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홍영숙
김동희 사장 육순기념으로
식사를 한후 찍은 기념사진이다.
홍길선 형님은 이때만 해도 사진과 같이 아주 건강하셨다.
모두가 모인 아주 귀한 사진이다
영숙이는 세검정초등학교와 덕성여중고교를 졸업했다.그런데 학비조달은 양친회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공부했다.
그리고 양친회에서는 아동용 옷과 학용품도 많이 보내주었다.내가 알기로 당시에 보내주는 돈이 매월 2-3천환으로 그 돈은 당시 학교 등록금을 낼 정도는 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학비 외에 잠재워주고 밥 먹여주고 보살펴주신 외조부모님과 큰외숙모님의 정성이 없었다면 어찌 영숙이가 공부 할 수 있었겠는가! 영숙이는 외조부모님 큰외숙모 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었다.
영숙이 외조부모님은 참으로 인자하시고 마음씨가 착한 분이셨다. 그리고 영숙이보다 6살위인 막내이모(이숙자)는 친언니같이 영숙이를 많이 보살펴주고 사랑해주어 고등학교 졸업 할 때까지 정 붙이고 외가댁에서 다닐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 한다.
영숙이는 경북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 예안김씨(禮安金氏)종손 김동희 와 결혼했다.옛날 같으면 안방마님으로 下人부리며 살았 을 그런 양반댁 맏며느리가 된 것이다.
영숙이네 별장인 산수정
산수정은 경천호수에서 내려오는 금천 냇가의 맑은 물이 보이는 풍광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제는 영숙이도 사위 며느리 얻고 손자를 둔 할머니가 되었지만 지금도 막내이모와 이웃하며 무슨 일이 있을 땐 제일먼저 막내이모와 의논하면서 절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막내 이모 숙자님이 고맙다.그런데 양친회로부터 도움을 받게 힘써주신분이 누구냐 하면 위에서 언급했던 사간동 아주머니의 큰따님이 힘써주신 것이다.
1968.3월 영숙이 덕성여고 졸업식날
내가 집사람과 같이 가서 찍어준 사진이다
양친회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한번 알아보자!
양친회는 한국 전쟁 직후인 53년부터 79년까지 국내에서 구호활동을 펼쳤던 지금의 포스터 페어런츠 플랜(Foster Parents Plan)의 옛 이름이다.유럽연합(UN) 경제이사회 협의기구인<플랜 인터내셔널>은 1937년부터 시작됐다.
스페인 내전으로 부모와 집을 잃은 전쟁고아를 돕기 위해 영국기자 존 랭던 데이비스가 포스터 페어런츠 플랜(Foster Parents Plan)을 설립 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플랜(Plan)은 유럽지역 난민 고아에게로 활동 범위를 넓혔고 현재는 15개 후원국 110만명이 45개 후원 대상국 120만명을 돕고 있다고 한다. 본부는 영국 워킹(Woking)에 있다.
한국은 1953년부터 1979년까지 후원 대상국이었다. <양친회>라는 이름으로 26년간 매년 2만5000여명이 외국의 후원자들에게서 지원을 받았다. 긴급구호를 포함해서 200억원이 넘는 후원금을 지원받은 것이다.
우리나라에 대한 지원은 1979년 중단됐고 1996년 5월에 우리나라가 OECD 가입을 계기로 <플랜>의 수혜국에서 최초로 후원국이 된것이다. 다시말해 지금은 우리도 불우한 아동들을 돕는 국가가 되였다는 것이다.
영숙이를 도와주신 미국인 수양아버지
요즈음은 우리영숙이와 같이 양친회로부터 도움을 받고 자란 사람들이 성공해서 어린시절에 받았던 고마움을 되돌려주기위해 <내리사랑 양친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도움을 주고있다는 내용과 당시를 회상하는 글이 가끔 신문을 장식하기도 한다.
이 당시에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릴적 기억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을 것이다.1950∼1960년대 어려운 시절 먹을것 입을것 하나 변변치 않던 시절에 외국 후원자들의 도움은 엄청난 힘이 됐던 것이다.
우리 영숙이도 당시 도움주엇던 미국인 아버지 즉 양아버지의 사진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당시에 교신하던 편지도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 주소와 성명을 알면 지금 살아계신지 알아봤으면 좋겠다.
내 기억으로 영숙이는 돈뿐 아니라 가끔 첵크 모직종류의 상의등 많은 옷을 선물로 받아 입었는데 어찌나 옷이 고급스럽고 비싸게 보이는지 부자집 귀한 딸같이 보였다.지금 우리나라에서 아파트등에서 남는 옷가지를 수집해 아프리카등에 보낸다고 하던데 이옷을 받아보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모습이 생각된다.
대전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어떤 사람은 수소문해서 당시에 도움을 주었던 사람을 찾았는데 후원자가 당시 미국의 엠마뉴엘 종교학교 학생회에서 활동하던 학생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은인한테 편지를 보내 조만간 그의 가족들을 한국의 자기농장으로 초대한다고 하니 자기를 아직까지 잊지 않고 찾아준것에 대해 매우 고마워하면서 꼭 한국에 오겠다고 했다고 한다.이사람은 회고하기를 <당시 그분의 지원이 없었다면 아마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일명 꿀꿀이죽 한 양동이를 10원에 사먹었지요. 담배 꽁초와 휴지등을 추려내고 먹거나 배급받은 밀가루죽이 유일한 먹거리였습니다. 먹을것이 없어 3일을 굶기도 했지요.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그는 동생 손을 잡고 보조금을 받으러 양친회 사무실을 찾았던 기억을 되살리며 웃어 보였다.
이상은 홍충선 자서전에서 발췌한 글의 일부이다
큰아들 김민규 결혼식날!
시어머님 옷을 잘 만져드리는 효부 며느리 영숙!
그러고 보니형님의 옷매무새를 점검해 드리고 있는 내 모습도 보인다.
지금의 영숙이는 며느리 사위얻고
손주들을 둔 할머니가 되였다. 세월은 많이 흘렀다
그런데 사진을 가만히 보니 김서방과 사돈양반의 모습이 비슷하다.
즉 양가 바깥사돈이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