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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앨범

27.어머님전상서





어머님께서 좋아하셨던 해방전후 시대

우리나라 최고인기 가수 이화자

이세상 나를 제일 사랑하셨던 어머님의 제32주기 제일을 맞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어머님이 좋아하셨던 이 노래를 올린다

해방전 홍영선 형님께서 사오신 레코드판을 우리집 바깥마당에서유성기를 틀면

이화자의 어머님전상서화류춘몽 이 노래를 온마을의 할머니 아주머니들께서 들으시면서 모두들 눈시울을 적시던 모습과 어린내가 유성기 태엽을 신나게 돌리던 생각이 아련하다.



이화자 [李花子]

1917∼1949. 민요가수. 인천 출생. 가요작곡가 김용환(金龍煥)에게 발굴되어 1936년 폴리도르레코드사에서 신민요풍의 노래 〈초립동 草笠童〉과 〈에헤라 노아라〉 두 곡을 녹음하였다.

당시 인기 절정이던 민요가수 왕수복(王壽福)·선우 일선(鮮于一扇)을 능가하는 민요가수로 주목을 끌었다.

계속해서 〈왜그렁타령〉·〈남원의 봄빛〉·〈아무랑에 고소해〉·〈참말 딱해요〉·〈천리몽 千里夢〉 등을 음반으로 출반하여 그의 인기가 날로 높아갔다.

1938년 오케레코드사에서 거액을 내놓아 전속시키고, 박시춘(朴是春) 작곡인 〈어머님전상서〉·〈목단강편지〉 등이 새로 나와 크게 인기를 얻었다. 그 뒤 김용환 작곡의 〈꼴망태 목동〉·〈님전화풀이〉또한 인기곡이 되었다.

오케레코드사에서 1940년까지 수많은 민요풍의 노래를 녹음하였으며, 대개가 박시춘·김용환의 작품들로 〈화류춘몽〉·〈물방아〉·〈허송세월〉·〈초가삼간〉·〈삽살개타령〉·〈신 오돌독〉·〈신 노들강변〉·〈겁장이 촌처녀〉·〈노래가락 범벅타령〉 등이었다.

1941년부터는 오케레코드사 전속단체인 조선악극단 소속으로 무대공연의 인기가수로서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광복 이후 지방순회공연단체의 일원으로 객지생활을 하였고, 일가친척이 없이 쓸쓸히 지냈다.

≪참고문헌≫ 歌謠 60年史(黃文平, 全曲社, 1983)

[출처 : 엠파스 백과사전 카테고리]





'까막눈' 소녀, 유행처럼 편지대필

그 당시에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귀했다. 특히 여자들은 학교를 안 보냈던 시절이다. 여자가 많이 배워서 무엇에 쓰느냐는 고정관념에서다.

다시 말한다면 여자는 시집만 잘 가면 되지 공부는 해서 어디에 쓰느냐는 고정관념에서 아들은 학교에 보내도 딸자식은 학교를 안 보내던 시절이었다.

이러다보니 소녀들은 한글을 몰라 편지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당시에는 한글을 아는 사람은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부터 대신 편지를 써 달라는 주문을 받게 된다.

이렇게 해서 고향에 부모님께 편지를 써서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당시에는 편지를 쓰는 공식문장이 있었다. 공식문장이 쓰여져 있는 편지쓰기란 제목의 책자가 문방구에서 판매를 했다.

그 책 속에 들어있는 문장을 하나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어머님전상서라는 문장도 그 책에 실려있는 문장이며 기체후일향만강하옵나이까도 그 책 속에 실린 문장이다.

이렇듯 한자로까지 유식한 문장을 서민들은 잘 이용하여 편지를 쓰는 데 사용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글을 못 배운 사람들은 편지도 못 쓰다 보니 배운사람에게 편지를써 줄 것을 부탁을 하여 부모님께 편지를 보낸다.

이렇게 해서 일단은 부모님께 본인의 안부도 전하고 또한 부모님께도 안녕하심을 묻고 이 자식의 걱정은 하지 말라는 부탁도 드린다.

그러나 자기가 편지를 쓸 줄을 모르다 보니 남의 손으로 쓴 대필은 항상 미흡함을 느낀다. 그래서 정작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하지 못하여 안타까울 때도 많다. 그러나 자기가 글을 못 배웠으니 그 답답함은 글로서도 다 쓸 수가 없다.

그 원인은 가난해서도 있지만 아들을 선호하며 딸자식에 대해서는 고정관념적으로 무시하던 시대다 보니 같은 자식으로서 태어났어도 자식으로 대접받는 데는 인색했던 시대였다 할까,

아무튼 아들은 가르쳐도 딸자식은 배워서 무엇하느냐고 하면서 시집가서 자식 잘 낳고 잘 살면 된다는 그 시대였다.

그러나 정작 아들들은 공부를 많이 했어도 취직을 못하고 건달생활을 하는 가정에도 도움이 안되는 실업자 생활을 하며

술이나 먹고 술주정을 하여 동네사람으로 하여금 손가락질을 받으며 욕을 먹는가 하면 자기 부모님에게 누를 끼치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젊은이들도 많았다.

물론 그들도 철학은 있었다. 그 원인은 일제로부터 억압된 세상을 살자하니 그럴 수 밖에 별 도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한 잔 술에 한을 풀고 두 잔 술에 울어보는 그들이였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살기가 너무 안타까워 술로서 마음을 달래며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한 시대에 딸들은 일제가 운영하는 각종 공장에 취업을 하여 다소 얼마라도 벌어서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돈을 보내는 착한 딸들이 많았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술로서 세상을 한탄하며 술로서 세상을 사는 아들보다는 공부를 안 가르치고 푸대접을 했던 그 딸자식이 부모님께 효도함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닌지. 그나마 이러한 사람들은 복받은 소녀들이다.

이와는 반대로 일제에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대의 위안부로 꽃다운 젊음을 모질게도 짓밟힌 소녀들은 어떠했는지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들이다.






그들은 우리 조선의 소녀들을 강제로 끌고가서 인간으로서는 차마 입에 담아 말하기도 안타까운 만행을 서슴없이 자행했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당시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옴을 또 한번 느낀다


이러한 만행을 인간으로서 정말 해도 되는 건지 그들에게 묻고싶다. 어떻게 같은 인간으로서 그 잔인한 행동을 했는지어찌 같은 인간이면서 인간을 처참하게 짓밟고 잔인한 학살을 할 수 있었는지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몸서리가 쳐진다.

이렇게 우리 조선민족을 짓밟고 잔인하게 학살을 하고도 지금도 뉘우침은 커녕 독도가 그들의 땅이라고 생떼를 쓰니 이것이 그들의 올바른 양심인지 아니면 우리영토를 과거와 같이 통채로 빼앗자는 것인지 일본인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 민족은 과거를 잊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민족은 과거에 당했던 맺힌 한을 지금껏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음을 말이다. 어머님 전상서라는 노래도 일제의 만행 때문에 탄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이 어린 소녀들을 강제로 끌어다 그들의 장병들에게 위안부로 어린 소녀들을 짓밟아 놓고 또는 군수품을 만드는 공장으로 강제로 끌어다가 일을 시켜먹고

노임도 제대로 주지않는 등 노동임금마저 착취하며 자유를 구속하고 공장밖에도 나갈 수 없는 감옥 아닌 감옥살이를 시키며 인권을 유린하는 그들의 만행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또 어떻게 그들을 이해해야 되는가.

우리는 이들을 다시 한번 깊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나 싶다. 이렇게 어린 소녀들이 부모 밑에서 재롱을 부리며 가족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아름답게 성장해야 할 꽃 봉리같은 아름다운 소녀들을 끌어다가 이처럼 한 행위는 천벌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이 어린소녀들은 부모가 그리웁고 그리워도 집에조차 갈 수 없는 처지다보니 밤마다 부모님이 그리워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애타도록 안타까운 밤을 지새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출처

[김명환 한국가요작가협회 작사·작곡가 2007.05.0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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