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17.크렘린 [Kremlin]

만정도화(滿庭桃花) 2007. 5. 29. 21:46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모스크바 여행기념 셔츠




여기가 호텔 감옥!

밤에 모스크바에도착했다.

호텔에 와서 첵크인을 하는데 방 한개가 부족하다고 한다.

이때가 밤11시가 훨신 넘은시각!

모스크바에서 마중나온 현지가이드는

자기는 책임없다며 해결도 안해주고 가버렸다.

우리일행들의 부부들은 모두 배정받은

방으로 올라가고 나의 룸메이트인 인솔자는 어떻게 해결해 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다보니 나혼자만 호텔 프론트에서 한참동안을 기다렸다.

사진과 같이 모스크바의 이 호텔은 호텔의 간판도 없고

호텔주위는 철책으로 울타리가

둘러쳐져있고 정문에는 기관원같이 생긴 키큰 보초가 서 있었다.

프론트에도 제복입은 정보원같이

생긴사람 2명이서 눈을 부라리며 감시하고 있었다.

이건 완전히 호텔이 아니라 감옥같이 느껴졌다.

그런분위기에서 나 혼자 프런트에 혼자 무조건 기다리게 된것이다.

얼마후 우리 일행중 전사장과

신선생이방이 부족하다는것을 알고 내가 걱정이 되여 프런트에 내려왔다.

조금후 나의 룸메이트인 인솔자도 방을 알아보려 돌아다니다가 왔다.

해결책은 여자들은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합숙하기로 했다.

그래서 신선생방에서남자 4명이서 합숙으로 모스크바의 하루밤을 보냈다.

4명의 남자들이 한방에서 자다보니 잠도 일찍 깻다.

세수를 대강하고 산책이라도 할까하고

아침일찍 나왔으나 철책 울타리에 보초가 눈을 부라려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이곳이 호텔 감옥이라고 생각됐다.

아침을 먹고 출발을 하는데 어제 밤에 책임이 없다던 사람 대신 다른 가이드가 나왔다.

아침 식사도 대강대강하고호텔 감옥을 빠져나왔다. 후유 ~ 살았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가 멸망한지 15년. 공산주의는 사라졌으나,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다.

귀국해서 여행사에 항의했다.

여행사 책임자로부터 사과받고 하루 숙박비 40유로(52,000원)를 환불 받았다.



소나타가 보인다. 그런데 찌그러졌다.



크렘린 [Kremlin]


중세 러시아의 성새(城塞)·성벽(城壁)으로, 오랫동안 러시아 황제의 거성(居城)이었으나 18세기 초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동궁(冬宮)'이 세워지면서 황거(皇居)로서의 기능을 잃었으며, 1918년 이후 소련정부의 본거가 되었다.

러시아어(語)로는 크레믈리(kreml')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모스크바의 크렘린이며,

러시아어 대문자로 시작할 때는 모스크바의 것을 가리킨다.

전설에 의하면,

모스크바의 창건자 유리 돌고루키공(公)이 1156년 무렵 작은 언덕 위에 숲과 목책으로 요새를 구축하였다 한다.




양파 머리 모양의 바실리 사원앞에서

성 바실리 사원


풍부한 색상과 형태를 지닌 성 바실리 사원은 붉은 광장의 남단에 위치해 있다.

47m높이의 양파머리 지붕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여덟 개의 양파머리 지붕들로 이루어져 있다.

대칭으로 잘 조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솟아 있는데 오히려 이런 불균형이 그 나름대로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름다운 러시아 로마네스크 양식의 사원은

근처에 있는 고딕 양식의 탑들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이상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기묘한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포스토닉과 바르마'이다.

이반 대제가 카잔 칸을 항복시킨 것을 기념하여 짓도록 하였다.

1555~1560년에 걸쳐 완성된

이 사원은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다시는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지 못하도록 두 사람의 눈을 뽑아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승기념일이 성모 수호제(바쿠로프)에

해당되므로 정식 명칭은 바쿠러프스키 사원이지만

민중의 존경을 받는 수도사인

바실리의 무덤이 있기 때문에 성 바실리 사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홉 개의 양파머리는 각각 러시아 정교 사원으로

지어진 것인데 현재는 박물관으로 개방되고 있으며 프레스코화가 볼 만하다.

2개의 십자가가 교차하는 곳에

중앙 예배당이 있고 주변의 대각선상에 8개의 예배당이 있다.

이상한 것은 9개의 예배당은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8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파머리 하나 하나가 사각추,

삼각추, 다이아몬드 모양 등 다양한 입체를 이루고 있는 것을 즐겨보자.




크렘린 [Kremlin]


14세기 타타르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떡갈나무로 두껍게 성벽을 건설하였고, 1367년 이것을 하얀 돌로 대체하였다.

이것이 벽돌의 총안(銃眼)이 있는 성벽이 되었으며, 15∼16세기에 다시 축조되어 현재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오랫동안 러시아 황제의 거성(居城)이었으나

18세기 초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동궁(冬宮)'이 세워지면서 황거(皇居)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크렘린 [Kremlin]


1917년의 러시아혁명으로 모스크바는 다시 수도가 되어,

1918년 이후 크렘린은 소련정부의 본거가 되었다.

따라서 '크렘린'이란 말은 소비에트연방시대에

소련정부와 당(黨) 또는 당국자(當局者)의 대명사로서도 사용되었다.

크렘린 [Kremlin]


현재의 크렘린 궁전은 모스크바강(江)을 따라

1변이 약 700m의 삼각형을 이루고, 높이 9∼20m,

두께 4∼6m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장식적인 성벽의 첨탑,

피라미드형 탑, 북동의 주문(主門) 레데멜문의 시계탑 등은 17세기에 증축되었다.


크렘린 [Kremlin]


성내에는 3대 성당인 성모승천교회(건축 기간 1475~1479),

성수태고지교회(1484~1489),

대천사교회(대천사미가엘교회:1505~1508)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당과 수도원·궁전·관청·탑 등이 있다.

중앙에는 높이 100m의 대종탑(이반대제종탑)이 서 있는데,

이 종탑이 서 있는 자리는 모스크바의

정중앙에 해당한다고 하며 적이 칩입하면

종탑에 있는 21개의 종이 일제히 울렸다고 한다.

대부분의 건물은 15~16세기에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설계하여 지은 것이다.










크레믈린 궁전 대로에 삼성핸드폰 광고가 줄지여있다.

모스크바 사람들은 이길을 삼성로라고 부른단다.



모스크바강


모스크바 시민의 모스크바 강에 대한 애착은 매우 깊다.

20세기 초 모스크바 강의 수위가 낮아져

소형의 배가 겨우 다닐 정도로 된 때가 있었다.

기능 회복을 위해 볼가강 상류와

연결해 물을 끌어들이는 계획이 세워졌지만 30년 이상이나 방치된체 있다가

겨우 1931년 6월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에 의해 햇빛을 보게 된다.

이렇게 4년 8개월이라는 단기간에

수에즈운하의 3배가 넘는

토사를 퍼내고 1938년 5월 1일 길이 128km에 달하는 모스크바,볼가강 운하가 완성된다.

모스크바는 수로를 통해 발트해,카스피해를 비롯 볼가,돈운하가 완성된 뒤에는 아조프해등 5개의 바다에 연결되게 되었다.

한때 공해로 수질이 오염된적도 있었지만

모스크바 시민의 노력으로 여름에는 강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을 정도이다.

모스크바 강 유람은 여름으로 한정되어 있다.

5월에 시작해서 9 ∼ 10월에 끝난다.





열심히 설명해주는 현지 인솔자(키큰 남자분)













붉은 광장


모든 사람이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이미 익숙한 장소가 붉은 광장이다.

이 곳은 구 소련 시절 5월 1일 메이데이와,

사회주의 정권 탄생을 축하하는

11월 7일의 혁명기념일에 기념 퍼레이드가 열렸던 곳으로,

지금은 공산주의자의 데모행렬이 눈에 많이 띄고 있다.

크레믈린 북동쪽의 붉은 성벽과 붉은 벽돌 건물의 국립 역사 박물관,

굼 백화점,그리고 양파 머리 모양의 바실리 사원에 둘러싸여 있다.


총 길이 695m,폭 130m,

넓이 약 7만 3,000㎡미터에 이르는

러시아 최대의 광장으로 수많은 러시아 역사의 산 현장이었다.

이 곳을 붉은 광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크라스나야이(Красная)'라는 러시아의 고어에서 유래된다.

원래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크라스나야라는 말은 지금은 붉은 광장이라는 말로 의미가 통하고 있지만

본래는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15세기 말에는 단순한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Torg(시장)라고 불렸으나 1571년 발생한 화재로 점포들이 불타버린 뒤 개칭되었다.

그 이후에 키타이 고르드 지역을 17세기에 정리하여

붉은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으로 19세기 말 무렵이다.



모스크바-

수도. 면적 9946㎢. 인구 863만 400명(2000). 대륙성 기후를 보이며,

연평균기온 4.4℃, 1월평균기온 -9.9℃, 7월평균기온 19℃이다.

겨울에는 흐린 날이 계속되고

12월 한 달의 일조시간은 평균 20시간, 1월은 30시간 정도이다.

기온의 연간 변동이 크고 한난의 차이가 심하여 거주조건은 좋지 않다.

연강수량은 575㎜, 여름과 가을에 많은 비가 내린다. 적설량은 400㎜ 정도이다.

알렉산드로비치가 1276년 무렵에

이곳을 모스크바대공국의 수도로 정하면 수도가 되었고 .

표트르대제 때인 1712년, 수도를 새로 건설된 상트페테르스부르크로 옮겼다.

1812년 나폴레옹군대의 모스크바침공 때

모스크바를 뒤덮은 대화재는

1주일 동안 계속되어 시 전체의 3/4이 소실되었다.

나폴레옹군대는 39일 후에 물러갔으나, 그에 앞서 크렘린의 일부를 폭파했다.

모스크바는 러시아혁명의 주요 무대가 되었고,

10월 혁명 후 1918년 3월 11일

소비에트정권은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옮겨, 모스크바는 다시 수도가 되었다.

공업부문 종사자가 전취업자의 25.1%이고

그 다음으로 과학연구와

서비스부문이 19.6%, 건설 10.5%, 교통 8.1%, 교육 6.1%,

상업 5.3%(1985)순으로 다기능(多技能) 도시가 되었다.

시민 1000명당 혼인은 10.1명,

이혼은 5명(1985)으로 이혼율이 높다.

모스크바의 성별 인구구성은 남자에 비하여 여자가 훨씬 많고,

연령별로는 노령인구의 비율이 높고 유년인구가 적다.

모스크바는 교육의 도시이다.

모스크바대학을 비롯하여 고등교육기관이 76개 있고

학생수는 1985년도에 61만 명이었다.

극장수는 31개, 미술관·박물관은 71개, 도서관 406개이다.

6000명 가까이 수용할 수 있는 크렘린대궁전을 비롯

볼쇼이극장·크렘린미술관·푸슈킨미술관·

트레티야코프미술관 및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레닌도서관 등 세계에 널리 알려진 시설이 많다.



붉은광장 [Krasnaya Ploshchad]


러시아 연방 모스크바의 중앙부, 크렘린 성벽의 북동쪽에 접한 광장.

다갈색의 포석(鋪石)이 깔려 있으며, 가장 넓은 부분의 너비는 100m, 길이는 500m 가량이다.

남동단의 화려한 바실리블라제누이 성당(16세기),

크렘린 쪽의 레닌묘,

북서단의 역사박물관 등

아름다운 역사적 건물과 유명한 굼 백화점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15세기 말부터 크렘린 정면의 광장이 되었으며,

차르의 선언이나 판결, 포고가 내려지던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상업광장·화재광장 등으로

불렸다가 17세기 말부터 ‘아름다운(크라스나야)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크라스나야에는 ‘붉은’이라는 뜻도 있다).

현재 메이데이 등의 시위행사나 사열식이 행해진다.













이곳이 붉은 광장이다.

정면에 레닌묘가 보인다.




외곽성벽도 안의 건물도 붉다.







붉은 광장 후문입구이다.

저편 끝에 보면 줄을 서서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레닌묘를 구경할려면 표를 사서

들어가는데 줄서서 기다리는 사람이 엄청많아 나는 포기했다.



크레물린 광장 후문밖의 모습이다.



여기가 붉은 광장이다.

내가 서있는 뒷쪽에 레닌묘가 있다.



















모스크바에서 탔던 버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