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앨범

11.큰형님

만정도화(滿庭桃花) 2007. 1. 22. 18:40


해방전의 형님의 모습은 당시에 초일류 신사이셨다.

이당시는 서울엘 가도 거의가 바지저고리 차림의 사람들이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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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큰형님께서는 1945년 해방전에 전축을 2대나 사오셨는데 우리마을 전체에 전축(컬럼비아 레코드)있는 집은 우리집뿐이라 저녁이면 바깥마당에 멍석을 깔고 전축을 틀곤 했는데

당시 유명했던 기생출신 가수 이화자의 <화류춘몽>,<초립동이> 노래등을 들으러 "홍씨댁 기와집"으로 가자며 건너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모여 들어 우리집 마당은 언제나 인산인해였다.

1930년대 초반부터 기생이나 화류계를 소재로 한 유행가가 적지 않게 발표되었는데, 천한 신분,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한탄하는 기생들의 신세타령의 노래가 많았다.

그 가운데에서도 이화자가 부른 '화류춘몽'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화자도 기생 출신이었고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기생이 되어 1936년에 뉴 코리아레코드에서 가수로 데뷔, 30년대 후반 신민요 가수로 이름을 날리며, 일세를 풍미한 인기 가수였다.

화류춘몽을 부르는 이화자의 목소리는 출신을 슬퍼하는 흐느낌처럼 들렸다. 훗날 이화자는 아편에 찌들다 6.25 전쟁의 혼란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참 불쌍도 하다.

지금도 유성기 소리가 어데서 나는지, 사람이 유성기 안에서 직접 노랠 부르는것인지 궁금해 유성기 밑을 두리번 거리며 쳐다보던 동네 할머님들의 순진하고 어수룩한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때의 유성기는 높이가 높은 사각형으로 엄청 큰것이였다.

내가 신바람나게 유성기 태엽을 감으면서 이화자의 화류춘몽,어머님전상서 등의 노래를 틀을때면 애조띤 슬픈 곡조에 동네분들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선하다.

아득한 옛날 어머님과 홍영선형님을 그리면서 즐겨들으시던 화류춘몽을 오늘은 김용임이 다시 부른화류춘몽을 들어봅니다.



화류춘몽

(원곡 이화자.노래 조미미)

꽃다운 이팔청춘 울어도 보았으며
못생긴 첫사랑에 울기도 했드란다
주름진 치마폭에 화장한 얼굴위에
눈물이 얼룩지는 낙화신세
(이름마저 기생이라) 이름이 원수다

빛나는 금강석을 탐내도 보았으며
값없는 금강석에 울기도 했드란다
사랑도 떠나가고 청춘도 시들어져
외로이 울고웃는 낙화신세
(이름마저 기생이라) 모두가 그런가

해방전후 최고 인기가수였던 이화자의 화류춘몽

어머니께서 생전에 좋아하시던 노래 화류춘몽이다.

해방전 홍영선형님께서 레코드판을 사오셔서

온동네 할머니 아주머니들께서 눈물을 훔치시며 듣던 곡이다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님 어머님과 형님 아우등형제들을 생각하며

이 노래를 듣고있자니 저세상에 가신 가족들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