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Poland) 여행
백문이불여일견!
쉰들러리스트, 피아노등 영화와 책을 보고
나치의 잔혹상을 알고있었지만
아우슈비츠 수용소 바로 이곳을보고나서
그야 말로백문이불여일견이란 말이 딱 맞는다고 생각되였다.
나치 독일로부터 유태인은 사람도 아니였고
파리목숨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갖난아기 돌쟁이 아이들로부터 남녀노소 모두다
가스실에서 죽인후
화장해서 분쇄기로 압축해서 가루를 만들어 버렸다.
사람의 머리카락과 죽인 아기들의 신발이 산더미같이
쌓인것을 보고 소름이 끼쳤다.
유태인들이 일년에 한번씩 단체로 찾아와서 기도를 한다고 한다.
폴란드 오시비엥칭 (독일명 아우슈비츠)기차역
수많은 유태인들이
죽으러 오는줄도 모르고기차를 타고
여기 아우스비츠역으로 와서는 죽임을 당한 지옥의 역이다.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는 어느나라에 있으며,
또한 오슈비엥칭(Oswiecim)이 무슨 말일까?
아우스비츠는
세계2차대전때 유태인 대학살장소로서
폴란드에 있으며 아우스비츠는 독일발음이며
원래 폴란드어로서는오슈비엥칭이다.
오슈비엥칭을 독일어로 아우스비츠라고 발음한것이다.
가축수송용 등으로 쓰이던 열차에 닥치는 대로
실어서 아우슈비츠까지
끌고 온 다음 그 플랫폼에 내리게 한다.
유태인들중에서 선발한 악단들이 유태인들이
수용소로 입소할때 안심시키기 위해 환영식을 했단다.
물론 나중에 악단원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수용소 건물
수용소 건물벽에 붙어있는
간판에 써있는 글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자는
다시 그일을 반복하게 된다"
즉 지난일을 잊으면
똑같은 일을 겪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려서
다시는 이런일이 없도록 하자는말일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진실
미시적으로 일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의 오류를 짚어보자.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즘에 의해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광기의 피바람으로 죄없는
유럽인들이 사지로 몰려야만 했다.
그들에게 있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공포의 상징이었다.
우리는 과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진실을 알고 있는가?
학창 시절부터 줄곧 들어왔고 성인이 된 지금도
간간히 접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지리한 주제에 그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 서적을
뒤적이기 보다는
충분히 잘 아는양 우리는 간과해 버리지는 않았을까?
무엇을 얼마만큼 잘못 인식하고 있는지
그 무지와 무관심에 대해 작은 경종을
울리고자 하는 것이 이글의 목적이다.
1. 아우슈비츠는 유태인 수용소?
아우슈비츠는 유태인 대학살지(Holocaust)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유태인만을 학살하고자
만들어 놓은 수용소인가? 대답은 "아니다" 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태동은 유태인 학살을
주목적으로 했던 것이 아니라 '폴란드 정치범들을
수감하기 위한 수용소 시설의 필요성'이 주된 것이었다.
나치스는 1939년 9월 1일 단치히
(현재 그다인스크: 폴란드 북부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오래전부터
자유무역항이었음)의 반환을 요구하며
선전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불과 한달도 되지 않아 전격전으로 폴란드의
절반을 점령(독-소 불가침 조약에 기인)했고,
점령지내 민중을 이끌어갈 엘리트들을
'정치범'이라는 명목으로 무수히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기존 폴란드 형무소에 수감되있던 범법자들을 빼내고
그곳에 수감했지만 턱없이 이러한 시설들이
부족해지자 1940년 6월 14일 친위대 대장인
H. 히믈러의 지시에 의해 건설되어
그의 심복인
루돌프 헤스(Rudolf Hoess)가 관리소장으로 일했다.
첫 수감자는 '폴란드 남서부 지역의
타르누프(Tarnow)에서 잡혀온 728명의 정치범들'이었다.
그렇다면
수용소관련해서 가장 잘 알려진 유태인은
언제부터 잡혀들어와서 희생이 되었으며
무엇때문에 그러한 깊은 연관성을 지니게 되었는가?
제 1당이 된 독일 나치당은 33년 이후 부터
본국내에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방어적 구금(Schutzhaft, Protective imprisonment)을 도입한다.
"방어적 구금"이란 나치즘의 적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공공의 적대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독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방어적 구금이 필요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재판없이 투옥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첫 목표는 공산주의자, 사회당원,
노동조합원들이 줄을 이었다.
이때 유태인들도 정치적으로 이용된다.
그러나 1942년 유태 인종을
유럽에서 완전히 말살하려는 이른바
"유태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책
(Final Solution of the Jewish Question)"이
수립되면서부터 유럽 전역의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유태인 인종말살의 중심이 된다.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북유럽국,
그리스 등에 거주하는 각국 국적을 지닌 유태인들과
정치범들, 소련군 전쟁포로, 동성연애자,
여호와의 증인, 집시, 범법자들이 아우슈비츠로 끌려왔다.
잡혀온 이들 중 25~30%만이 숙련공으로 인정되어
수용소로 끌려가 강제 노역에 시달렸고
나머지는 곧바로 '샤워실 또는
소독실'이라 위장된 가스실로 끌려가
"싸이클론 B (Cyclon B)"라는 화학가스에 의해 처형되었다.
희생자의 수를 대략 250만명으로
추정하는데(학자들마다 서로의 주장이 상히함),
그 중 120만 이상이 유태인들이었기에 유태인들의
최대 학살지로 국제적인 악명을 얻게 되었다.
폴란드는 독일과 국경이 접해있다.
독일과 국경이 접해있는 나라들은 모두다 피해를 본 국가들이다.
2. 아우슈비츠는 3개이다.
우리가 머리속에 기억하고 있는 수용소는
'아우슈비츠 제 2 수용소'- '비르케나우 수용소'이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는 크게 3개로 이루어져 있다.
아우슈비츠 제 1수용소(독어식 Auschwitz, 현 Oswiecim)
1940년 6월에 만들어진 최초의 수용소로
약 16,000~17,000 명을 수감할 수 있는
28동의 수감동과 각 1개의 가스실과 화장터를 갖춘 수용소이다.
아우슈비츠 제 2 수용소-비르케나우
수용소(독어식 Birkenau, 현 Brzezinka)
아우슈비츠에서
약 3km 떨어진 비르케나우 지역에 위치해 있다.
더 많은 수용소의 필요성에 의해 1941년
제 1 수용소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졌다.
1 수용소에 비해 규모가 8.5배에 달하며 최대
10만 명을 수감할 수 있는 300동 이상의 수감동,
4개의 가스실과 화장터를 갖춘 세계 최대 수용소였다.
아우슈비츠 제 3 수용소-모노피비츠
수용소(독어식 Monowitz, 현 Monowicze)
아우슈비츠에서
약 6km 떨어진 떨어진 모노비츠 지역에 위치해 있다.
기존 염색공장을 개조해 수감동으로 사용했으며
가스실과 화장터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3개의 수용소를 아우슈비츠 수용소라 부르며
이것 말고도 폴란드 전역에 군소 40여개의
수용소가 밀집되어 있어 "유태인의 최대 학살지
"이자 전후 "유태인들의 최대 성지"가 되었다.
1945년 1월 27일 소련의 붉은 군대에 의해
아우슈비츠는 해방을 맞이하는데 이때 걸을 수 있는
수감자들 수만명은
독일로의 "죽음의 행진"을 하게 되었고,
걸을 수 없는 이들은 처형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7천여명이 목숨을 건졌다.
아울러 만행의 현장인 수용소에 대한 파괴공작에
들어가는데
가장 규모가 큰 제 2 수용소는 완파되었으나,
규모가 작은 제 1 수용소는 16동 건물만 완파되었을뿐
대부분의 건물들은 오리지널이다.
1947년 폴란드 의회에서 이곳을 박물관화하여
전세계 수백만명이 해마다 이곳을 찾아와
전쟁의 참혹상과 인간의 잔인함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3. 게토(Ghetto)
유태인 학살 장치로써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과
더불어
"게토(Ghetto, 유태인 집단 거주지"가 있다.
폴란드 전 지역의 대도시마다 설치되어 도심과
인근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을 그곳에 강제이주시켜 살게 했던 장소이다.
가장 대표적인 곳은 "바르샤바 게토"로써
최대 50만 명을 수용하여 아우슈비츠 제 2 수용소보다도
그 수용인원에서는 최대였다.
위 사건과 바르샤바 봉기를
영화화 한 것이 바로 "피아니스트(Pianist)이다.
우선 게토의 역사를 살펴보자.
11세기가 되자 십자군 원정의 시작으로
유태인이 이교도임을 재인식하고,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졌다.
유태인에 대한 종교적 박해에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태인도 가담했다.
12세기에 유태인은 그리스도교 신자와 함께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1179, 제 3 차 라테란 공의회).
13세기에는 유태인이 황색배지의 패용을
강요당하는 등 유태인에 대한 차별법이 만들어졌다(1215,
제 4 차 라테란 공의회).
14세기로 접어들자 1350년 흑사병의 원흉으로
지목된 유태인들은 처형되기 시작했고,
1480년 스페인 종교재판 후 서유럽 각국에서
국외로 추방되기 시작했다.
1513년 베네치아에 최초의 게토가 설치 되었으며
1555년 로마 교황 바오로 4세의 칙령에 의해
전유럽에 게토가 설치되었다. 이후 게토는
유태인에 대한 반감을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다.
한가지 의문이 든다.
왜 히틀러는 유태인들의 집단 거주지를 만들면서
"게토"라는 말을 굳이 사용했을까?
아우슈비츠처럼 그 지역의 지명을 따서
불러도 되었을텐데 16세기부터 회자되던
단어를 굳이 사용했던 것은 무언가 "의도한 바"가 있었지 않았을까?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게토라는 개념속엔
서유럽내의 "반유태감정"이 함축되 있다.
히틀러나 독일만의 유태인에 대한 증오심의
발로에서 유태인 말살이라는 깃발을 내건 것이 아니라
전유럽인들의 증오의 대상이지만 섣불리 제거할 수 없었던
그들을 용기있는(?) 히틀러 그리고
독일 나치가 선봉에 나서 말살한다는
대의명분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출처 : http://paper.cyworld.com/bestpol/570240
(가이사 심경섭님의 페이퍼)
젓먹이 어린아기에서 부터 남녀노소 멋도 모르고
와서는 모두가 가스로 독살당했다.
나치가 죽인 사람의 숫자가 자그만치
40만명도 아니고
그 열배인 400만명이라니
안양시 성남시 수원시 인구 모두를 합친것 보다도 많은
사람들을 죽엿다니 참으로 기가 막히다.
당시의 상황을 사진들을 보며
설명해주고있는 허은정양
치클론B 독살용 독가스통
이 독가스 한깡통으로
400명을 한꺼번에 죽일수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소련군 포로들 중 정치장교
포로들만을 골라 치클론B가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효과적으로
살상을 할 수 있는지 실험을 한 다음,
1941년 9월경부터 본격적인 ‘
유태인 학살 작업’에 들어갔던 독가스 치클론B
죽은 사람들의 머리
머리를 모두 깍아서 모아둔머리털과 머리털로 만든 카펫
금발 은발로 된 머리털이 산터미로 쌓였다.
여자들의 머리카락은 밧줄이나
옷감 등의 원료로 사용되기 위해서
바바리아의 한 회사로 보내졌다고 한다
너무 끔직해서 공포감이 감돌았다.
죽은사람들의 수많은 안경과 돋보기들
1940년 초인데도 안경 돋보기가 있었으니
유태인들은 모두가 부자였다.
죽은 유태인들의가방들
자기것을 표시하기 위해 주소와
이름을 모두들 정성스럽게 써놓았다.
죽은사람들의 수많은 구두들!
숨겨둔 보석들이 구두밑창에서많이 나왔다고 한다.
1940년대 초라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짚신을 신고 다닐때인데
이당시 유태인들은 이렇게 좋은 구두를
신고다녔으니 독일사람들로부터 미움의 대상이될만도 했다.
유태인들의 옷, 신발, 침구류, 목걸이 반지
귀걸이 귀금속 등의 보석류, 시계, 안경, 현금,
심지어 시체에서
채취한 금이빨 및 여성의 머리카락 등이 분류되었다.
그런 다음 보석과 돈은 독일제국은행(Reichsbank)로
보내지거나 중립국인 스위스로 보내졌다고 한다.
또한 시계 등은 작센하우젠 수용소로 보내져
수리되었으며 SS대원들이나 육군 병사들에게 지급되었다.
침구류와 옷 그리고 구두 등은 - 폐품은 재생되고
- 멀쩡한 것의 경우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모든 것을 잃은
피난민들에게 제공되었다.
여자들의 머리카락은 밧줄이나 옷감 등의 원료로
사용되기 위해서 바바리아의 한 회사로 보내졌다.
세계제1차대전이 끝난지 얼마않된 독일은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돈많은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수탈을하고 독일시민에게 돈빌려주고
이자 엄청붙여서 돈 뜯어내면서 독일시민들은
고통속에 살게되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런것들이 훗날 히틀러의 유대인학살 원인중
한가지가 되었다고 한다.
유태인들이 사용하던 구두광택약들
1940년초 우리나라 사람들은 맨발 나막신
짚신 신고 다닐때인데
구두광택약을 보면 유태인들이
엄청부자였다란것을 한눈에 알수있다.
수용소 내부 건물들
유태인들이 ‘최종 처리용 건물’
근처에 이르게 되면 유태인 작업인부들(Sondergruppen)이
지도해주는 가운데,
그곳 지하에 있는 이른바
이(蝨)를 잡는 방’, 즉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벗어야 했다.
그런 다음 ‘샤워실’로 들어간 뒤 그 방이 사람으로
꽉-꽉- 차이는 순간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특별히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치클론B가
담긴 통들이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이(蝨) 대신 사람이 죽는 것이다.
학살이 완료되었을 시점인 30분 후에 문이 열리고,
유태인 작업인부들에 의해 시체가 치워진다.
치워진 시체들은 작은 수레를 이용하여
구덩이로 이동되어 소각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연기에 담긴 ‘사람의 살이 타는 냄새’ 때문에 -
나치스 자체의 선전활동에도 불구하고 -
“유태인들이 비밀리에 학살당하고 있는 듯 하다”는
소문이 퍼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밤에는 불꽃 때문에 대공포 부대가
“무쟈게 신경쓰인다”는 호소를 해오기도 했다.
이 결과 1942년 말에서 1943년 초의 겨울에
화장장들이 만들어지기 시작,
그 뒤 이곳에서 시체가 소각 처리되었다.
화장장들에는 다섯 개의 3단 소각로를
갖추어 24시간마다 약 2천구의 시체를 소각할 수 있었다.
붉은 담벼락이 즉결총살시켰던 벽!
좌측 건물이 생체실험실로 사용하던 건물로서
모든 창문을 가려 놓았다.
즉결처형벽에는 유태인들이 마련한 죽은사람들의
영혼을 달래는 단이 마련돼 있다.
많은 사람들이 조화를 갖다놓고 기도하고 있다
수용소 사이사이에는
전기가 통하는 철조망이 있다.
종전후에 재판을 받는 헤스
수용소장 루돌프 헤스(Rudolf Hoess)
아우슈비츠 수용소안에 있는 사형대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였던
루돌프 헤스(Rudolf Hoess)를
교수형으로 사형시킨 사형대이다.
수용소장 루돌프 헤스(Rudolf Hoess)
아우슈비츠 수용소장’루돌프 헤스(Rudolf Hoess)는
전쟁후에연합군에 의해 1946년 3월 11일
밤 11시, 은신 중이던
농가에서 잠을 자던 중 영국군에게 체포되였다.
나치의 부총통 루돌프 헤스(Rudolf Hess)와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헤스(Rudolf Hoess)는
엄연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정확히 하자면 후자의 경우
발음을 "회스"라고 해야 맞습니다.
아우슈비츠 제2 수용소앞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앞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을 태우고 온 버스가 주차돼있다
패망을 앞둔 독일군이 소련군이 진주해 오기전에
수용소 건물들을
모두 불질러버려 광활한 터만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들과 사진 머리 신발 가방등은
소련군이 빨리 쳐들어오는 바람에
미쳐 다 파괴하지 못하고 도망간것이라고 한다.
제1수용소는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만
제2수용소는 사진과 같이 터만 남아있다.
지금 내가 서있는 위치가 아래 흑백사진에서
유태인들이 서있는 장소와 일치한다.
건물을 파괴해버려 벌판이 된 제2수용소
수용소 안에까지 철로를 놓아서 기차로 유태인들을
대량으로 실어날랐다고 한다.
기차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한유태인들
남녀노소 모두 다 mo여있는것을 볼수있다
흑백사진에서
저멀리 삼각형 건물이 보이고 철로가 보인다.
내가 찍은 컬러사진의 삼각형건물과
철로를 비교해보면 위치를 알수있다
슬라브족 및 소련의 여러 소수민족 주민들을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 정도로 보았던,
특히 ‘공산당원’에 대해서는
더더욱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을 명령한
히틀러 때문에수많은 소련군 포로들이
노동과 학대 그리고 굶주림 속에서 -
심지어 자신들끼리 죽여 인육을 먹어대기까지 하면서
- 죽어간 것 또한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다.
많은 관광객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폴란드 역사공부하기
폴란드 독립과 제2차 세계대전
장기간의 폴란드 분할 점령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인의 독립 여망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월슨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고무되어
1918년 11월 독립국가로 재등장하면서
폴란드는 1918년에서 1939년까지 독립을 유지하였다.
폴란드는 이 기간 동안
러시아와의 전쟁(1920~21)으로
영토를 확대하여 많은 이민족을 거느린 대국이 되었으나,
1926년 피우수트스키의 군사쿠데타에 의해
프랑스와의 협력관계가 독일과의
협력관계로 뒤바뀌면서 폴란드는 파시스트화되어 갔다.
폴란드 정부는 1932년에 소련과,
1934년에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으나
1939년 9월 1일 나치스 독일의
침입이 시작되어 서부 지역은 독일에,
동부 지역은 소련에 분할 점령되었다.
나치스 독일은 점령 후
대량 학살의 '죽음의 수용소'를
만들어 역사에 오점이 된 잔학한 살상을 자행했다.
나치 독일 점령 후 수립한 망명정부는
나치에 의한 파리 함락 후 런던에서 활약하였으며,
국내에는 망명정부 지휘 하의 국내군(國內軍)과
폴란드 노동자당이 편성한 인민군 등이 게릴라 활동을 하였다.
1945년 해방되었으나 1944년 8월
국내군이 일으킨 대(對)독일군 무장봉기인 ‘바르샤바 봉기’는
그 평가를 둘러싸고 큰 문제를 남겼다.
바르샤바 봉기로 시민 24만 명이 사망하고,
63만 명이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에서 피살되었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600만 명 이상의 인명피해와
국민 재산의 38%에 해당하는 재산피해를 입었으며,
제2차 대전 전후(戰後) 처리 결과
폴란드 동부지역이 소련 국토에 편입되는 대신
독일 동북부지역이 폴란드에 편입되었다.
현재의 국경선은 과거에 비하여 상당히 서쪽으로 이동된 것이다.
아우슈비츠(Auschwitz)
폴란드 제2의 도시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 지점에 있는 작은 공업도시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최대의 강제수용소이자
집단학살수용소인 아우슈비츠수용소가 있었던 곳이다.
현재는 박물관이 되어 있다. 원래 지명은 오슈비엥침이다.
철도의 교차점으로 화학·피혁·농기구 제조 등이 이루어졌다.
13세기 이후 도시로 발전하였으며,
폴란드분할시대인 1772년 오스트리아에 귀속되었다가
1918년 폴란드가 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폴란드에 귀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39년 동안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였다.
1940년 4월 27일 유대인 절멸(絶滅)을 위해 광분하였던
H.힘러의 명령 아래 나치스친위대(SS)가
이곳에 첫번째 수용소를 세웠으며,
그해 6월 이 아우슈비츠 1호에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다.
그 뒤 A.히틀러의 명령으로 1941년 대량살해시설로
확대되어 아우슈비츠 2호와 3호가 세워졌고,
1945년 1월까지 나치스는 이곳에서
250만∼4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로 인해 ‘아우슈비츠’는
나치스의 유대인 대량학살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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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왜 독일에 있지않고 폴란드에 있을까?
아우슈비츠는 왜 폴란드에 있는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무엇을 했던 곳입니까?"
라는 질문에 "지난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가 유태인을 말살하기 위해 만들어논 살인공장입니다." 라 말한다.
"그렇다면 그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어디에 있습니까?"의
연이은 질문엔 다들 확신이 없다.
아니 생각해 보질 않았다.
너무나 잘 알려진 주제 하지만 너무나 잘못 알고 있는
인종말살과 아우슈비츠의 허상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
이것은 단순히 과대포장되어 있는
유태인에 대한 동정심에 대해 반격을 가하는 목적이 아니라
이러한 역사의 왜곡을 재정립해 가며
우리 한국의 나아갈 길을
타산지석으로 삼자는 데 그 주된 목적이 있다.
1. 2차 세계대전=히틀러=인종말살정책=유태인=아우슈비츠 수용소
학창시절 은연중 지난 광기의 세월이었던 2차 세계대전을 떠올리다 보면
한국의 독립과 더불어 히틀러의 인종말살정책
그리고 아우슈비츠에서의 유태인 말살정책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연상된다.
2차 세계대전=히틀러=인종말살정책=유태인=아우슈비츠 수용소 위의
등식엔 생각의 오류를 범할 함정이 숨겨져 있다.
첫째는 지난 2차 세계대전시
히틀러의 나치(Nazis 국민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에
의해 자행된 인종말살정책에 걸려들어
유일하게 희생을 치룬 민족이 유태인이다.
둘째는, 여러 민족이 인종말살되었는데
최대의 희생을 치룬 민족은 불쌍하게도 유태인이었다.
그러나 이 두가지 명제는 사실에 어긋난다.
가장 맞는 해석은 "아우슈비츠와 같은 인위적인
학살지에서 최대의 희생을 본 민족은
유태인"이 맞지만 인종말살정책 차원을 놓고 본다면
유태인은 최대의 희생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2차 세계대전 시의 사망자를 대략 5천만명으로 보고 있다.
그 중 최대의 피해를 보았던 민족은 슬라브족.
슬라브족 중 국가별로 보면
2천만명 이상의 인적 피해를 보아야 했던 당시 소련.
두번째는 당시 인구 3천 4백만 중 6백만의 사상자와
크라쿠프를 제외한 전도시의 초토화 아울러
2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독일 천여개
군수업체(대표적인 예는 크라이슬러사이다)에
끌려가 징용에 시달려야 했던 폴란드이다.
세번째는 유태인 학자의 주장을 빌면
유럽 전역에서 6백만 그러나 비유태인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최대 4백만이라 회자되는 유태인들이 나치에 의해 인종말살됐다.
그리고 인간쓰레기로 취급당한 집시들,
독일 본국 내의 반전세력 및 나치 점령치하내
유럽각국의 엘리트들이 정치범이라는 이름으로
본국내에서도 대대적인 피바람이 일었지만
이곳 폴란드까지 끌고 들어와 죽임을 당했다.
더불어 종교 단체 중 여호와의 증인과 동성연애자,
범죄자등의 희생이 뒤따랐다.
누가 더 많은 희생을 치뤘느냐의 옥신각신은 큰 의미가 없다.
인적수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그러한 정책을 폈다는 희대의 광기에 우리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지나친 왜곡이라면
우리는 그 진실을 규명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2. 2차 세계대전의 최대 피해자로 유태인들이 인식된 배경
그렇다면 3번째로 희생을 치룬 유태인들이
왜 우리에게는 최대의 피해자인양 인식이 되어왔던 것일까?
필자는 크게 3가지 이유를 들어 그 근거로 삼고자 한다.
첫째는 냉전(cold war)이다.
전쟁이 끝이 나긴 했지만 세상은 격동기로 접어들며 이념대립의
악몽에 다시 한번 시달려야 했다. 미국과 한국,
유태인 중심의 자유민주주의 진영,
소련을 필두로 폴란드를 비롯한 위성국 8개국으로
이루어진 사회주의진영. 이념의 벽이 허물어지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가 속한 진영의 우월성만 교육을 받아왔고
적대국가인 사회주의 진영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면서 열등하다는 투의 말만을 들어왔다.
그러한 시대적인 상황속에 굳이
우리진영내에서는 적대국인 소련과 폴란드의
피해상황을 보도해 세상사람들로부터의
동정심을 유발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었으리라.
자연스레 반대급부는 유대인들...
차후 시온주의자들(zionist)에 의해 '팔레스타인 북부',
'하나님께서 선민인 유태인들에게 약속하셨던
그 땅'을 연합국의 일방적인 강요로 "이스라엘"이라는
"불행의 씨앗"을 심어 놓어 발칸반도는 화약고라 불려지고 있다.
두번째는 소련과 폴란드는 교전중에 대거 희생을 치뤘지만
유태인들은 전쟁을 피해 도피해 있다가
나치에 의해 인위적인 학살지로 끌려와 죽임을 당했다.
극히 일부의 유태인들도 자국(당시 살고 있었던 국가)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웠겠지만
그와 관련한 책자나 이야기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 (필자의 무지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세계사를 보면 전쟁시 조국을
지키려 목숨을 내건 사람들은 평상시에 핍박받고 고통받던 민중들이었다.
양반이나 귀족들은 전쟁이 터지면
도망이나 가기 일쑤고 전후에 다시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는 부류들이다.
유태인들의 경제적인 우위성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 부유한 유태인들이 전쟁이 터졌을때
자신의 조국을 위해 본인과 자식들을 전선으로 내몰았을까?
판단은 여러분에게 맡긴다.
셋째는 하즈바라(hasbara)의 결실이다.
현재 이스라엘은 히브리어로 '하즈바라'라고 불리는
외부 세계에 대한 '여론 선전전'에 해마다
수억 달러에 달하는 돈을 쏟아붓고 있다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에드워드 사이드>.
미국의 영향권내에 있는 한국, 미국을 조종하는
유태인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유태인에 의한
조종아래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3. 히틀러가 폴란드를 유태인들의 최대 학살지로 선택한 이유
이제는 미시적으로 히틀러와 유태인
그리고 폴란드로 좁혀 보도록 하자. 그리고 자문해 보자.
"왜 히틀러는 유럽의 그 많은 국가들 중 폴란드를
유태인의 최대 학살지로 지목했을까?"
달리 표현한다면 "왜 폴란드에 아우슈비츠가 설치되었까?"
그것에 대한 힌트는 "제 2의 히틀러가 등장해
제 2의 아우슈비츠를 만든다면 어디에 만들어질까?"이다.
정답은 "이스라엘"이 될 것이다.
1933년에 오스트리아 인으로써 독일의 총통이된
히틀러는 1923년 저술한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이미 밝혔듯 유태인에 대한 '양자택일'에 들어간다.
이미 본국내의 유태인뿐만 아니라
전 유럽내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 대한 분포도를 확인해 보았다.
가장 많게는 구소련과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그 다음에 폴란드에 대거 분포하고 있었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여
독-소불가침 조약(1939. 8. 23)때 스탈린에게 약속했던
폴란드의 절반을 떼어주며 동부전선의 완충지대를 만들어놓게 된다.
이후 공격방향은 서,북,남유럽. 전쟁과
더불어 인종말살정책은 함께
가동되었고 점령지 중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폴란드에 대대적인 학살 장치들을 만들게 되었다.
결국은 점령지내 폴란드가 유태인들의
최대 거주지였기 때문에 폴란드에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4. 유태인들의 폴란드 대이동의 역사와 배경
그렇다면 언제 어떠한 계기로 인해 유태인들은
다른 유럽지역이 아닌 폴란드로 대거 이동해 왔던 것일까?
14세기 암흑시기라 불리는 중세시대때
유럽은 카톨릭을 선봉에 내새워 정복의 야욕을 불사른다.
카톨릭을 전파한다는 대의명분아래 이교도 국가들을
합법적으로 공격하는데 실상 성직자는 귀족들의 또다른 이름에 불과했다.
이에 수차례에 걸친 하늘의 재앙이 있었는데 이때 돌았던
'흑사병'이라 불린 페스트의 위력은 대단하여
전유럽 인구의 1/3을 죽인
다음에서야 비로소 그 진노가 풀렸다고 한다.
각 카톨릭 국가들에선 그 원인을 찾아나섰지만
결국 어떠한 납득할만한 원인규명에 실패하게 되자
떠돌이 생활하던 이민족에 이교도들인 유태인들을
'흑사병의 원흉'으로 지목하여 대대적인 학살을 시작했다.
당시 폴란드는 카즈미에쉬 대왕(Kazmierz Wielki 1333~1370)의
통치시기로 흑사병으로 인해 서유럽처럼 막대한 피해를 보았지만
서유럽 국가들이 주장하는 '유태인의 재앙론'에 대해서는
그 뜻을 같이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살리기 위한 '종교와 거주에 대한 관용정책(tolerancja)'를 공표했다.
목숨이 위태롭던 유태인들은
자연스레 자유의 땅인 폴란드로 대거 이동해 왔다.
그러나 폴란드는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강대국들의 놀이터로 전락하게 되었다.
유태인들은 또다시 남으로, 동으로 진출해 나갔다.
출처 : http://paper.cyworld.com/bestpol/570177
(가이사 심경섭님의 페이퍼)
수용소 소장 루돌프 헤스(Rudolf Hoess)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살인 공장
아우슈비츠의 지배인, 루돌프 헤스(Rudolf Hoess)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헤스(Rudolf Hoess : 1900. 11. 25. ~ 1947. 4. 16.)
나치스의 고위급 당원이자 SS(친위대) 대원이었으며,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
또한 무려 260만 명에 달하는 유태인, 집시,]
소련군 포로, 폴란드인, 독일인 정치범 등에 대한 강제노역과
학살 관련, 그의 직속상관인 하인리히 히믈러
그리고 동료인
아돌프 아이히만과 함께 가장 중대한 책임이 있는 인물이다.
- 어린시절 -
독일 바덴-바덴의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출생하여 사제
특히 아프리카 지역 등에서 포교하는 선교사가 되려했지만,
어린 시절 친하게 지내던 신부가
그의 고해성사 내용을
아버지에게 폭로한 일을 경험한 뒤 꿈을 접었다.
아래로 두 누이동생들이 있었지만
그녀들과 원만하게 지내지는 못한 편이었으며,
어린 시절 살던 곳에 또래 친구가 부족하여
애완용 망아지나 동네 농가의 황소 같은 동물들과 친하게 지낸 편이었다.
- 제1차 세계대전과 청년기 -
제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된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 발발.
그에 따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대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등이 맞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그해 8월 발발했다.
전쟁 초반 헤스는 어머니의 허락을 얻어(아버지는 이미 사망)
적십자 보조원으로서 활동,
후방으로 이송되어온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헤스는 부상병들의
무용담(물론 상당히 과장된 것이었을 듯)에 영향을 받아
병사가 되어 전쟁에 나가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사족이지만 현재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밀리터리
소설 및 기타 전쟁이나 군대와 관련한 출판물과
인터넷 게시물들에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가를 돌아본다면,
헤스의 이 당시 행동은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라 본다.
물론 그의 어머니는 헤스의 참전을 반대하였으며,
또한 모병관들도 그의 입대를 ‘강력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헤스의 근성은 결코 꺽이지 않았고,
마침내 전쟁이 한창이던
1916년 바덴에 주둔중이던 제21용기병(Dragoon,
원래 독일군 기병대가 사용하던
기병총의 이름이 Dragoon,
즉 용龍이었기에 이런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연대에 잠입, 전부터 알고 지낸 대위의 도움으로 입대하는데 성공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헤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병력의 부족 탓이었을 것이고,
이는 당시 다른 전쟁당사국들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헤스는 들키지 않은 채 단기간의 훈련 뒤
곧바로 부대와 함께 터키 쪽 전선, 즉 메소포타미아(이라크) 전선으로 보내졌다.
헤스는 이곳에서 경험한 첫 전투에서
난생 처음 ‘사람’(영국군 소속 인도인 병사)을 죽였다.
그 후 이곳과 팔레스티나 전선 등지에서
계속 싸우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1급 및 제2급 철십자 훈장,
철초승달 훈장, 바덴 훈장 등을 받았으며,
또한 ‘최연소 부사관’이 되는 영예를 얻었다.
더군다나 어느 젊은 독일계 간호사와 야전병원에서
첫사랑을 경험하는 등 말 그대로 ‘가장 잘 나가던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1918년 11월 11일, 마침내 전쟁이 독일 및
그 동맹국들의 패배로 끝나면서 헤스는 패잔병이 된 채
포로가 되는 신세라도 면해보기 위해 자신의 휘하
소대원들을 거느리고 자신들만의 힘으로 귀향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이들끼리의 힘만으로 터키의
아나톨리아(소아시아) 반도, 흑해,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프스 산맥,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거쳐 3달 동안 여행한 끝에 귀향에 성공했다.
- 정치적 혼란기와 나치스의 집권기의 헤스 -
집에 돌아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를 맞이해준 것은 오직 혼란뿐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전쟁이 끝나기 1년 전에 돌아가셨고,
친척들은 그들 마음대로 헤스네 집과 재산을 나누어가진 다음,
그의 누이동생들을 수녀원 부설 학교로 강제로 보내버린 뒤였다.
또한 그들은 헤스에게도 신학교에 갈 것을 종용했다.
분노한 헤스는 친척들과 절연한 뒤,
곧바로 동東프러시아(Ost-Preussen)의
자유방위의용군에 입대했다.
그 뒤 로스바하 의용군에 들어가서 발트 해 연안,
루르, 슐레지엔 등지에서 폭동과 전투 등을 경험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 독일은 - 마치 헤스의 집이 그러했던 식으로
-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영국, 프랑스, 미국 등에 의해
군사력과 경제력이 박탈 혹은 약탈당한 상황이었으며,
그로인한 사회적?정치적 혼란이 심각했다.
또한 러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에 따른
영향으로 독일 국내에서도 좌파에
의한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던 상황이었다.
이에 우익 정치조직 쪽에서도 이들과 맞서기 위해 패전 이후
군대에서 쫓겨난 예비역 병사들을 끌어들여 의용군을 조직하였고,
그로인해 이들 사이의 전투와 요인암살이 심심찮게 벌어지던 판이었다.
(심지어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였던
1920년 3월에는 우익 정치지도자 W. 카프에 의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프리드리히 에버트의
사회 민주당 정권이 이끌던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들 우익쪽 의용군을 - 프랑스와 영국 등의 전승국들의
눈치를 봐가면서 - 은밀하게 지원,
이들을 이용하여 좌익 세력을 제거하려 하고 있었다.
또한 1923년 11월 8일에는
‘예비역 부사관인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대폿집 사건’(뮌헨반란)이 발발, 물론 반란은 실패하고 주모자인 히틀러가 잡혀가 감옥에 가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와중에 헤스는 루르 지역을 점령한 프랑스군의 활동을 방해하던 앨버트 슐라게터가 프랑스군에 의해 체포 및 처형된 것과 관련, 그를 ‘팔아넘긴’ 배신자를 의용군 동료들과 함께 ‘졸라 팬 뒤 목을 따고 쏴 죽인’ 사건인 이른바 ‘파르힘 사건’을 저지르게 된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헤스는 - 기실 정치적인 이유로 - 10년 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그 자신보다 더 잘 알려진) 그의 좌우명 ‘노동은 자유를 준다’(Arbeit macht frei)에 따라 ‘금자 누님이 오빠라고 부를 정도로 모범적인 생활’을 한 덕에 모범수로 인정받아 감옥소 들어온 지 5년 만인 1928년에 특별사면 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한 때 ‘착하게 살자'는 생각을 품은 헤스는 그즈음 이미 정치적 실세가 되기 시작한 옛 동료들에게서 이런저런 유혹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을 모두 거절했다. 그리고 한 명의 평범한 농부로서 살기로 결심하고 ‘농업지원청년운동’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마침내 ‘쏠로 부대에서의 영원한 탈영’에도 성공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1933년 1월 30일 감옥에서 《나의 투쟁》을 쓰며 절치부심하던 히틀러가 정권을 잡는데 성공하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최연소 기병대 부사관이자 철십자 훈장까지 수여받은 그에게도 정치적인 ‘유혹’이 들어오기에 이르렀다. 즉 SS의 총사령관인 하인리히 히믈러가 그에게 SS에 입대 및 강제수용소에서 근무할 것을 ‘요구’해왔던 것이다.
히믈러와 헤스
이런 상황에서 헤스는 SS에서 급속히 진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에 더해, 그 덕에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길 것이라는 아내의 충고에 따라 - 그런데 ‘강제수용소’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짐작도 못한 채 - 입대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는 일단 ‘수용소 경비병’의 신분으로서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배속되었다.
- 강제수용소에서의 경력 -
훗날 ‘무장 SS 토텐코프(해골) 사단’의 사단장이 되어 러시아 전선에서 싸우던 중 하르코프에서의 전투에서 소련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하게 되는 테오도르 아이케 다하우 수용소장 밑으로 들어간 그는 강제수용소 억류자들에 대한 기막힌 꼴을 목격하게 된다. 더불어 이들에 대한 아이케의 잔학한 조치 및 또한 그의 부하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교육하는 그의 모습도…….
SS의 상급조직이자 나치스의 핵심 무장조직이었던 SA(돌격대)를 숙청했던 ‘긴 칼의 밤’(1934년 6월 30일) 때 두드러진 활약을 했던 테오도르 아이케는 “이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억류자들은 비국민非國民, 즉 독일 국민이 아니다! ‘
공공의 적’이다!”라고 선언한 다음, “그렇기에 우리 경비대원들은 조국에 위험한 이 존재들을 가혹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심지어 이들 억류자들에게 매수 혹은 심정적인 동정심으로 인해 이들에게 잘 해주다가 적발된 SS대원들마저도 아이케에 의해 모든 것을 박탈당한 뒤 억류자들의 무리에 합류해야 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헤스는 그 자신 또한 자의반 타의반으로 서서히 변해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군복을 입었고, 그런 이상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그는 다시 농부로 돌아갈 수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헤스는 감옥소에서도 되뇌었던 ‘노동은 자유를 준다’는 그의 좌우명에 따라 열심히 근무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점점 늘어만 가는 ‘정치범 억류자들’(사회주의자들에서부터 군복무를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들’까지)과
‘즉결처형대상자들’(그들 중에는 체포과정에서 ‘실수’로 정치범을 놓친 그의 지인知人이던 SS장교도 있었다)을 보면서 심적 갈등 또한 누적되어갔다. 그리고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개시된 전쟁 덕에 그러한 자들이 더더욱 늘어만 가는 것도 보아야 했다.
그러던 중 1940년 1월, 즉 그가 작센하우젠으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보호감호소 소장으로 재직하던 때, 마침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를 방문한 히믈러가 그곳의 소장을 교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유는 “작센하우젠의 억류자들은 감히 이 히믈러님이 오셨는데도 인사도 하지 않을 정도로 (기실 노동에 시달리느라 바빠서 히믈러의 차가 수용소로 들어온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고 헤스는 말한다) 개판이다! 이에 수용소장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었다.
그 덕에 평소에 헤스를 싫어하던 한스 로리츠가 강제수용소 소장이 되면서 헤스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지역에 새로이 건설되기로 결정된 수용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하고 ‘쫓겨 가게 됨’이라 읽음) 되기에 이르렀다.
-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살인공장 지배인으로서…… -
1940년 5월 4일, 헤스는 인류의 역사 200만년 중에서 아마도 가장 최악의 ‘살인공장’(그냥 마구잡이로 죽이는 것이 아닌, 학살 대상의 수집, 분류, 살해, 시체처리 등이 마치 선진국형 돼지고기나 닭고기 공장의 그것처럼 진행되는……)의 지배인이 되었다.
물론 그는 단지 ‘지배인’이었을 뿐 ‘공장주’는 아니었다. 진짜 공장주, 즉 베를린에 있던 전직 독일제국군 부사관의 명령에 따라 - 그것도 직접명령이 아닌 ‘집사’를 통한 혹은 집사 단독의 명령에 따라 - 그 공장을 경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집단학살 공정工程으로 처리한 유태인만 113만 명 이상’에 이르는 그 만행에 대해서는 - 그 또한 그 자신의 고백록에서도 인정했듯이 - 분명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더 이상 그 누구도 헤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차라리 못 먹고, 못 살고, 대접 못 받아도 평범한 농부 혹은 평범한 병사로 살려고 하면 모를까, ‘강제수용소 소장으로 출세’하는 것은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그의 위로도 수용소 소장이 되려고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선배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벼락출세를 한 셈이지만, 그러나 이는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
먼저 폴란드군의 병영이었던 아우슈비츠(원래 폴란드어로는 ‘오스비에침’)의 ‘흉가의 모임’이 된 시설을 수용소 설비로 전폭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전쟁이 한창이라 물자부족은 여기저기서 만연하던 차였기에 기존의 다른 수용소나 기관으로부터 물자 지원 등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런 판에 게슈타포 등의 체포기관에서는 유태인들을 비롯한 억류자들을 언제쯤이면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문의(라고 하고서 ‘독촉’이라 읽는다) 해오는 실정이었다.
그렇기에 헤스는 어떻게 해서든 ‘수용소다운 수용소’를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렇기에 억류자들의 노동력에 더해 SS부대원들의 노동력까지 동원하기 위해 그 스스로 모범을 보여 가며 일했다.
하긴 이는 어찌 보면 ‘모순’이 아닌가 싶지만 기실 그의 쵝오 직속상관인 하인리히 히믈러마저 수시로 “노동의 강도를 줄여줄 것” 혹은 “배식과 의료 지원을 잘 해줄 것” 등을 명령해왔기 때문에,
거기 더해서 “그렇게 할 적에 이들 억류자들이 군수공장에서 더욱 열심히 노동을 할 것이며 또한 질 좋은 노동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라는 식의 지시를 해왔기 때문에도 그러했다. (그러면서도 어떤 때는 이런 명령을 뒤집는 내용의 명령을 보내어 헤스를 아연실색케 했지만…… )
세세한 일이나 시비 때문에도 늦은 밤에도 연락을 받고 일어나 나가보았고, 툭하면 개기거나 말 안 듣는 부하들을 독려하기 위해서라도 그들보다 일찍 일어나고 눈에 띄게 열심히 일하며 늦게 자는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
물자가 부족한데도 상부에서 제대로 조치를 취해주지 않을 경우, 자신이 직접 해당 물자가 있다는 지역으로 가서 그것을 구해오거나, 심지어 철근 등의 자재 부족 때문에 폴란드 군이 사용했던 버려진 토치카나 야전진지 등을 부수어 거기서 자재를 보충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그의 윗사람들 중에는 “좀 적당히 하도록 해. 원래 수용소장이란 자리에 앉아서 전화로 명령만 내리면 그만이야. 수용소 순시랍시고 둘러보고 그러는 것도 어쩌다 한 번씩만 하면 되는 것이야”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이 덕에 헤스는 ‘아주 모범적인 SS대원’으로 찍히기까지 했다. )
전쟁의 시작
이렇게 해서 일단 우리가 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아우슈비츠 1호 수용소)가 완성되었을 때에 이번에는 대확장 명령, 즉 오늘날 ‘비르케나우’(아우슈비츠 2호 수용소)로 알려진 수용소의 건설과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확장명령이 떨어졌다.
이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신설의 목적이 단순히 폴란드 내의 저항세력이나 기타 범죄자, 유태인 등을 억류하면서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을 넘어서 “제3제국(나치스 독일)의 승리를 위한 중심적인 활동의 임무가 아우슈비츠(를 포함한 모든) 강제수용소에 부여된 것”을 의미했다.
이 결과 아우슈비츠에는 농업실험장과 양어장이 들어서고, 전쟁 전부터 나치스와 정경유착관계에 있던 I.G.화르벤 사(석탄을 원료로 합성고무 및 합성석유를 생산하던 나치스 독일 내 굴지의 화학물질 제조회사)가 운영하는 합성고무 생산 공장이 건설되었으며,
또한 이를 위해 노동력으로 동원할 억류자 인원들을 수용하고 관리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거기 더해 이제 아우슈비츠와 같은 수용소가 생겨난 진짜 이유이기도 한 활동이 개시되기에 이르렀는데…….
이와 관련, 먼저 맨 앞에서 언급된 헤스의 동료 ‘칼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해 소개한다.
기실 유태인 학살과 관련, 실제로는 조연급 인물이지만 일선에서의 그의 활약과 적극적인 활동 그리고 망명지 아르헨티나에서 모사드(이스라엘 정보국)에게 체포되어 이스라엘에서 사형당하는 그 드라마틱한 최후 때문에 히틀러와 히믈러만큼이나 주목받는 인물이다.
1906년 출생, 1932년 4월에 SS에 입대한 뒤 SS보안정보부(SD)에도 배속되었다. 1938년에 오스트리아가 나치스 독일에 합병되면서 오스트리아 내 나치스 조직 지원업무의 담당 및 ‘유태인 이주국’의 책임자가 되었다.
다음해 12월에는 국가안보경찰본부(RSHA)의 유태인 담당 부서의 장이 되었으며, 1940년 8월에는 유태인 강제추방 계획인 ‘마다가스카르 계획’을 입안했다.
훗날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나치스 독일의 체코 점령지)의 총독이 된 라인하르트 하인리히에 의해 유태인 말살계획이 논의된 반제(Wannsee)에서의 회의에 참석하여 ‘유태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을 위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헤스는 히믈러의 지시에 따라 아이히만과 함께 ‘독일 국민들의 진정한 적이며, 그렇기에 - 그 어떠한 예외도 없이 전멸되어 - 반드시 그 뿌리까지 뽑혀야 할, 그렇지 못할 경우 언젠가는 분명 독일 국민들을 멸망시킬’ 유태인들을 말살시키기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먼저 독일과 폴란드, 그리고 체코와 슬로바키아, 그런 뒤 서유럽의 유태인들을 처리한다는 대략적인 계획이 이루어졌다. 또한 학살을 위한 방법으로
- 다른 수용소들이 유태인 학살용으로 일산화탄소, 즉 엔진 배기가스 등을 사용할 적에 - ‘좀 더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수용소 내에서 해충제거 및 소독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구해놓은 ‘치클론B’ 가스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을 위해 소련군 포로들 중 정치장교 포로들만을 골라 치클론B가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효과적으로 살상을 할 수 있는지 실험을 한 다음, 1941년 9월경부터 본격적인 ‘유태인 학살 작업’에 들어갔다.
학살 작업의 공정工程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
(1) 나치스의 영향권 하에 놓인 유럽 각지(프랑스에서 소련 서부까지,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노르웨이까지)에서 유태인들을 잡아온다.
(2) 가축수송용 등으로 쓰이던 열차에 닥치는 대로 실어서 아우슈비츠까지 끌고 온 다음 그 플랫폼에 내리게 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을 끌고 온 나치스의 경찰관들과 헤스의 부하들 사이에서 인계 절차가 이루어진다.
(3) 이른바 ‘최종 처리용 건물’로 끌려간다. 물론 이들 중 노동력으로 쓸만한 자들은 분류된 상태다. (드라마 <전쟁과 추억>에서 보면, 이 과정에서 여주인공인 나탈리는 노동력 쪽으로 분류되었지만, 그 삼촌이자 조연인 아론 할배는 ‘최종 처리용 건물’ 쪽으로 가게 됩니다.)
(4) 플랫폼에 남겨진 이들의 짐은 ‘캐나다’라고 불린 분류소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는 이른바 ‘라인하르트 작전’에 따라 유태인들의 옷, 신발, 침구류, 목걸이?반지?귀걸이?귀금속 등의 보석류, 시계, 안경, 현금, 심지어 시체에서 채취한 금이빨 및 여성의 머리카락 등이 분류되었다.
그런 다음 보석과 돈은 독일제국은행(Reichsbank)로 보내지거나 중립국인 스위스로 보내졌다고 한다. 또한 시계 등은 작센하우젠 수용소로 보내져 수리되었으며 SS대원들이나 육군 병사들에게 지급되었다. 침구류와 옷 그리고 구두 등은 - 폐품은 재생되고
- 멀쩡한 것의 경우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모든 것을 잃은 피난민들에게 제공되었다. 여자들의 머리카락은 밧줄이나 옷감 등의 원료로 사용되기 위해서 바바리아의 한 회사로 보내졌다.
이와 관련, 헤스는 분류소에서 노동하는 억류자들 및 경비나 관리 임무 등에 투입된 SS대원들이 여기서 오가던 보석류 때문에 “풍기 문란한 행동을 저지름으로서 아우슈비츠의 재앙이 되었다”고 했다.
심지어 어떤 여간수는 분류소에서 일하는 억류자들 중 하나에게 자신의 몸을 주는 대가로 보석류를 얻어낸 다음, 그것을 또한 SS대원인 ‘진짜 남친’의 숙소에 숨겼다가 들켜서 그녀 또한 억류자가 되기도 했다.
(5) 유태인들이 ‘최종 처리용 건물’ 근처에 이르게 되면 유태인 작업인부들(Sondergruppen)이 지도해주는 가운데, 그곳 지하에 있는 이른바 ‘이(蝨)를 잡는 방’, 즉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벗어야 했다.
그런 다음 ‘샤워실’로 들어간 뒤 그 방이 사람으로 꽉-꽉- 차이는 순간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특별히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치클론B가 담긴 통들이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이(蝨) 대신 사람이 죽는 것이다.
(6) 학살이 완료되었을 시점인 30분 후에 문이 열리고, 유태인 작업인부들에 의해 시체가 치워진다. 치워진 시체들은 작은 수레를 이용하여 구덩이로 이동되어 소각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연기에 담긴 ‘사람의 살이 타는 냄새’ 때문에 - 나치스 자체의 선전활동에도 불구하고 - “유태인들이 비밀리에 학살당하고 있는 듯 하다”는 소문이 퍼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밤에는 불꽃 때문에 대공포 부대가 “무쟈게 신경쓰인다”는 호소를 해오기도 했다.
이 결과 1942년 말에서 1943년 초의 겨울에 화장장들이 만들어지기 시작, 그 뒤 이곳에서 시체가 소각 처리되었다. 화장장들에는 다섯 개의 3단 소각로를 갖추어 24시간마다 약 2천구의 시체를 소각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학살된 유태인의 수는 - 일단 헤스의 ‘기억’으로는 113만 명이지만 - 실제로는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프랑스 학자인 조지 웰러의 1983년 자료에 의하면) 대략 144만 명(물론 가스실 외의 영양실조나 학대와 같은 다른 이유에 의한 죽음도 포함될 것이다)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나치스 독일군 점령자들에 항거하다 잡혀온 폴란드인이 14만 6천명이 죽었으며, 또한 하인리히 히믈러가 ‘인종학적인 이유’를 들어 잡아온 집시들 및 ‘집시의 피가 섞인 사람들’(이중에는 심지어 나치스와 유착관계에 있던 사업가, 최전방에서 공로를 세우고 포상휴가를 나온 국방군 병사,
그리고 나치스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던 여대생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조사 뒤 귀가조치’ 되었다고 하지만……)이 2만 3천명이 사망했다.
게다가 슬라브족 및 소련의 여러 소수민족 주민들을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 정도로 보았던, 특히 ‘공산당원’에 대해서는 더더욱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을 명령한 히틀러 때문에 수많은 소련군 포로들이 노동과 학대 그리고 굶주림 속에서 - 심지어 자신들끼리 죽여 인육을 먹어대기까지 하면서 - 죽어간 것 또한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다.
아돌프 아이히만
아돌프 오토 아이히만(Adolf Otto Eichmann, 1906년 3월 19일 ~ 1962년 5월 31일)
독일의 SS중령(최종계급)으로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즉, 유대인 박해의 실무 책임자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국제 전범으로 수배 중에 아르헨티나로 도피하여 이름을 바꾸고 15년 동안 살았다.
1960년 이스라엘 정보 기관 모사드에 체포돼 이스라엘에서 공개 재판 후에 1962년 5월 31일에 처형되었다. 재판 당시 그는 자신이 유대인을 박해한 것은 상부에서 지시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후에 예일대학교의 심리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부당한 명령이라도 해도 한번 받아들이면 무비판적으로 그 부당한 명령을 수행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를 얻었다.
당시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 문제로 이스라엘과 심각한 외교적 갈등을 빚었다. 엄연히, 모사드의 아이히만 납치는 국제법과 관례에 어긋나 아르헨티나 정부의 주권을 침해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돌프 아이히만. 금속테 안경을 쓰고 숱이 적은 친위대의 한 중령이었던 그는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돼서 나치 간부들로부터 유태인의 최종 처리-요컨데 대량 학살-라는 과제가 주어진다.
그는 계획서를 작성한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단기간에 얼마나 적은 비용을 들여서 유태인을 처리할 수 있느냐는 것뿐이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유럽지역에서 처리해야 할 유태인의 수는 전부 천백만이었다.
차량 몇 칸을 연결한 화차를 마련해서 한 화차에 몇 명의 유태인을 몰아넣으면 되는가, 그 가운데 몇 퍼센트가 수송중에 자연히 목숨을 잃게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인원으로 그 작업을 처리할 수 있을까,
시체는 어떻게 하면 가장 비용을 덜 들이고 처리할 수 있을까, 불에 태울 것인가, 땅에 묻을 것인가, 녹여 없앨 것인가,
그는 이런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서 부지런히 계산한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략 6백만 명(목표의 절반을 넘는 수준)의 유태인이 그가 계획한 방식으로 처리된다.
그러나 그는 죄악감을 느끼지 않는다.
텔아비브의 법정에서 방탄유리가 둘러쳐진 피고석에 앉아, 자기가 어째서 이런 거창한 재판에 회부되어 전 세계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는지, 아이히만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중에서
“악(惡)이 저렇게 평범하다니….”
아돌프 아이히만을 처음 본 한나 아렌트는 신음했다.
방탄유리에 둘러싸인 채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아이히만. 그는 국제적 관심을 모은 전범재판의 피고가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범속한 삶을 살아왔다.
학교 성적이 나빠 일찌감치 실업학교로 보내진 열등생. 실업자를 전전하다 엉겁결에 군에 입대했던 사회의 낙제생. 그는 나치 친위대 장교였으나 히틀러의 ‘나의 투쟁’조차 읽지 않았다.
법정에 증인으로 나선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예이엘 디무르는 그를 보고 혼절하고 말았다. 재판관이 물었다. “과거의 지옥 같은 악몽이 되살아났습니까.”
디무르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탄식했다.
“아이히만이 저렇게도 평범한 사람이라니. 저토록 평범한 인물이 그 많은 사람들을 가스실로 몰아넣었다니…. 나 자신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내 안에도 아이히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애제자이자 저명한 정치학자였던 아렌트. 미국 ‘뉴요커’ 잡지의 특파원을 자원해 재판을 추적했던 그녀는 자문한다.
티끌만큼의 죄책감도 없이 충실히 공무를 수행하고 아내를 사랑했으며 자식을 끔찍이 아꼈던 이 범속한 인간이 어떻게 ‘유대인 말살정책’을 기안하고 집행했는가.
그녀는 재판이 끝난 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발표해 지성계의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악이 우리의 일상 속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실제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나의 전 생애는 칸트의 실천이성에 따라 살아왔다”며 자신의 행위는 칸트의 인식, 즉 ‘범주적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고 강변했다.
재판은 1년반을 끌었고 1961년 12월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교수형에 처해지기 전 레드와인을 부탁해 반을 마셨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겼다.
“잠시 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이히만은 끝내 자신의 죄(罪)를 알지 못하였다.
- 패전 그리고 종말 -
하지만 종말은 다가오고 있었다.
헤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으로서의 업무에서 손을 떼고 SS경제행정본부, 즉 DI부(강제수용소 사찰부 정치부) 부장이 되었던 1943년 11월, 이미 유럽 내 동맹국인 이탈리아는 전쟁에서 탈락, 아시아-태평양의 동맹국 일본은 야금야금 패전, 그리고 독일 자체는 쿠르스크에서의 패전 이후 사실상 소련군에게 쫓기던 상황이 된 것이다.
연합군의 맹공
헤스 또한 연합군이 점령한 하늘에서 가해져오는 공격 때문에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기까지 했으며, 이는 그의 고백록에도 “V-1, V-2 미사일 그리고 제트전투기 같은 신무기들은 아무런 효과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식으로 털어놓았을 정도였다.
결국 나치스 독일군의 미-영 연합군에 대한 땅과 하늘에서의 최후의 공세가 끝난 직후인 1945년 1월에는 강제수용소의 철수계획을 조정하기 위해 헤스가 직접 각지를 시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히틀러의 자살 및 (스웨덴에 일단 몸을 숨기기로 작심한) 히믈러의 마지막 명령에 따라 덴마크 접경지역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으로 도주, 해군에 잠입하여 신분을 세탁한 뒤 농부가 되어 잠복하기에 이르렀다.
연합군의 승리
그러나 ‘전직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에 대한 연합군 수뇌부의 수색은 계속되었고……,
결국 1946년 3월 11일 밤 11시, 은신 중이던 농가에서 잠을 자던 중 영국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소환되었다가 폴란드 정부에 호송되어 폴란드 최고인민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은 뒤, 1947년 4월 16일 아우슈비츠에 세워진 교수대에서 목이 매달림으로서 삶을 마감했다.
죽기 전 헤스는 감옥 안에서 - 그를 조사하던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의 죄상에 대한 증거자료로서, 역사가들을 위해서는 사료史料로서,
그리고 그 자신을 위해서는 간방 안에서 이제 곧 다가올 죽음의 공포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에 따른 - 즉 그의 좌우명인 ‘노동은 자유를 준다’에서 벗어남으로서 생긴 - 지독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고백록>을 남겼다.
1946년 11월에 유태인들의 처리문제 및 히믈러와의 관계 정도를 기록한 내용은 이후 그가 죽기 전인 1947년 2월에는 하나의 두툼한 책으로 완성되었다.
2차세계대전의 시초 독일의 폴란드 침공
기록상의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은 폴란드 침공이나 사실 1차대전이 패전국이란 죄목으로 국제적으로 독일을 고립시킨 것 부터가 원인입니다. 또한 히틀러의 민족이념과 독일에 대한 자신의 사상등이 결합되어 결국 동부 진출을 선택한거죠.
그게 바로 폴란드 침공입니다. 폴란드 침공시에는 여러가지 위험이 따랐습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위험을 했을 뿐만 아니라 독,폴 불가침 조약을 무시합니다. 즉 모두에 대한 적대 의식을 나타냅니다. 간단히 말해 영국,프랑스 등 모든 나라가 독일을 공격해도 된다는 거죠.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전혀 참전 의사를 비추지 않습니다. 물론 선전포고야 했지만 실제로 이행되지는 않았습니다. 간단히 말해 독일은 폴란드먹고 만족해라 이런식이죠.
이제 폴란드 침공에 대해 적겠습니다.
1939년 8월31일 독일은 폴란드 침공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통조림 작전'을 사용합니다. 통조림 작전이란 독일군 죄수 13명을 폴란드군 복장으로 갈아 입혀 폴란드 국경 근처에서 사살합니다. 그리고 폴란드가 독일을 침공했다는 방송을 내보내며 이 사건을 핑계로 하여 9월1일 독일은 폴란드에 대한 전쟁을 선포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폴란드 침공에 대한 애로사항이 있는데 폴란드를 침공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가만있느냐 했는데 그 보다 더 큰 걸림돌이 폴란드를 자기네 앞마당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소련이 가만있을까가 더 큰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소련에게 폴란드땅 반을 준다는 조건하에 독소 불가침조약이 절묘하게 이뤄지며 우리가 잘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하기도 전에 끝낸다는 전격전의 형태로 전쟁이 이뤄집니다.
폴란드군 해안 방어 요새 포격을 시작으로 Ju-87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가 폴란드 본토를 강타하며 폴란드 구식 공군들은 이륙 한번 못해보고 다 폭파 당합니다. 슈투카 폭격기가 지나고 나니 오토바이 부대가 선도하는 전차부대가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기계화 보병대가 따르니 육공의 완벽한 전술로 폴란드 전선을 돌파합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전격전' 입니다.
그럼 폴란드는 계속 당하기만 하나? 폴란드는 반격작전을 개시합니다. 폴란드의 반격은 바로 중세시대에나 볼 법한 창기병대 였습니다. 특히 폴란드가 자랑하는 포모르스케 백마부대는 한 때 유럽전토를 석권했으나 현대전 이라는 개념이 없어 폴란드 군의 말들은 독일의 전차에 무참히 밟히죠. 현재에서 보면 이해가 안가며 웃음거리 밖에 안됩니다.
하지만 폴란드가 왜 자신만만하게 기병대를 보냈냐면 바로 베르사유 조약때문입니다. 1차대전의 패배로 독일은 전차를 장비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캔버스를 씌워 만든 종이 전차로 훈련했으며 폴란드는 정보가 짧아 독일군의 전차가 거의 캔버스 전차로 잘못 생각하여 결과적으로 기병만 전멸한 꼴이 되죠. 하지만 독일군 전차를 정말 강철로 만들어진 전차였습니다. 물론 수량은 적었겠지만요.
그리하여 승자와 패자로 나뉘어 집니다. 폴란드는 왜 그리 미약했나?
폴란드도 170만이라는 군사를 가진 군사강국인데 말이죠. 바로 1920년대의 장비와 전술개념이 기계화로 무장된 독일군의 폭격-전차포격-보병 포위섬멸 방식의 전격전이라는 신개념에 너무나 덜 떨어졌단 겁니다.
폴란드는 개전 4일째인 9월4일 수도를 버리고 루마니아를 망명하며 9월 17일 소련까지 폴란드를 동쪽을 먹어치우니 9월27일 폴란드는 항복합니다.
10월 5일 모든 전투는 끝이나고 폴란드의 부그강을 국경으로 독일과 소련의 새로운 구경이 만들어지죠. 소련은 독일과는 다르게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폴란드 동쪽을 먹었으니 히틀러는 소련을 가르켜 '식탁에 앉았으면 부엌일을 거들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조차 지키지 않는 날도둑놈들' 분통을 터뜨리죠.
그 후 히틀러는 폴란드 서쪽을 가지고 유태인학살이라 불리는 유태인 청소를 합니다. 패전한 폴란드 용사들은 영국으로 망명하여 자유 폴란드 군단으로 독일과 항전합니다.
이스라엘 지도. 유태인의 보금자리
이스라엘이 독립되면서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밸푸어선언에 따라 많은 유태인들이 귀향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
이스라엘인(헤브라이인)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 땅(팔레스타인, 오늘날 이스라엘의 땅)에 들어온 것은 약 4,000년 전으로, 이곳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에 종사하고 야훼(여호와)의 신앙을 확립하였다.
이들의 역사는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집트왕 메르엔프타하가 자신의 전적을 기념하면서 세운 전승비문(戰勝碑文:BC 13세기 후반)에 자신에게 정복된 민족의 하나인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명을 기록하여 두어 역사상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이스라엘민족은 이주민이었기 때문에 주위의 토착 종족에게 압박당하여 일부 부족은 이집트로 이주하였고, 그들은 이집트의 생활에 견딜 수 없어 모세의 인도로 팔레스티나로 탈출하였다. 메르엔프타하가 이스라엘을 격파한 시기가 바로 이 때 쯤으로 추측된다.
BC 11세기 사울은 이집트의 지배가 쇠약하여진 틈을 이용, 가나안 땅의 선주민 펠리시테인(필리시티아인)과 싸워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사울의 뒤를 이어 다윗은 예루살렘을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이 곳에 왕궁과 야훼의 성전을 세웠다. 그 뒤부터 다윗 왕가와 야훼의 성전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민족적 자각의 중심이 되었다.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 왕국은 전성시대를 이룩하였으나 솔로몬왕이 죽은 뒤 왕국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한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대(유데아) 왕국으로 나누어졌다.
이스라엘 왕국은 BC 722년에 아시리아왕 사르곤 2세에게 멸망당하였고, 유대 왕국도 BC 586년 신(新)바빌로니아왕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수도 예루살렘을 점령당하고 멸망하였다. 유대인은 사로잡혀 유명한 바빌론 포로생활에 들어갔다.
BC 538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 때 유대인들은 해방되어 귀국,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유대교를 성립시켰으나 BC 4세기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군대의 통치 하에 들어갔으며, BC 1세기에는 로마의 속주(屬州)로 편입되었다.
로마 지배 하에서 반독립정권을 형성하고 로마 제국에 저항하였으나 티투스 황제 때 탄압당하여 세계 각지로 흩어져 수세기 동안 표류하며 박해받는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에 들어서 세계 각지의 내셔널리즘이 발흥하는 가운데 동유럽 및 러시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민족 억압이 드세졌다. 이에 유대인들 사이에 시오니즘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자신들의 조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약속받은 성지(聖地)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조국을 세워야만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끝난다고 믿는 시오니즘은 1887년 오스트리아의 테오도르헤르첼이 스위스 바젤에서 시오니스트 대회를 개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운동화되었다.
그러나 지지부진하여 1882년 팔레스타인으로의 최초의 유대인 이민이 시작된 지 35년 뒤인 1917년까지 이주민은 겨우 3만 2000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영국은 당시 중동에서의 영국군 작전기지 역할을 맡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을 아랍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전세계 유대인을 현혹시키는 ‘밸푸어 선언’을 발표하고, 전후(戰後)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조국 건설 허락을 약속하였다.
전후에도 동(東)유럽 여러 국가에서 유대인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고 1930년대에는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즘이 등장하여 유대인에 대한 대학살이 이루어지자 시오니즘 운동은 급속히 발전하였다.
팔레스타인은 1918년 영국의 군정 하에, 1920년에는 영국의 위임통치 하에 있었으나, 팔레스타인에의 유대인 이민은 격증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7만 정도였던 유대인 인구는 이주민의 유입으로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약 40만으로 늘어났다.
유대인 이민의 증대는 아랍인과의 대립·항쟁을 가져왔다. 소수파로의 전락과 토지상실을 두려워한 아랍인은 19년부터 종종 반(反)영국·반(反)유대 폭동을 일으켰고, 193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1939년까지는 전국적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두 민족의 대립은 한때 가라앉기도 하였으나 대전 말기에는 다시 격화되어, 이번에는 유대인 쪽이 독립을 억제하려는 영국에 반발하여 반영(反英)·반아랍 투쟁을 하게 되었다. 전후에 대립은 한층 격화되었다.
영국은 두 민족의 대립을 진압하고 전략적 요충지인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위임통치 방기(放棄)를 결의, 1947년 문제를 UN에 이관하였다.
UN 총회는 1947년 11월 아랍·유대의 연방화안(案)과 아랍·유대의 개별국가 건설과 함께 예루살렘을 국제관리하에 두도록 하는 분할안(案)의 두 안을 상정, 후자가 2/3 이상의 다수로 채택되었다.
팔레스타인을 대소(對蘇) 전략의 일환으로 삼으려는 미국이 시오니즘에 반대하면서도 유대, 아랍 양 민족의 민족자결을 승인하는 구소련과 함께 분할안에 찬성하였다. 분할안은 유대인 쪽은 찬성하였으나 아랍 쪽은 반대하여 팔레스타인 각지에서 아랍의 게릴라전이 격화되었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고 영국군의 철수완료와 함께 유대 국가건국위원회 의장 벤 구리온이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였다.
동시에 아랍연맹에 가입한 아랍 제국의 정규군이 팔레스타인에 침입하여 제1차 중동전쟁(아랍이스라엘분쟁, 팔레스타인전쟁)이 개시되었다.
이스라엘은 개전시(開戰時)에는 열세였으나 마침내 아랍을 압박하여 1949년 정전(停戰)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아랍 대 이스라엘의 대립은 계속되어 1956년 10월 제2차 중동전쟁(아랍이스라엘분쟁, 수에즈 전쟁),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아랍이스라엘분쟁, 6일전쟁),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아랍이스라엘분쟁, 10월전쟁) 등 모두 4차례에 걸친 전쟁을 하였다.
그동안 정치적으로는 1949년 1차 총선 이래 28년간 노동당연합(마파이당, 시온 노동자당, 노동자 리스트의 3당 연합)이 집권해 왔으나 1977년 5월 9차 총선에서 보수우익의 리쿠드당이 집권하였다. 1983년 7월 총선에서는 노동당연합이 승리했으나 과반수 의석을 얻지 못해 리쿠드당과 타협하여 연립정부를 구성하였다.
윤번제 집권 합의에 따라 노동당의 S.페레스가 먼저 총리가 되고, 1986년에는 리쿠드당의 I.샤미르가 총리가 되었다. 1990년 3월 대(對) 아랍 정책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양당의 협조가 깨어지자 6월 총리 샤미르는 극우성향의 내각을 구성하고 대아랍 강경책을 펼쳤다.
그러나 강경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1992년 6월 총선에서 라빈이 이끄는 노동당연합이 리쿠드당을 누르고 압승하였다.
이로써 대 아랍 정책이 유화적 방향으로 선회한 가운데 1993년 9월 이스라엘은 아라파트 의장이 이끄는 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겠다고 발표했으며, 1994년 5월 4일 미국의 중재로 총리 라빈과 PLO 의장 아라파트 사이에 벌어진 평화회담을 통하여 가자(Gaza) 지구와 요르단 예리코시(市)에 대한 자치협정 체결에 성공하였다.
1999년 7월 노동당의 예후드 바라크 정권이 출범하여 중동평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2000년 7월 미국 대통령 클린턴이 중재한 캠프데이비드 협상이 결렬되고 이스라엘 내의 반발세력이 커지면서 바라크는 사임하였다.
2001년 2월 실시된 총리 선거에서 우파인 리쿠드당의 샤론이 당선되어 전임 바라크의 잔여임기인 2003년 11월까지 총리직을 맡게 되었다. 이후 샤론은 거국내각 구성과정에서 제기된 문제점(우파 소외세력 및 좌파 비판세력)과 팔레스타인 사태 격화에 따른 좌·우파간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샤론이 성전산을 방문한 이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태가 격화되었고, 2001년 10월에 이스라엘 관광장관이 암살되면서 팔레스타인의 자살 테러 공격과 이스라엘의 보복군사 조치라는 폭력의 악순환이 나타났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완전자치구 침공, 가자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정부건물 공습, 레바논의 남부 헤즈볼라지역 공습으로 이어졌다.
피아니스트
[Holocaust]
1【유대교】 번제(燔祭) 《짐승을 통째로 구워 신(神)에게 바치는 유대 제사》
2 전시 소각(全市燒却), 대학살, 몰살, 전멸, 대파괴;[the Holocaust] (나치스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 [Holocaust]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대학살하는 행위를 총칭하지만, 고유명사로 쓸 때는 제2차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한다.
특히 1945년 1월 27일 폴란드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포로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인종청소라는 명목 아래 나치스에 의해 학살되었는데, 인간의 폭력성, 잔인성, 배타성, 광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20세기 인류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보스니아 내전이나 르완다의 종족분쟁, 킬링필드로 불리는 캄보디아 내전 등 세계 곳곳에서 대량 학살이 자행됨으로써 홀로코스트 문제가 여전히 국제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20세기 최대의 대학살로 꼽히는 만큼 이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영화·소설·다큐멘터리 등도 많이 등장했는데, 그 중에서도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을 다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광기에 희생당한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려내 아카데미상 7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또 홀로코스트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Karl Adolf Eichmann)을 찾기 위해 16년에 걸친 추적 끝에 법정에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크라임 스토리》를 비롯해 홀로코스트 희생 유대인 휴면계좌 공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 행사 등 홀로코스트에 관한 뉴스는 20세기가 지난 시점에도 인종·민족·국가·종교를 초월해 인권 회복 차원에서 여전히 주목받고 있다.
두산백과사전
홀로코스트 기념관!
히틀러 벙커가 있던 곳에 조성된 이 곳은
관 모양의 수많은 콘크리트 박스로 뒤덮여있고,
지하에는 수용되었던 사람들의
처절한 편지와 사연들이 채워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