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금수강산

花石亭

만정도화(滿庭桃花) 2011. 9. 15. 14:19

역사탐방


화석정 현판은 박정희대통령의 친필이다

박대통령의 글씨는 정말로 대단한 명필이다



이율곡

이이 [李珥, 1536~1584] 향년 49세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1548(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 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율곡의 임란예견 화석정 전설은 모두 낭설

율곡의 10만양병론에 대해서는 임란을 예언했다는 둥, 율곡이 은퇴한 뒤 선조의 피난길을 위해 정자에 매일 기름을 먹였다가 나중 횃불처럼 사용했다는 말들이 있지만 이는 모두 후세인들이 신격화를 위해 지어낸 낭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율곡의 10만양병론은 서애 유성룡도 당시 반대를 할 정도로 조정에서는 먹혀들지 않았다. 사실, 당시 조선은 10만은커녕 1만의 병력도 양성할 체계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더욱이 율곡이 10만 양병을 주장한 때가 병조판서를 지내고 대사헌으로 있을 때였는데, 대부분의 군신들은 병조판서로 있을 때는 침묵하다가 나중에 10만 양병 운운하는 율곡을 호되게 비판하기도 했다.

율곡에 대한 또 다른 신화의 하나인 파주 임진강 가에 있는 화석정 역시 사실이 아니다. 율곡은 임금이 북으로 피난 갈 것을 미리 알고, 이 정자에다가 기름을 먹여서 폭우 속에서도 훨훨 잘 타게 해 두었던 것이, 마침내 임진란을 만나 크게 효과를 보았다는 것도낭설이다.

그 당시 임금을 모시고 가던 서애 유성룡이 쓴 징비록

「…나루를 건너서니 이미 날이 어두워 앞을 분간하기 어렵다. 임진강 남쪽 기슭에 옛 승청(丞廳)이 있는데, 혹시 왜적이 거기 있는 재목을 가지고 뗏목을 매어 건너올까 해서 임금의 명령으로 불을 붙여 태우니 그 불빛이 강 북쪽까지 비쳐 길을 찾아 갈 수가 있었다.라고 적혔다.

선조 수정실록 등 여러 기록에도 똑같은 기사들이 나온다. 지형 상으로도 동파(東坡)로 건너가는 임진강 나루터와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과는 서로 떨어져 있어 상관없는 곳이다.

율곡은49세에 숨졌는데 만약 율곡이 10년만 더 살다 갔다면 많은 것들이 바뀌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69세까지 산 퇴계(1501-1570)의 문하에는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넘쳤지만, 율곡 사후에는 빼어난 인재가 없었던 것도 모두 율곡의 너무 이른 죽음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율곡은1584년에 사망했고, 임진왜란은 율곡이 죽은지 8년후 1592년에 일어났다


선조와 임진강

선조는 군사적 식견도 없으면서

군 지휘관의 판단을 무시하고 공격을 독촉하는가 하면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다른 장수로 하여금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한양을 무혈 입성한 왜군들의 주력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을 때 조정에서는 김명원에게 임진강 방어의 책임을 맡겼다. 1592년 5월 10일경, 임진강 나루터에 도착한 왜군들은 임진강 방어선이 의외로 견고할 뿐만 아니라 수심이 깊고 강폭이 넓은데다가 도하장비가 없어서 공격을 지체하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도원수 김명원에게 방어의 이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임진강을 건너서(강북에서 강남)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김명원은 왕의 명령에 따라 공격할 경우 승산이 없기 때문에 명령에 따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불복할 수도 없고 해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김명원을 불신한 선조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막 돌아온 한응인에게 왜군을 공격하도록 직접 명령을 내렸다.

이에 제도도순찰사 한응인은 5월 18일,가토 기요마사의후퇴하는 척하는기만술의 속아 도원수 김명원과 조방장 유극량의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조에게서 받은 독자적 지휘권을 이유로 들어 조방장 유극량과 함께 1만병사들을 이끌고 임진강을 건너 적을 공격하였다가 왜군의 매복으로부터 궤멸 당했으며, 한응인은 간신히 도망쳤으나 유극량은 전사하고가토 기요마사는 조선군의 배까지 노획해 임진강을 건널 수 있었다.

강 북쪽에서 도하 부대가 궤멸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조선군들은 사기가 땅에 떨어진 데다가검찰사 박충간이 도망가는 것을 보고 도원수 김명원이 도망가는 것으로 착각, 순식간에 해산하게 되니 결국 도원수 김명원이 나머지 군사들을 겨우 수습했으나 남아 있는 병사는 얼마되지 않았다.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보다도 많은 1만5천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천연적 방어의 이점을 갖고 있는 임진강 방어선에서유리한 방어전을 펼치고 있었음에도 지휘권 단일화라는 기본적 명제를 무시하고 지휘계통을 문란케 한선조의 잘못된 명령에의해 너무나 어이없게도 임진강 방어선은무너지고 말았다.

임진왜란때 조선 선조임금이

바로 저의 뒤에있는 임진강을

한밤중에 건너 북쪽으로 도망쳤다니 기분이 우울합니다

율곡은 장년이 되어서도 여가가 있을 때

자주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은퇴해서도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시와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화석정(花石亭)은 본시 율곡의 5대조가 세운 정자로서,

율곡이 일찍 8세 때에 이 정자에 올라 시를 짓고 놀기도 한 정자라고 한다.


이율곡 할아버지도

어려서 나같이 여기서 이렇게 놀았겠지..

율곡 할아버지께서

시를 읊으시던 이곳 화석정에서 나는 구구단을외운다


화석정 주차장


잘정비된 모습의 화석정

자운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