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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탐방

서장대


2006.5.1일 한 노숙자의 어이없는 방화로 불타 버렸던 화성 서장대가 복원 공사를 통해 2007.04. 06일에다시 팔달산 정상에 늠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2008.3.27 오후에 역사탐방차 팔달산 서장대를 다녀왔다. 서장대는 마루 부분이 예전보다 조금 축소된 상태로 복원된 모습이다.

평일 쌀쌀한 봄바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서장대를 찾아 감회어린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수원시에서는 다시는 불미스러운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cctv를 설치하고 서장대 바로앞에 매표소를 설치하고 주의를 기울리는것같았다.





일제시대에 일부가 파손되어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오던 정조대왕의 친필 편액 '

]화성장대'를 원형대로 복원하여 다시 걸어놓았다고 한다.



말끔한 모습으로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서장대








동영상 서장대 준공식






근 일년 만에 옛 모습을 되찾은 서장대옆에 있는 서노대






]








서장대에서 바라본 수원시내


조선 정조

조선의 제22대 국왕
정조(正祖, 1752년 ~ 1800년)는 조선의 제 22대 임금이다.(재위 1776년 ~ 1800년)
휘는 산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묘호는 정조(正祖), 시호와 존호는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렬성인장효대왕(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대한제국 때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 추존되었다.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8살에 왕세손에 임명되었다.
1762년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소론을 지지하여, 노론을 지지하는 영조에게 비극적인 죽임을 당하자, 11살에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되었다.

1775년에는 손자의 권력 기반을 마련해 주려는 할아버지 영조의 배려로 그를 대신해서 정책을 결정하는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776년에 영조가 승하하자 25살의 나이로 조선의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수를 꾀하는 한편, 능력과 학식 있는 인물을 위조로 대거 등용하여 노론을 견제할 수 있는 친위 세력을 키워나갔다.


특히 왕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경호해 온 홍국영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여 궁궐을 호위하게 하였다.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등에 업고 이른바 세도정치를 하였는데, 홍국영이 지나치게 정권을 쥐고 흔들자 정조는 그에게 물러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홍국영은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고향으로 추방되었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아버지의 원수이자 여당인 노론을 극도로 혐오하게 되어서, 봉건적 특권을 약화시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을 높여 왕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정치와 경제 등에 대한 개혁을 진행시켰다.

정조는 영조가 평생의 과제로 생각해 왔던 영조 이래의 기본 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여 당쟁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12년에 이르는 동안 외척 세력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 특히 노론 세력을 제거하거나 약화시켜 친정 체제를 구축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규장각 제도를 정비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정예 문신들로 친위 세력을 형성시켜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성지화(作成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문화 정치를 표방하는 동시에 붕당의 비대화를 방지하고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그는 또한 영조 때부터 시작된 문물 제도의 보완 및 정비 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인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정조는 우수한 인재를 뽑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매월 2차례씩 시험을 치루었으며 상과 벌을 직접 내리기도 했는데, 소외받던 영남계 인사들도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는 중인 이하 평민에게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조 시대는 양반은 물론, 중인, 서얼, 평민층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져 문화를 크게 꽃피웠던 시대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매우 그리워하여 아버지의 묘소인 현륭원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고 정기적으로 참배하였다. 또한, 현륭원 주변인 수원에 과학적인 성채인 화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는 행궁을 만들었다.

정조는 암행어사를 자주 파견하여 지방 사회의 문제점을 직접 파악하고 해결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써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하고 백성들에 대한 정부의 통치력이 강화되었다.

또한 왕실 직속 친위대인 장용영을 신설하여 각 군영의 독립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군사권을 장악함으로써 임금의 최고 통수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장용영 설치는 군대를 장악한 노론을 견제하려는 정책이었다.

1791년에는 신해통공을 실시해 상인들의 상업 활동의 자유를 크게 넓히고, 수령 등의 가혹한 형벌을 제한하였다.

그리고 당시 사회 문제로 대두된 천주교에 대해서는 정학(正學), 즉 성리학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하지만 정조 사망 이후 정치적으로 정조와 대립하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조선 천주교회는 대부분 천주교 신도인 남인들이 제거된 신유박해(1801년), 오가작통법 실시 등의 조직적 탄압이라는 수난의 길을 걷게 된다.

또한 정조 때인 1797년 영국 군함 프로비던스 호가 부산 용당포에 표착하여 동래 부사와 교섭하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그 또한 어렵게 노론의 공세라는 역경을 헤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1800년 6월 49살의 나이에 병이 악화되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그가 추진해 온 개혁은 대부분 무산되고 말았다.


그 뒤 조선에는 외척 가문이 주도하는 세도 정치가 전개된다. 능은 건릉(健陵)으로 아버지 장조가 묻혀 있는 융릉의 옆이다.

처음에 받은 묘호는 정종(正宗)이었으나, 대한제국 때인 189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고 난 후에, 정종에서 정조로 묘호가 바뀌었다.

한편, 정조의 죽음에는 독살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사료는 아직 없다.


가족 관계
아버지: 장조(莊祖, 1735년 ~ 1762년, 장헌세자)
어머니: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혜경궁) 홍씨


비(妃):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 김씨: 김시묵(金時默)의 딸, 자식 없음.


후궁: 의빈 성씨(宜嬪 成氏)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일찍 죽음)
후궁: 수빈 박씨(綏嬪 朴氏, 박준원의 딸):


아들: 순조(純祖, 1790년 ~ 1834년)
딸: 숙선옹주(1787년 ~ ?, 풍산 홍씨 홍현주(洪顯周)와 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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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필 파초도

보물 제743호



정조대왕필 국화도

보물제744호


정조 독살설,

49세의 나이로 급사한 정조는 과연 독살당한 것일까? 정조가 죽은 뒤 세도정치 시대로 접어들면서 조선의 국운은 갑자기 쇠락한다. 이 때문에 정조의 죽음을 보는 시각은 죽음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정조가 독살 당했다는 의혹은 정조가 온몸에 번진 악성 종양으로 사망하기 직전 연훈방(烟熏方)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연훈방은 수은을 태운 연기로 치료하는 방법인데 10여 차례 이 치료를 받은 정조가 수은에 중독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치료 방법은 당시에도 커다란 물의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의혹을 가중시킨 것은 연훈방을 건의한 의사인 심인이 당시 벽파의 지도자인 심환지의 먼 친척이었다는 점이다.

(심환지는 정조의 탕평책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 한데다가 정조 사후 정조가 이루어 놓은 사업을 철저하게 파괴한 인물이다).

이 연훈방이라는 치료는 최근 어느 한의대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수은중독을 일으킬 가능성은 있지만 당시 약재의 처방대로라면 독살로까지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정조의 죽음을 두고 독살설이라고 말하는 것은 당대에 정조의 신임 하에 새로이 부상하는 남인계열의 입장이라고 파악되기도 한다.

정조의 인사 정책에 따르면 한 나라의 재상감은 8년의 시련 뒤에 8년을 믿고 쓴다 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당시가 남인 세력이 새로이 부상할 시기이고 이것에 위협을 느낀 노론의 강경파인 벽파측에서 미리 손을 쓰지 않았나 하는 시각이다.

정조의 독살설에 대한 또 다른 근거는 정조가 가끔 거론한 '비상조치설'이다. 반대파의 격렬한 반대로 정국이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지면 정조는 비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한다.

이 비상조치설에 대해서는 수도를 화성으로 옮기겠다는 화성천도설과 정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은퇴한 뒤 수원에 머물면서 순조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사업을 추진시키겠다는 상왕설 중의 하나라고 분석되고 있다.


화성천도설 화성천도설에 대해 특별히 기록하고 있는 자료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정조가 탕평책을 추진하면서 부딪히는 기존 세력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과감한 사회 개혁으로서 화성천도를 생각했다는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정조가 화성천도를 하려 했다고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첫째, '장용영'이라는 정조대의 강력한 친위 군대를 화성에 주둔시킨 것.
둘째, 화성의 남문과 북문을 각각 장안문(長安門)과 팔달문(八達門)이라고 이름 붙인 것. '장안'은 중국 한나라 이래 번화한 수도의 대명사로 쓰였고, '팔달' 역시 사방으로 통하는 중심지를 의미하여 수도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기존의 거상, 부호들을 화성으로 끌어들여 화성을 신흥 상업 도시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 경제의 중심 세력이 화성으로 옮겨 오게 되면 기존의 노론 세력의 경제적 바탕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원성이 한성에 비해 크기가 턱없이 작고, 경제적 지원의 규모도 서울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그다지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점 등을 생각해보면 정조는 화성을 장기적인 정책의 거점 정도로로 생각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상왕설 혜경궁이 쓴 {한중록} 등의 기록에는, 정조는 혜경궁에게 "내가 하지 못할 일을 아들의 효도로 이루고 돌아가 지하에서 (아버님을) 뵈오면 한이 풀리겠다"라고 말하였다 한다.

여기서 정조의 사업이란 사도세자와 혜경궁을 정식 왕과 왕비로 추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정조는 영조로부터 자신의 처분에 관한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사도세자를 왕으로 천양하고 추존하는 사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아들인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은퇴하여 자신이 못다한 일을 순조를 통해 이룩해보려 했을 것이다라고 지적하는 것이 상왕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왕설은 몇 가지 자료로 보아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그 당시 정조가 과연 상왕으로 은퇴한 뒤에도 순조를 통해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가에 대한 점이다.
권력의 속성 상, 그리고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남인과 노론과의 세력 다툼)를 생각했을 때 상왕으로 한번 은퇴하면 그의 권력이란 그리 큰 힘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음, 상왕설의 주 내용은 사도세자의 추존 문제이다. 그러나 정조가 사사로운 문제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을 포기하면서까지 그 문제를 추진하였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이같은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정조로서 상왕설을 생각하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였을 것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정조 독살설이 부정된다. 정조가 상왕으로 은퇴할 생각이였다면 당시 위협을 받고 있는 세력들이 구태여 독살하면서까지 정조를 퇴진시키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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