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1
수원화성 역사탐방-1
수원화성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대 역작품으로
총 길이 5.7킬로미터, 면적 1.2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정조는 당쟁의 여파로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 전농동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에서
수원 화산(花山)의
현륭원(顯隆院)으로 옮기고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 넓은 기슭으로 이전했다.
정조의 수원 화성의 건립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긴 것은 큰 뜻을 펴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면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충성스러운 신하, 군사력,
그리고 이들을 원만하게
다룰 수 있는 자금이라는 세 가지 요건이 필요했다.
정조는 수도인 서울에서는 이 세 가지 모두를 얻기 어려우며,
신도시를 건설하는 방법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런 목적의 정치 공간을 아버지의 추모 사업과 연결하여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다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었다.
수원부는 딱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서울과 남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상업 활동을 위한
도시인 한편, 사도세자의 현륭원이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자신의 야망을 구현시킬
대역사를 당시 30세인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에게 맡겼다.
처음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공사는 놀라운 속도로 진행됐다.
1796년 10월, 단 34개월(중간의 6개월
정역(停役)을 생각하면 28개월)만에 낙성연을 치렀는데
수원 화성과 같이 방대한
공사를 2년 반이라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실학자인 정약용과 같은
젊은 피를 수혈하여 종전과
차원이 다른 계획에 따라 건설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한 새로운 정치 공간으로서
수원부에 신도시를 건설했고, 실학자 정약용에게 화성의 축조를 맡긴다.
창룡문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화성 성곽 안에 있는 문이다.
창룡문은 화성의 동문으로 1795년(정조 19) 건립하였다.
건축양식은 돌로 쌓은 홍예문 위에 단층문루를 세우고
밖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쪽이 열려 있는 옹성을 쌓은 구조이다.
이후 6·25전쟁으로 문루와 홍예가 크게 소실되었으나
1975년 다시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창룡문 왼쪽에는 축성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문 부근에는 연무대와 활터가 있다.
편액은 판부사 유언호(兪彦鎬)가 썼다.
역사탐방차 소풍온 학생들이 타고온 버스
유치원 초등교학생들이 많이 왔습니다
수원화성 연무대
정면의 팔달산에는 벗꽃이 화려하게 핀것이 보이고
정상에는 저멀리 서장대가 아스라히 보인다
수원화성 요소요소를 관광시켜줍니다
중국 관광객이 많습니다.
연무대
화홍문 앞을 지나가는 관광열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