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앨범

형님을 그리워하며

만정도화(滿庭桃花) 2007. 7. 24. 11:49


적적해 하시는 형님을 모시고

청와대 모시고 갔을때 사진

노인정 친구분들한테 청와대 다녀왔다고

그렇게 자랑하셨는데..

즐거워 하시던 형님모습을 회상하니 눈물납니다. 그립습니다.



우리 삼남매가 나란히 서서 찍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형님께서는 건강하셨지요!


하늘나라에 가신 형님께 보고드립니다

1.형님을 보내드리며


1951년 전쟁중에 이 아우가 중학교 입학을 했었지요. 양식이 없어 죽으로 연명하던 시절이였지만 형님 자신이 못배운 것이 한이 되신다며 어머니와 함께 이 아우는 가르켜야 된다며 중학교를 보내주셨습니다.


나는 중학생이였지만 신발이 없어 어머니의 여자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니다가 훈육선생님한테 학교망신시키는 놈이라고 야단맞은 사실을 아신후 어머니와 의논해서 쌀을 팔아서 내 운동화를 사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1955년 고등학교 2학년 제2학기 시험볼 때 학교에서 등록금을 안낸 학생은 시험을 보게 할수없다하여 학교에서 집으로 쫒겨 왔었지요.


이때도 역시 어머니와 의논하신후 충선이 시험은 꼭 보게해줘야 된다며 강사간 두마지기 논의 덜 영근 벼를 베다가 살짝 쪄서 말려 쌀을 만들어 이 동생의 등록금을 마련해 주시였습니다.

나는 젖은 볒단을 무겁게 지고 걸어가던 형님의 뒤를 따라가며 형님의 고마움을 그때 가슴속 깊이 간직하게 되였습니다.


나는 이때부터 훗날 내가 돈을 벌면 형님을 위한 일이라면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할것이라고 다짐한 계기가 되었답니다.

이어서 형님께서는 동생 범선이와 조카 승열이도 가르켜 주셨고 계속해서 형님의 1남2녀를 공부시키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형님만큼 장한 형님은 안계십니다. 형님이 아니셨다면 오늘날의 이 아우는 없습니다. 형님과 나는 한평생 살아오면서 언제나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의좋은 형제였습니다. 형님 눈물납니다.

형님 팔순기념!

형님께서 효병원에서 요양하고 계셨을 때 기력이 없으셔서 말씀도 제대로 못하시면서도 이 아우 내외가 가니까무조건 침대에서 내려와 휠체어에 몸을 실으시며 나보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집에가″하시면서 집으로 가기를 이 아우에게 눈빛으로 애원 하셨습니다.


그때 형님의 그 모습이 너무 안스러웠습니다. 우리내외는 그날밤 혹시 형님이 돌아가실까봐 걱정이 돼서 잠을 못이루었습니다.

그 이튿날 월요일에 승일이와 석화어멈이 집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집으로 오신후 부터는 바로 병세가 기적같이 호전되여 옛이야기를 하실 정도로 좋아지셨고 식사도 식탁에서 하실정도로 회복되셨지요!


그리고 형님이 어느날 우리내외 승열내외가 있었을 때 형님이 석화와 수빈이 불러달라고 하셔서 석화와 수빈이가 오자 일만원씩 주셨고 아우인 저에게는 4만원을 주시면서 〃아우. 이거 받아. 내가 아우한테 처음으로 주는거야〃 하시면서 주셨지요.


그리고 집사람과 승열 세화어멈에게는 2만원씩 주셨습니다. 돈봉투에 돈이 전부 그것뿐이라 더 줄수도 없으셨죠. 아마도 마지막으로 베풀고 싶은 형님의 마음이셨던 것 같습니다.


설날 선산에서 성묘한후에

찍어드린 사진


형님이 운명하시기 3일전에 우리내외가 삼계탕을 준비해 간 것을 맛있게 식사하시고는 나에게 형님이 젊으셨을 때 〃아우도 알고 있잖아〃 하시면서 씨름판에서 힘 자랑하던 일과 누구와 싸움하면 한방에 날려보냈던 일들을 한창동안 나에게 들려주셨습니다.



이날 우리내외가 인사하고 올려니까 형님이 나보고 〃벌써 갈꺼야〃 하시면서 아우가 가는 것을 못내 아쉬워 하는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인사하셨습니다.


형님이 손 흔드시던 그 모습이 마지막 모습일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럴줄 알았다면 형님과 더 한참 이야기를 하고 올걸 못내 아쉬웠습니다.

형님이 집에 오셔서 기력을 회복하신 것은 아마도 형님께서 마지막으로 자손들한테 효도를 할 기회를 주실려고 한 것 같습니다.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 그리고 딸 사위 외손주들 한테 말입니다.


우리내외와 승열이 내외는 자주 들렸지만 영숙이와 선영이 승길이도 이때 문병을 와서 형님과 대화를 하고 갔으니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대화의 시간을 주신것같습니다.

형님의 옛이야기를 듣고 집에 오면서 형님이 바로 돌아가시지 않을꺼라고 우리내외는 확신하며 왔습니다. 그래서 그 이튿날은 집사람이 눈병이 나서 형님뵈러 못가고 3일째 되던날 뵈러 갈려고 한거예요.


뵈러가기로 하고 점심으로 형님이 좋아하시던 냉콩국을 만들어 드릴려고 아침부터 집사람이 냉콩국을 준비하고 있었지요.


아침 10시04분! 냉콩국을 한창 만들고 있을 때 석화어멈이 아버님께서 위독하시다며 작은아버지 빨리 오시라고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받고 우리내외는 냉콩국이고 뭐고 그냥 놔두고 서둘러 형님댁을 향해 가고 있던중 차안에서 승일이로부터 아버지가 지금 운명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형님 장례치른후 집사람이 쉬여버린 냉콩국물을 버리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전화를 받고 속도를 내며 달리는 차안에서 〃형님! 뭐가 그리 급하셔서 사랑하는 이 아우를 안 보시고 그렇게 빨리 가셧나요!〃 하면서 통곡하며 갔습니다. 결국 임종은 석화어멈 며느리만 했습니다.


도착해서 형님의 손을 잡으니 아주 따듯했습니다. 한참동안 형님손을 붙잡으며 차차로 형님 손이 식어지는것을 느꼇습니다. 아마도 아우가 도착해 손을 잡을때까지는 온기를 느끼게 하실려고 했던 것 같았습니다.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으셨습니다.


생일달에 돌아가시면 자기명 다하고 돌아가신거라는 말을 옛날 어른들로부터 들었습니다. 형님이 돌아가신날이 음력으로 6월7일이니 형님생신 6월 16일을 9일 남겨놓고 돌아가셨으니 옛말대로 형님은 천수를 다하시고 돌아가신건가요.




형수님 돌아가시고 1년후

적적해 하시는 형님을 모시고

중국계림에 갔을때


형님! 이 글을 쓰고 있자니 형님생각에 눈물이 흐릅니다. 그런데 지금 막 채원 어멈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아버님 지금 뭐하시느냐고요.


〃아버님 너무 슬퍼 하시지 마시라〃고 그래요. 채원어멈과 통화하면서 목이 메였어요.
바로 채원이가 전화로 ″할아버지 너무 슬퍼하지마시라″고 또 할아버지를 위로해주네요. 채원이가 ″큰할아버지 하늘나라에 가셔서 편히 쉬시라″고 삼우제에 큰할아버지께 부칠 편지를 써온다고 했어요.





2. 형님께 알려드릴께요!


형님!


형님생전에 항상 내가 형님께 어데를 다녀오거나 무슨일이 있으면 형님께 언제나 소식을 알려드렸지요. 이제 형님께 말로는 이야기 할 수 없으니 이렇게 글로 형님께 보고 드리는거예요! 형님께 보고를 하지 않고는 가슴이 답답해서 그냥 지낼수가 없어요.

형님이 2007. 7. 20일 금요일 오전 10시 10분경 눈을 감으셨어요. 이때 승일내외 우리내외 효숙이 그리고 간병인 아주머니가 있었어요. 승열내외 진숙내외 큰사위김서방 선영이와 승길이는 직접 바로 장례식장으로 왔어요.

우리들은 안양장례식장에서 온 앰블런스로 안양장례식장으로 형님을 모시고 갔어요!
몇일전 효숙이가 사온 파자마를 장례식장에서 온 직원들과 효숙이와 석화어멈이 갈아 입혀드리고 형님이 사용하시던 얇은 이불로 형님 몸을 감싸드리고 얼굴을 흰종이로 덮어드렸습니다.

그런데 형님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실때 형님이 누운 침대는 장례식장에서 갖고온 것인데 침대가 되었다가 의자가 되었다가 하는 그런 편리하게 된것이라 아무 문제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앰블런스에 탑승하시게 되었어요.


아파트 사람들과 경비실에서는 형님이 집을 떠나시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나는 승일이와 의논하여 안양장례식장에서 제일 큰 영정실과 접객실로 형님을 모셨습니다.


형님이 계시던 안양장례식장의 2박동안 아들과 며느리 직장에서 의왕시장을 비롯해 많은 조문객들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효숙이내외 진숙이 내외의 직장과 친구분들도 많이 오셔서 조문해주셧습니다. 주연이 친구들도 보였고 진숙이 친구 상림이 동생들도 눈에 띄였어요.

승인이는 EU FTA 협상으로 벨기에와 인도로 출장가서 못오고 전화만 했어요. 그리고 준화외할머니와 채원이 외할아버지께서도 형님 명복을 비는 전화를 주셨고 부의금도 보내주셨어요.

그리고 형님!
컴퓨터에 저장된 우리친척들과 동네사람들의 전화번호 명단을 아침에 내가 미리 준비해서 승열이가 모두에게 연락했어요.

작은댁의 장위동 효자 모자와 승태 승영 승환 조카들이 다녀갔고 특히 승태는 아들 딸 사위를 데리고 왔어요. 계선이 형 아들 승남이도 왔어요.

세화할머니 큰형수님과 남양형수님 그리고 남선이 형님은 몸이 불편하셔서 못오셨어요. 형님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모두들 충격이 크셨다고 하네요.


남양 친척들도 모두들 오셨어요. 승철이 조카 부자를 비롯해서 둘째 셋째 넷째 형님의 아들들과 며느리들이 모두 다녀갔어요.


남선형님 아들들과 형선이 형 내외 만선이 형수님과 아들들도 다녀갔어요. 그리고 남양홍씨 利城公파 종친회 회장님도 장지까지 오셨다 가셨습니다.

우리 3남매 사진

그리고 누나는 몇일전부터 병석에 있었는데 오빠가 운명하셨다는 말을 듣고는 충격을 받았으나 오빠한테 꼭 와야된다고 각오를 하니까 병석에서 일어날수있었다며 아들 며느리 딸 사위등 모두 데리고와서 형님 장지까지 왔다 갔습니다. 누나가 지난번 누나생일날 만난 것이 마지막이였다며 많이 슬퍼했어요.

수색에서는 완모형과 훈모가 다녀갔어요. 완모형은 어데 다니지 않고 형수님을 주로 보내는 것 형님도 잘 알지않아요. 하지만 완모형은 불편한 몸이지만직접 와서 형님을 뵙고 갔어요. 그런데 정복수누님은 부의금만 인편에 보내고 집안에 일이 있어서 안왔어요.

외삼촌댁에서는 한부석누이와 영수 그리고 동수가 왔어요. 동수는 대전에서 형님 부고소식을 듣고 왔어요. 그리고 진석이도 왔어요. 진석이는 이번에 우리일을 많이 도와주었어요.


순석이 누이 큰아들 이양재도 다녀갔어요. 그런데 순석이 누님은 중풍으로 병원에 입원해계신다고 하네요.그리고 선산앞에 꽃집 이찬형씨도 다녀갔어요.


그리고 이번에 창식이형 어머니께도 연락을 드렸는데 지난 3월달에 돌아가셨다고 하네요. 창식이형은 오지않았어요.

형님처가에서도 처남들내외 용산이모내외의 가족들이 모두들 오셨다가 장지까지 다녀갔어요. 그리고 거제에 사시는 큰처남도 새벽부터 서둘러 형님뵈러 오셨다가 가셨어요.

그리고 우리 처가댁에서도 큰처남내외와 처제들 내외들이 모두들 다녀가셨습니다.

의왕이리 이명기 이필영씨등 노인분들과 한성수 이장님 홍재유대부내외 명유대부도 모두 오셨고 형님이 다니시던 노인정에서도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도 몸이 불편들하신데도 많이들 조문 오셨어요.


김상식 박원용 이운영 이종안 그리고 한종석형의 형수님과 아들이 다녀갔어요. 한종석형은 형님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아 못오셨다네요.


또 멀리 카나다에 강신봉이도 형님 부의금으로 10만원을 보내왔어요.

형님께서 2박하셨던 안양장례식장

조문객 접대는 방이 넓어서 문상객이 많이 오셨는데도 아무문제가 없었고 음식도 참 정갈했고 맛있었어요. 음식서비스는 안양상조회 직원들과 준화어멈 채원어멈 그리고 형님 외손주들이 많이 수고했어요. 우리며느리 둘이서 앞치마치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특히 용원이는 솔선수범하는 모범생이였어요. 신발정리는 민우 민재 준화가 담당했어요.
안양장례식장 정말 맘에 들게 잘들 해주더군요.형님도 보셨으면 잘한다고 하셨을꺼예요.

그리고 형님!


손자 석화있잖아요. 이 녀석이 어느새 자라서 상주옷을 입고 아범과 함께 아주 의젓하게 조문객들을 맞이 했어요. 할아버지 영정에서 거의 떠나지 않고 손주노릇을 아주 잘 했어요.

형님이 보셨다면 아마 석화 칭찬을 많이 하셨을꺼예요! 하늘나라에서도 손주 많이많이 사랑해주세요.

그리고 실내조화는 아들며느리 직장에서 마련해왔고 실외대형 삼단조화는 승진이와 승인이 그리고 큰사위 김서방 친구 회사에서 보내와서 앞에다 놓았어요.






좌측이 접객실이고 우측은 영정실입니다

형님!


형님이 언제 하늘나라로 가셨는지 잘 모르시죠. 7/20일 금요일 오전 10시 10분경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음1924.6.16일 태여나시여 2007.7.20(음6.7일)돌아가셨으니까 만 83세의 천수를 누리신셈이예요!



그러니까 토요일과 일요일이 휴일이라 모두들에게 부담주지않게 형님께서 날짜를 정해서 하늘나라로 가신 것 같아요. 형님이 생전에 손목시계차고 달력보시며 날짜를 늘 물어보시더니 형님 돌아가실날을 정하실려고 날자를 물어보셨나봐요.


7/20.21.22일 3일간은 날씨도 좋았어요. 형수님도 승진이 결혼 한달후에 날짜를 잡은것같이 운명하시더니 형님도 자식들 고생않되게 날짜를 정해서 가신 것 같아요.

그리고 7/21일 안양장례식장에서 우리가족들이 지켜보는가운데 직원두명이 형님 염을 해드렸는데 아주 맘에 들게 잘해주었어요.

면도까지 해드리고 크림과 향수까지 아주 끝내주게 잘해 주었어요. 형님의 모습이 편안하게 아주 깔끔하게 보였어요. 형수님 6년만에 상봉하시는 것을 알기라도 했는지 형님 멋을 많이 내 드렸어요.

형님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실 때 어느곳 묘소로 가야하나 걱정하지 않아서 마음 편하셨죠.
이 아우가 부모님과 형님 그리고 동생의 잠들곳을 가난했을 때였지만 내가 미리 장만해 놓아서 형님도 기분좋으시죠. 이 아우도 아주 기분이 좋아요.


요즈음 공원묘역은 가까운 곳도 없을뿐더러 멀리있고 거기다가 가격도 수백만원이 넘게 든다고 해요.

형님생전에 말씀하신대로 범선이 내외 묘보다 약간 위로 잡아드렸어요. 형수님과 같이 합장해드린거예요.

그토록 먼저가신 형수님 생각하시면서 형수님 사진을 갖고 다니시더니 하늘나라에서 형수님 바로 옆에 누우시니까 반가웠지요.


그리고 형님 노자돈 하시라고 승일이가 형님 가슴위에 5만원 새돈으로 드렸어요. 또 형님이 늘 아들내외와 딸들과 이 아우한테 전화하시던 핸드폰과 담배와 라이터도 형님 옆에 놓아드렸어요.


그리고 형님과 저와 같이 중국계림에 여행가서 찍은 사진과 추석때 찍은 우리 가족사진도 넣어드렸어요. 이승이 생각나실때 보세요.

중국 계림공항에서 찍은 사진

노후에 형님 돈 걱정마시고 편히 지내시라고 형님 집판돈 거금을 은행에 넣어 드렸더니 〃나도 이제 부자〃라고 자랑하시면서 애지중지 아끼기만 하던 그돈 말입니다.


아~아 형님!

그 아까워하시던 그돈, 자랑만 하셨지 그 돈 한푼도 못써 보시고 자식들에게 몽땅 남겨주고 왜 그리도 빨리 가셨나요. 형님이 너무 가엽습니다. 형님이 너무 불상합니다.정말로 슬픔니다.


아무리 허무하고 덧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인생사 정말로 공수래 공수거입니다.

空手來 空手去 (공수래 공수거)
人生事 如浮雲 (인생사 여부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우리네 인생사 뜬구름과 같구나

成墳後 客散去 (성분후 객산거)
夜寂寂 月黃昏 (야적적 월황혼)

성분후 조문객들 모두 떠나니
밤이되어 적적한데 황혼달만 비치네

裸木上 杜鵑啼 (나목상 두견제)
遺産財 衆人奪 (유산재 중인탈)

외로운 나무위에 두견새 슬피울건만
자식들은 유산 갖고 싸우고 있네

그리고 형님!


묘역공사는 이번에 아주 대대적으로 고쳤어요. 우선 형님형수님과 부모님과 동생내외묘 셋의 봉분을 직사각으로 하고 돌로 돌렸어요.

그리고 묘역전체를 새로 잔디를 깔았어요. 형님이 생전에 잔디는 별로 없고 잡초가 너무 많다고 하시면서 잡초 뽑으며 힘들어 하셨잖아요!

가족들이 형님 잠드실 곳을 마련하러 가고 있어요!







성분제 올리는데 진석이가

제올리는것을 코치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번에 형님누울자리 만들면서 묘역전체를 새로 잔디를 깔도록 한것이예요.

형수님 묘가 약간 습기가 있어서 아래에 하수가 되게 깊이 고랑을 파서 배수가 되게햇고 주위의 나무를 베어서 동생내외무덤에 그늘이 안지게 했어요.

그리고 형님이 설치해놓으셨던 철조망 울타리도 없앴고 묘 앞 과일나무도 앞줄은 다 없애버렸어요.


그리고 나머니 과일나무의 가지도 내년 한식때 많이 가지를 짤라서 앞이 훤히 보이게 할꺼예요.

이 아이디어는 외사촌 진석이 아우가 알으켜 준것이예요. 진석이는 외삼촌을 닮아서 아는 것이 많고 이번일에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주위산은 청주한씨종중 산인데 진석이가 종중회원이라 진석이가 나무를 베도 좋다고 해서 나무를 벤것이예요. 그늘이 안지니까 선영이와 승길이가 무척 좋아했어요.




형님내외분이 편히 쉬실 집을 다 완성했어요




그리고 이 공사는 큰사위 김서방이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와서 해주었는데 한마디로 끝내주게 잘해주었어요. 성분하기전에 회다지 달공도 해드렸어요. 회다지할때 큰사위친구 경기도 국장했던 사람도 땀을 뻘뻘흘리며 함께 했어요.


이번 묘역공사 전경을 나중에 사진 올려 놓을테니 형님 한번 보세요. 완전히 가족공원묘원이 되었어요. 현충원의 대통령 묘 같아요.

가격은 일할 때 팁준것말고 부모님 묘와 동생묘가 각각 200만원으로 내가 200만원 선영이와 승길이가 200만원냈고 형님내외분의 묘는 석상과 비석등을 합쳐서 320만원을 형님 부의금으로 부담했어요.

즉 합계금액이 720만원이 든것이예요. 큰사위 김서방의 덕분에 싸게 아주 잘 한거예요.

그리고 형님!


형님이 안양장례식장에서 오실때는 최고급 리무진을 타고 오셨는데 형님뒤를 깜박이 등을 켜고 길게 길게 늘어서서 오는 조문승용차행열이 장관이였어요.

형님이 보셨으면 좋았을텐데 못보셔서 아쉬워요. 형님과 큰사위 김서방이 탄 리무진이 안양에서 장지까지 올때 이상하게도 거의 신호등이 파란불이였다고 했습니다.


삼우제에 형님뵈러 왔습니다

비가 와서 잔디가 잘 살것같네요

7/22일 일요일 날씨가 좀 더웠지만 쾌청한 날씨라 아무문제 없이 형님을 잘 모시게 되었어요. 아들 며느리 그리고 딸 사위 조카들 그리고 친척들 동네분들 모두 모두가 애 많이 썼어요.


장지에서 오면서 형님집을 가족들 모두가 들렸다가 각자 집으로들 갔어요. 이상이 형님이 못보신 것을 다 이야기 한거예요. 형님 아셨죠!

무슨일이던지 이 아우와 의논하며 아우의 의견이면 무조건 믿으셨고 이 아우에게 의지하셨던 형님! 친척들 모임이면 언제나 내가 모시고 다녔던 우리형님!


이제 형님을 모시고 어데를 가고 싶어도 형님이 안계시니 어떻하죠. 형님한테 다 말하니까 이제 가슴이 후련해요. 형님도 궁금했던것이 이제 확 풀리셨죠!


갑자기 형님이 보고 싶고 허전해집니다. 형수님 돌아가신후 부쩍 이 아우를 의지하시던 우리형님!

형님의 인자하신 모습이 아른거려 눈물이 또 나요! 이 아우도 이제 나이가 들어 마음이 약해졌나봐요.


형님계시는 곳 산소주변에서 뻐꾹새가 울고 새들이 지저기고 있었요.
사랑하는 우리형님! 고히 잠드세요. 자주 찾아가서 뵐꺼예요.

2007.7.24 새벽
사랑하는 아우 충선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