 반란에 불과한 사건이라 말할 수 있다.
특히 인조반정을 주도한 인물이 한결같이 사대주의자 내지는 광해군에게 개인적인 원한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는 그들의 반정이 순수한 구국의지의 발로라기 보다는 개인적 원한에서 비롯되였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인조반정을 중종반정과 대등한 관계로 설정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연산군이 철저한 폭군이였던 것에 비해 광해군은 일부 사대주의자들과 단지 정치적 이념을 달리한 현실적인 왕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종은 반정 세력의 추대를 받은 경우였지만 인조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바정을 주도했다.
중종반정이라고 일컫는 사건이 연산군 폐출사건이였다면 인조반정은 그야말로 반정이다 역모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상 박영규지음 조선왕조실록)

소현세자


인조반정(1623년)이 일어날 즈음의

만주 정세는 극히 유동적이었다. 인조반정 한 해

전 청(후금)은 만주의

요지인 심양과 요양을 탈취했고

다음해에는 서평보(西平堡)를 장악했다.

청이 이처럼 기세를 올리는 동안 명나라는

내부 분란에 휩싸여 있었다.

귀주와 산동에서 잇따라 반란이 일어났다.
이런 혼란을 틈타 청은 급격하게 세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만약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에 정묘·병자호란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명과 청의 분쟁 와중에

조선의 위상과 국익을 한껏 드높였을지도 모른다.

반정 정권이 배청 정책으로 전환하자,

청은 명과 중원을 다투는 일전을 앞두고 조선 문제를 먼저 정리하려고 나섰다.

청태종

홍타이지(皇太極)

1592-1643.향년51세

감때사납게 생겼다

청군이 중원으로 남하한 틈을 타서

조선군이 공격해 온다면 양쪽에서 협공을 받게 되기 때문에,

만주를 기반으로 한 청으로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조선 문제를 해결해야 할 처지였다.


이는 결국 두 차례의 침략을 불러왔다.

인조 5년(1627)의 정묘호란(丁卯胡亂)과

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이 그것이다.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때는

12월의 혹한이었다.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히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청나라 군사는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남한산성

엄동설한에 도망가서 고생많이 했다

강화도는 지리적 요건이 농성할

만한 곳이지만 남한산성은 그럴 만한 곳이 아니었다.

농성의 기본조건은 자급자족 체제인데 산성,

그것도 한겨울의 산성은 농성의 자리가 아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45일 이상을 저항하던

인조는 결국 강화도가 함락돼 비빈·

대군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하고 만다.


인조는 지금의 송파구인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삼배고두례를 행했다.

1637년 1.30일 삼전도의 굴욕

인조

1595-1649. 향년 54세


허울뿐인 큰소리 외교의 비참한 결말이었다.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화의의 대가로 소현세자와 동생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야 했다.

삼전도의 치욕은 봉림대군은

물론 소현세자에게도 씻기 어려운 상흔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우리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하지만 일단

강을 건너 한 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다음에 도망치는

자는 조선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청 태종 홍타이지가 1637년 1월,

항복을 받을 당시 조선

조정에 제시했던 포로 관련 조건이었다.

참으로 무서운 조건이었다.



청태종은 1637년 1월1일

엄동설한에 탄천에서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당시 서슬 퍼렇던 청의 위협 앞에서

조선 조정은 약조를 어기기 어려웠다.

실제 조선으로 도망쳐 온 포로들

가운데 도로 붙잡혀 청 측에 넘겨진 사람들의 운명은 가혹했다.


그들은 ‘도망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酷刑)을 받았다.

끔찍한 일이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포로 문제’야말로

병자호란이 남긴 가장 큰 비극이자

인조정권을 계속 고민하게 했던 문제이기도 했다.


명분을 중시하는 조선의 성리학자인

그들에게 삼전도의 치욕은 반드시 씻어야 할 원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볼모생활 도중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현실인식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청과 조선이 처한

객관적 현실, 즉 국제관계의 역학을 인정했다.

청은 이제 동아시아를 호령하는 실력자였고

조선은 그 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의 질서 속에 편입돼 있었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려면

청과 맞서 이길 힘이 필요했다.

그럴 힘이 없는 이상 청과

대립하는 것은 조선에 이롭지 못한 일이었다.
청이 조선에 요구하는 것은 이전의

중국 왕조들이 요구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조공으로 대표되는 형식적 주종 관계를 승인하라는 것이었다.
조공 대상이 한족(漢族)이 세운 왕조든

만주족이 세운 왕조든

현실적으로 볼 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원을 청이 장악한 이상 조선은

그 질서 속에 편입된다는 것이

볼모생활에서 바뀐 소현세자의 현실 인식이었다.

심양관


소현세자는 당시 심양에

새로운 숙소를 신축해 심양관(瀋陽館)이라 불렀다.

청나라는 심양관을 통해

조선에 대한 대부분의 현안을 처리하려 했다.


인조도 청나라와 직접 접촉을

꺼렸으므로 양국간 현안은 소현세자의 차지였다.

소현세자는 양국의 접점 지역에서 양국의

직접적인 충돌을 방지하는 완충 역할을 한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심양관은

주중국 조선대사관이며 소현세자는 그 대사였던 셈이다.

심양관의 소현세자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청의 파병 요구에 대응하는 일이었다.
청이 조선에 요구하는 것 중에서

명 정벌에 사용할 군사를

파견해 달라는 것은 가장 난처한 문제였다.


친명 배청을 명분으로 집권한

인조 정권으로서는 이는 심각한

자기 부정에 해당하므로 상당한 반발이 뒤따랐다.


하지만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인조정권으로서는 청의 어떠한 요구도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하는 순간 청군의 말발굽이

또다시 조선 국토를 짓밟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인조 18년 임경업이 이끄는

수군 6천명을 파견한 것은 서인 정권의 참담한 자기 부정이었다.

유명한 반청론자인 임경업이

청과 함께 명을 치는 일에 흥이 날 리 없었다.
임경업은 명군을 향해 발포하지도 않고

일부 군사는 일부러 투항시키는 등 노골적인 사보타주를 벌였다.

임경업과 용골대

이에 격분한 청은 장수

용골대(龍骨大)를 단장으로 하는 진상조사단을 의주로 파견했다.

이들은 조선의 대신들을 의주로

불러 심문하는 이른바 「심옥(瀋獄)」을

벌여 조선은 다시 위기일발의 상황에 빠졌다.

이때 소현세자는 청의 말을 듣는 척하며

양자 사이의 완충역할을 자임했다.

아마 소현세자의 유연한 처신이 없었다면

조선인들은 화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인조 20년에 압록강 근처에 명나라 배가

출몰하자 용골대가 평안감사

등을 불러 심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도 소현세자는 시종일관 평안감사를 옹호했다.

이때 용골대는 이렇게 세자를 힐난했다.


『세자가 감사를 이와 같이 비호해 주니

그와 한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소』

세자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의심하니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구려』

이처럼 소현세자는 양국간 분쟁에서 분명히 조선편을 들면서

도 유화적인 몸짓으로 파문의 확산을 막으려고 애썼다.


이런 유연한 처신은 조선에 대한 청의

의구심을 푸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즉위하면 양국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세자빈 강빈도 소현세자 못지않은 수완가였다.

심양관

심양관의 안살림을 맡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자금이었다.

그녀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했다.

이렇게 생산된 곡식은 심양관 살림에 가장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포로로 잡혀온 조선 사람들도

원수인 청인들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세자 밑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니,

강빈의 이 농업정책은 일거양득의 양책이었다.

강빈은 이렇게 수확한

곡식을 청의 진기한 물건들과 맞바꿔 차액을 남겼다.

또한 조선 사신들이 가져오는

인삼 등을 청에 팔아 막대한 이득을 남기기도 했다.

사실 청나라 관리들에 의해 심옥이

한번 벌어지면 막대한 자금이 들었다. 청 관리들은

막대한 뇌물을 받고서야 못 이기는 체 심옥을 종결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금을 마련한 것은

모두 강빈의 수완이었다.

실로 소현세자와 강빈은 조선 역사상

가장 현실적인 세자이자 세자빈이었다.



사형시켜야할

악의 화신 인조


소현세자가 볼모로 가

있었던 기간은 장장 9년이었다.

인생의 황금기인 20대 중후반과

30대 전반을 이국에서 볼모생활로 보낸 것이었다.


소현세자는 인조 22년(1644) 2월,

34세의 나이로 꿈에도 그리던 고국 조선에 돌아왔다.

소현세자의 귀국 짐보따리 속에는 많은

종류의 서양 과학서적과 여지구가 들어 있었다.

그는 볼모생활을 하면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견식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세상이 더 이상 성리학의

시대가 아님을 심양과 북경에서 분명히 알게 되었다.

북경에서 소현세자는 한 인물을 통해

두 가지 중요한 사상과 접하게 된다.

바로 예수회 선교사 (Adam Schall)과

천주교, 그리고 서양의 과학사상이었다.

소현세자는 스스로 아담 샬이

머물고 있던 북경의 남천주당을 찾았다.

푸른 눈의 선교사와 이국의 왕세자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는 특이한 장면이었다.
이때 소현세자가 가져온

과학서적이 훗날

수원성 축성 때 정약용으로 하여금

거중기를 만들게 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이 밖에도 소현세자는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들을 데리고 귀국하기도 했다.

소현세자는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려는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더 이상 청은 원수가 아니었다.
주자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청은 원수의 나라였지만

주자학의 관점만 버린다면

청은 실리에 따라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있는 상대적인 대상일 뿐이었다.

세상은 주자학만이 아니라 천주학이란 다른 사상도 있었다.

그리고 여지구가 보여주는 대로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새로운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있었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과학기술은 조선을 새롭게 발전시킬 양축이었다.
그러나 가슴 가득 포부를 안고 귀국한

소현세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를 구렁에 빠뜨리려는 음모였다.


부왕 인조에게 있어서 소현세자는

자신을 대신해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생하다 돌아온 아들이 아니었다.


소현세자는 자신의 반청 노선에 반기를 든

정적이자 원수인 청의 회유에 넘어간 반역자일 뿐이었다.

소현세자가 볼모지 심양에서

조선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 부왕

인조는 세자에 대한 불만만 키워왔던 것이다.
더욱이 인조는 어이없게도 아들인

소현세자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의심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공포였다.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임금으로

내세워 자신을 폐출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였다.

인조는 쿠데타로 집권한

인물답게 자신의 왕위를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했다.

인조가 세자를 의심하는 것을 눈치챈

일부 정치세력이 세자를 모함하고 나섰다.

인조의 후궁인 소용 조씨도 그 중 한 세력이었다. 그

녀는 세자와 강빈이 인조를 내쫓고 즉위할 것이라고 참소했다.
세자에 대한 의심과 주위의 참소는

9년 만에 귀국한 세자의 지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인조는 심지어 환국한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하례조차도 막을 정도로 그를 냉대했다.

소현세자는 부왕의 이런 냉대에 상심했으나

그 원인을 분석할 만한 여유도 그에겐 없었다.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설고 낯선 이역만리에서 9년간이나

꿋꿋하게 지내던 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날 이유는 없었다.


당연히 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뒤따랐다.

세자의 발병일은 인조 23년 4월23일이었다.

병명은 학질이었다.

세자는 발병 3일 후인 4월26일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인조실록』은 그의 시신 상태를 이렇게 적었다.

『세자는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

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소렴 때 시체의 얼굴을 싸는 검은 헝겊)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이는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이 기록은 당시 염습에 참여했던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시신의 이상한 상태를 보고

나와 말한 것을 토대로 적은 것이었다.


그녀는 인열왕후(소현세자의 어머니)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염습에 참여할 수 있었다.

소현세자가 독살당한 것이 분명하다면

소현세자를 죽인 인물은 누구일까?


『인조실록』은 세자의 시신이 독살당한

사람 같았다는 사실을 『상(인조)도 모르고 있었다』

라고 기록했지만 이는 거짓이다.

이형익


소현세자 독살에 인조가

관련돼 있다는 증거는 한둘이 아니다.

그 하나가 소현세자를 치료한

의관 이형익(李馨益)에 대한 처리 문제다.


이형익은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의

어미 집에 왕래하던 의사로 세상에 추잡한 소문이 많던 자였다.


세자가 이형익에게 침을 맞은 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양사는 이형익을 처벌하자고 주청했다.


『오한이 심하여 몸이 떨리는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다』는

것이 양사의 탄핵 이유였다.


조선시대에 왕이나 세자가

죽으면 의관들은 특별한

잘못이 없다 해도 국문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인조는 끝내 이형익을 비호하면서 처벌하지 않았다.

인조가 세자 독살에 관련돼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소현세자의 후사 문제였다. 사망 당시 소현세자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 중 큰 아들 석철은 원손(元孫)이었으므로

당연히 그가 세손으로서 세자를 대신해 인조의 뒤를 이어야 했다.

임금이 된 봉림대군(효종)


그러나 인조는 종법을 어기고

원손 석철이 아닌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내 그 중 두 아들이 풍토병으로 죽게 했다.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련됐다는

다른 증거는 세자빈 강빈의 처리 문제였다.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강빈에게 공격의 화살이 날아왔다.
세자의 장남 석철의 보모 최상궁은

저주했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 끝에 죽어갔다.


그리고 인조 24년 정월에는

강빈궁 소속 궁녀들이

어선(御膳:임금의 수라)에 독을

넣은 혐의로 가혹한 고문을 당했고,
강빈은 후원 별당에 감금되었다.

이미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진 강빈궁 소속

궁녀들이 어선에 독을 넣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인조와 소용 조씨가

공모해 강빈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내린 인조의 비망기는

자신이 사건의 배후 연출자임을 털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홍금(紅錦) 적의(翟衣)를 만들어

놓고 외람되게 내전(內殿:왕비)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인조 스스로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그의 세 아들을 귀양 보낸 이유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인조의 악함은 강빈을 사사하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그는 결국 강빈을 폐출하여

사저로 내쫓은 후 사약을 내려버리고,

교명 죽책(竹冊) 등을 거두어 불태워버렸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강빈의

형제들까지도 죄를 씌워 사사해 버렸다.

자신의 친아들과 손자, 며느리와 사돈까지

죄없이 사사해 버린 이런 인물의 시호에

「어질 인」자를 써 인조(仁祖)라 한 것은,

서인 정권의 역사뒤집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행적을 제대로 표현하면

그는 악조(惡祖)라 불러야 마땅하다.

소현세자의 꿈과 좌절은 단순히

한 세자의 꿈이 좌절된 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꿈이 좌절된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아담 샬을 만난 것은

조선이 개국한 1876년보다

무려 2백32년이나 빠른 1644년의 일이었다.
이때 이미 낡아빠진 성리학을 버리고

변화하는 세계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면

그 처참했던 근대사의 아픔은 겪지 않아도 좋았을지도 모른다

소경원(昭慶園)



소현세자의 묘.

세자의 죽음 이후,

인조는 세자의 장례를 크게 간소화했고,

무덤 역시 ‘원’(園)으로 부르지 않고 묘로 명명하였으며,

인조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소현세자의 무덤에 방문한 적이 없다.

능원은 원래 소현묘라 불렸으나

고종때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으며,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 38-4에 있다

(서삼릉)



영회원(永懷園).
소현세자빈 강씨의 묘

소재지 경기 광명시 노온사동 산141-20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57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老溫寺洞)에 소재하고 있다.

아왕릉(兒王陵)이라고도 하며, 지정면적은 2,182㎡이다.

죽음과 함께 폐서인(廢庶人)이 되어

서민의 신분으로 묻혔다가 1718년(숙종 44)

무고(無辜)함이 판명되어 복위되고,

복원묘(復元墓)를 만들어

민회묘라 부르다가 1750년(영조 26) 영회원으로 개칭되었다.


억울하고 가엽게 죽은 여인,소현세자 빈 강씨.

경기도 광명에서 안산 가는

길쪽엔 제법 큰 저수지가 있다.

노온사지(애기능저수지)

애기능 저수지를오른편에 두고

1킬로미터쯤 걸어

산을 오르면 아담한 무덤이 외로이 솟아 있다.


이름은 영회원(永懷園).

조선의 16대 왕인

인조의 맏며느리 소현(昭顯)세자빈 강씨의 묘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맏아들이요,

효종 임금의 형 아닌가.

그이의 아내 강씨가 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묻혀 있을까?

무슨 사연이 있지 싶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8년 만에 돌아왔다.

세자빈 강씨도 함께였다.

귀국한 지 석 달 만에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사망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실록은 인조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둘러 장례를 치루며 사건을 봉합하려 한 데서,

인조가 죽음에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얼마 후 인조는 수라상에

오른 생선회를 먹고 탈이 났는데,

생선회에 독이 있었다고 했다.

인조는 남편의 죽음에 앙심을 품은

며느리 세자빈 강씨를 범인으로 몰아 별당에 가뒀다.

인조는 강씨를 역모죄로 처형할 셈이었다.


인조는 어린 세손을 보아 처형만은

면해 주자는 신하들의 상소를 차갑게 물리치고,

강씨를 사가로 내쫓아 사약을 내렸다.

남편 소현세자가 죽은 지 일 년이 채 못 돼서였다.

검은 가마에 실려 나가는

강씨의 최후를 사람들은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인조의 칼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강씨의 세 형제와 칠순 노모를 처형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강씨의 아버지를 삭탈관직했다.

강씨 일문을 풍비박산 낸 것이다.

그뿐 아니라 강씨가 낳은 세 아들, 12살, 8살, 4살 난

친손자들마저 제주도로 귀양보내 버렸다.

그 중 둘은 병들어 죽고

막내만 살아 강화도에서 목숨을 이어갔다.

세자빈 강씨의 시신은

왕가의 땅이 아닌 사가의 땅,

서울 남서쪽에 있는 강씨 집안의 사유지에 묻혔다.

지금이라도 억울하게 죽은

소현세자 부부의 묘를 합장해드렸으면 좋겠다

지금 누워 있는 바로 그곳에.

세자빈의 죽음은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시작된 비극의 제2막이다.

물론 소현세자의 죽음은 우리 역사의 비극이기도 하다.

소현세자는 당시 조선 지배층 가운데 보기

드물게 열린 눈과 앞선 생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소현세자는 급변하는 극동 아시아 정세에

눈뜨고 지구 반대편의 서양 문물까지 받아들였다.

당시 지배층이 신봉하는 성리학 말고도

다른 가치와 이념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이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은 일찌감치 자주적 근대화를 준비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무덤의 등급

능陵: 왕과 왕비의 무덤(건원릉, 선릉, 정릉...)

원園: 세자, 세자빈,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소령원, 순창원..)

묘墓: 왕자, 사대부 이하의 무덤.(연산군 묘, 정명공주 묘, 이이 묘..)

능은 왕과 왕비였던 분들의 무덤만을 호칭한다

.

엄밀한 의미에서 세자나 어려서 죽은 왕자,

공주의 무덤을 "능"이라고 칭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어린 아기 때 죽은

왕실 자녀의 무덤을 아기릉이라 불렀을 뿐만 아니라

왕실과 관련된 무덤이면 곧 아기릉이라 불렀다.


화냥년욕의 유래

仁祖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다고 온 백성들이 좋아하다
보니 며칠후 백성들이 궁궐 앞에 모여들어 淸나라에 끌려간
딸과 며느리는 물론 아내를 구해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仁祖는 淸에 끌려간 인원을 조사해보니 대부분
婦女子들로서, 그수가 50만 명이나 되므로 淸에 사신을
보내어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淸나라는 끌려간 사람들을 등급을 매겨놓고
엄청난 돈을 요구함으로 仁祖는 하는 수 없이 백성들이 각자
재산을 팔아서 그 돈으로 청나라에 가서 데려오도록 하여
상당수의 女子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때 淸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女人들을 還鄕女(환향녀)라
부르면서 온 동네에서 고생하고 돌아왔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런데 이 還鄕女들은 淸나라에 끌려가서
몸을 더럽히고 돌아온 여인들이였다.
아주 드물게는 性關係를 배워와서 온 동네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여인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이 女子들이 사회문제화되고 있으나 국가차원에서 묘한 방법이
없으므로 그대책을 각 가정에서 단속하도록 하였다.

이에 각 가정에서는

老人들이 밤낮으로 대문을 걸어 잠그고


부녀자들의 바깥출입을 못하게 하였음은 물론,

부득이 외출을
할 때도 치마 같은 것을 뒤집어 쓴 후 눈만 내놓고 다니게
하고 게다가 감시자를 동행케 하였다.

이때부터「환향녀」를 "화냥년" 이라고 부르며
부정한 이 여인들은 멸시의 대상이되었다.

요녀석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서 돌아오기 전

청의 황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주었는데,

소현세자는 황제의 벼루인 용연(龍硯)을 청했고,

봉림대군은 볼모로 잡혀온 백성들과 함께 갈 수 있기를 원했다.

돌아와서 인조를 만난 두 아들은 자신들이 받은 선물에

대해 답하자, 인조가 노하여 소현세자가 받아온 벼루를

그에게 집어던지며 용연석이라 외쳤는데,

이 말이 ‘요년석’ 또는

‘요녀석’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호로(胡虜)자식의 유래

*이들 환향녀들은 돌아올 때

이미 임신을 한 경우가 많아,


거기서 낳은 자식을 호로

오랑케 자식이라 하여사회에서 냉대하였다.





환향녀나 호로자식들은 멸시의 대상이 아닌 피해자들이다.

일본군 정신대로 끌려간 사람들과 같은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했다.

왜냐하면 왕이 평소에 국가의 안보를 튼튼히 하지 못했고
또한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여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고

전쟁이 나자 왕 밑의 신하들은 왕을 홀로 두고 도망가기
바빴고 또한 남자들이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결국
나약한 여성들만 끌려가서 청군들의 노리개가 되어

처참한 노예생활을 하다 돌아왔는데 조선에서는 전쟁에
대해 책임지는 자가 없이 모든 것을 불쌍한 여자들에게만

화냥년이라는 굴레의
죄를 뒤집어씌운 가슴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

기울어가는명나라만 하늘같이 섬기다가

욱일충천하는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배척하다가

결국 그 오랑캐에게 나라를 쑥밭으로 만들게 했던

정치를 한 임금 인조에게 그 죄를 물어야된다.

자존심만 내세우고 친명배청 정책이 나라를 망하게 한것이다.


위의 글을 작성한후 우연히

조선일보에 게재된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기사를 발견하여

아래 옮긴다


어린 손자들까지 죽음으로 내몬 ‘어질 인’
仁祖 국란을 겪은 임금들 인조⑤ 세자 일가의 비극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은 심양을 관통하는 혼하(渾河:옛 야리강) 근처에서 벼농사를 지어 청나라 고관에게 팔아 큰 이익을 남겼다. 그런 행위는 인조의 분노를 샀다.

명분과 현실의 괴리는 비극을 초래한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섬겨야 했던 인조는 청나라를 인정하려던 소현세자를 제거했다.

청나라에 맞서 싸우지는 못하면서 청나라를 인정하면 난적(亂賊)이 되는 모순은 이후 조선 지배층의 정신세계에 숱한 악영향을 끼쳤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모순은 분노의 표적을 찾았고 남은 세자 가족이 그 대상이 되었다.

소현세자의 급서는 많은 의혹을 낳았다. 학질 환자에게 사흘 동안 침만 놓았던 어의 이형익(李馨益)에게 의혹이 집중되었다.

세자 사망 다음날인 인조 23년(1645) 4월 27일 양사(兩司:사헌부·사간원)는 “세자께서 한전(寒戰:오한)이 난 이후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다”며 이형익 등의 국문을 청했다.

그러나 인조는 “국문할 필요가 없다”고 거부했다. 인조는 이형익 보호를 위해 청나라의 연호(大年號)를 쓰지 않은 상소의 봉입을 금지시켰다.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상용(金尙容)의 아들 김광현(金光炫)이 대사헌으로서 계속 이형익의 처형을 주청했기 때문이다.

김광현은 강빈의 오라비 강문명(姜文明)의 장인이었다. 세자 죽음의 배후가 차차 드러났다. 인조는 관에 재궁(梓宮:임금의 관)이란 호칭 대신 사대부·서인에게 쓰는 널 구(柩)자를 쓰게 했다. 무덤의 이름도 원(園)자 대신 묘(墓)자를 썼다.

장남의 상사(喪事) 때는 부모도 삼년복을 입어야 했으나 영상 김류(金류), 좌상 홍서봉(洪瑞鳳) 등은 기년복(일년복)으로 의정해 올렸고 인조는 한 달을 하루로 치는 역월제(易月制)를 실시해 12일간으로 정했다가 7일 만에 끝내 버렸다.

더 큰 문제는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세자시강원 필선(弼善:벼슬 이름) 안시현(安時賢)은 세자 사부(師傅)가 아무도 세자빈 강씨에게 조문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안시현은 인조 23년 5월 6일 세자의 장남인 원손(元孫) 이석철(李石鐵)을 “세손(世孫)으로 정하셔서 신민의 소망에 부응하소서”라고 상소했다. 종법(宗法)대로 장손을 인조의 후사로 삼으라는 주청이었다.

인조는 “이런 소인의 행태는 내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다”며 꾸짖고 쫓아냈다. 이상 조짐이 계속되었다.

인조는 술관(術官:풍수가)들이 영릉(英陵:세종과 부인의 능) 동쪽이 길지(吉地)라고 천거했지만 인조는 ‘길이 멀고 폐단이 크다’며 효릉(孝陵:인종과 부인의 능) 등성이로 결정했다. 이의를 제기한 술관 장진한(張鎭漢)은 국문에 처했다.

세자빈의 오라비 강문명(姜文明)은 “장례일이 자오(子午)가 대충(對沖:방위가 서로 마주침)되어 원손에게 불리하다”고 불평했다. 정북(正北:자)과 정남(正南:오)이 맞서는 날 장례를 치르면 원손에게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조짐을 간파한 안시현은 5월 27일 상소를 올려 ‘예관(禮官)이 원손을 세손으로 삼자고 주청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윤6월 2일 인조는 조정의 주요 대신을 모두 불러 속셈을 털어놓았다. “나는 숙질(宿疾)이 이따금 심해지는데 원손은 저렇게 미약하다. 금일의 형세를 보건대 어린아이가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 경들의 의사는 어떠한가?”

장남이 사망할 경우 차남이 아니라 장손이 뒤를 잇는 것이 종법이었다.

그래서 대다수 신하도 모두 원손의 사위(嗣位)를 기정사실로 여겼다. 청나라에 물든 소현세자는 제거되어야 했지만 산림(山林) 송준길(宋浚吉)이 ‘억만 겨레 신민의 희망이 원손에게 있다’며 척화파 김상헌에게 원손의 보도(輔導)를 맡기자고 주장한 것처럼 원손은 잘 교육시키면 반정 명분에 어긋나지 않는 임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인조실록』은 신하들이 원손 교체에 반대하자 “임금의 분노가 심했으므로 좌우에서 다 감히 말하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인조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며느리 강빈

그러자 영의정 김류는 “만약 상(上:임금)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면 신이 어찌 감히 그 사이의 가부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발 물러섰다.

인조는 당일 결정하라고 다그쳤고 영중추부사 심열(沈悅)은

 “국본(國本:세자)을 바꾸는 일을 어찌 말 한마디에 당장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결국 당일 원손은 교체되고 차자(次子) 봉림대군이 후사로 결정되었다.

원손은 졸지에 차기 임금 자리를 빼앗겼으나 이것도 끝이 아니었다.

인조는 재위 23년(1645) 8월 강빈의 궁녀들을 내옥(內獄)에 가두고 국문시켰다. 저주했다는 혐의였다.

인형 따위에 바늘 등을 꽂아 저주하는 것은 얼마든지 조작 가능한 일이었다.

인조의 목적은 저주의 배후가 강빈이라는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인조 23년(1645) 8월과 9월

 원손의 보모(保姆)였던 상궁 최씨와 강빈의 궁녀 계향(戒香)·계환(戒還) 등은

 심한 고문 끝에 강빈의 이름을 대는 것을 거부하고 죽어갔다.

이 저주 사건으로 모두 14명이 죽었으나 인조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인조는 포기하지 않았다.

재위 24년(1646) 1월 인조는 전복구이에 독이 들었다고 주장하며

정렬(貞烈) 등 강빈의 다섯 궁녀와 어주(御廚:주방) 나인 세 명을 또 국문했다.

『인조실록』이 “임금이 궁중 사람들에게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양궁(兩宮)의 왕래가 끊겨

어선(御膳)에 독을 넣는 것은 불가능한 형세였다(24년 1월 3일)”고 쓴 것처럼 인조의 억지였다.

인조는 강빈을 후원 별당에 가두고 문에 구멍을 뚫어 물과 음식을 주게 했다.

궁녀 난옥(難玉)은 고문사했고 강빈이 신임하던

 정렬(貞烈)·유덕(有德)은 압슬(壓膝)과 낙형(烙刑:살을 지지는 것)을 받고 죽었다.

아무도 강빈을 끌어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인조는 재위 24년(1646) 2월 3일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억지를 부렸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왕위를 바꾸려고 몰래 도모해 미리

 홍금적의(紅錦翟衣:왕비 복장)를 마련해 놓고 참람하게 내전(內殿)이라 칭호했다…

이런 짓을 차마 하는데 어떤 일인들 못하겠는가?”(『인조실록』 24년 2월 3일)

이에 대해 사관(史官)은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수종자들이 저들(彼人:청인)이 보고 들으라고 세자를 동전(東殿),

세자빈을 빈전(嬪殿)이라 칭한 것이지 세자와 빈이 자칭한 것은 아니라고 부기했다.

그러나 인조는 “예부터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는 없었겠는가만 그 흉악함이 이 역적처럼 극심한 자는 없었다.

군부(君父)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하루도 숨을 쉬게 할 수 없으니,

해당 부서는 율문을 상고해 품의해 처리하라”고 명했다.

강빈을 사형시키라는 뜻인데 공조판서 이시백(李時白)이

 “시역(弑逆)이 어떤 죄인데 짐작만으로 단정지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대한 것처럼 무리한 요구였다.

인조는 강빈의 사형에 반대하는

 대신들을 성문 밖으로 내쫓고 병조판서를 숙직시키며 경호를 엄하게 하게 했다.

대사헌 홍무적(洪茂績)은 “강빈을 폐할 수는 있으나 결코 죽일 수는 없습니다.

강빈을 죽이시려면 신을 먼저

 죽이신 연후에야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항의했다가 귀양 갔다.

인조는 24년(1646) 2월 29일 강빈의 두 오빠

강문명(姜文明)·강문성(姜文星)을 장살(杖殺:곤장을 쳐 죽임)시키고

 3월 15일에는 강빈을 덮개 씌운 검은 가마(屋黑轎)를 이용해 사저로 내쫓고 당일 사약을 내려 죽였다.

 

강빈의 무덤 영회원

『인조실록』은 세자빈이 쫓겨날 때

 “길가에 구경꾼들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남녀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했다”며

 “중외(中外)의 민심이 모두 수긍하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있다.

강빈을 죽인 인조는 과거의 저주 사건을 재심했다.

강빈이 죽어 버린 상황에서 희망을 잃은

 궁녀들은 고문자의 의도대로 강빈의 이름을 댔고 인조는 안사돈인 강빈의 어머니를 처형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인조 25년(1647) 7월 12세의 어린 석철은 동생들과 제주도에 도착했는데,

 사관(史官)은 “큰 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두었다가

하루아침에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한다면…

소현세자의 영혼이 어두운 지하에서 어찌 원통해하지 않겠는가”(25년 8월 1일)라고 개탄했다.

사관의 예견대로 석철은 다음해 9월 18일 제주도에서 죽고 말았다.

둘째 석린도 석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친손자를 줄줄이 죽인다는 비난에 직면한

인조는 나인 옥진(玉眞)에게 책임을 지워 고문해 죽여 버렸다.

시대착오적인 쿠데타의 끝은 가족 참살로 끝을 맺고 있었다.

인조는 재위 27년(1649)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 동침(東寢)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초 그의 묘호(廟號)는 열조(烈祖)였으나 인조(仁祖)로 고쳤다.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고, 아버지로서 아들과 며느리를 죽이고,

 할아버지로서 손자를 죽인 인물에게 쓴 어질 인(仁)자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내란과 외환으로 점철되었던 한 시대는 역사에 숱한 어두움을 드리우고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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