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령포
토론토에서 고국을 방문한 가인 죽마고우함께
영월 청령포 [寧越淸冷浦]탐방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유배되었던 곳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배를 타고 청령포로 가고있다
영월 청령포 [寧越淸冷浦]
강원도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번지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2월 26일 명승 제50호로 변경되었다.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남한강 상류에 있다.
강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휘돌아 흘러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으로는 육륙봉(六六峰)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서 마치 한반도처럼 생긴 지형이다.
1457년(세조 3) 6월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端宗)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겼다.
단종은 강 건너 영월부의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처소를 옮기기 전까지 두어 달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워낙 지세가 험하고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단종이 이곳을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표현했다고 전한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그곳에 살았음을
말해 주는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와 어가,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한양에 남겨진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쌓은 돌탑,
외인의 접근을 금하기 위해
영조가 세웠다는 금표비(禁標碑)가 있고
관음송(천연기념물 349)과 울창한 소나무숲 등이 남아 있다.
단종이 유배되였던 집앞에서
단종이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래고 있다
많은 부녀관광객들이 보인다
“청령포의 물 안개는 단종의 눈물”
강물은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고 곱다.
사실상 고립된 채 애끓는 삶을 이어가다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한 단종의 한이
서려있는 이곳은 이른 아침마다 물안개로 뒤덮인다.
일부 주민들은 “단종의 한숨 섞인 눈물이
물안개로 피어오르는 것”
이라며 반복되는 자연현상조차 경외시하고 있다.
슬픈 역사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유적지가,
휘돌아 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져
자연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이다.
보호면적은 204,241㎡로, 영월군이 관리한다.
관음송
자갈밭을 지나 울창한 송림 속으로 들어오면
중앙에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노송이 한눈에 들어온다.
단종의 유배생활과 관련된 수많은
일화가 녹아 있어 유명세를 타고 있는 ‘관음송’이다.
높이 30m, 수령이 600년에
달하는 관음송은 청령포를 포옹하듯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유배생활을 하던 단종이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시름을 달랬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소나무들이
전부 단종이 살던 집 방향으로 머리를 숙이고 있다”
“이 나무들은 햇빛을 많이 받아야 하는
‘극양수(極陽樹)’라는 품종이라 남쪽으로 굽은 것”이인데
사람들은 단종의 이야기에 빗대어 나무들이 임금이 사시는
집터에 예를 갖추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다고들 말하기도 한다..
이만진 작사/한복남 작곡/심수경 노래
왕관을 벗어놓고 영월땅이 웬 말이냐
두견새 벗을 삼고 슬픈 노래 부르며
한양천리 바라보고 원한으로 삼 년 세월
아~ 애달픈 어린 임금 장릉에 잠 들었네
두견새 구슬프게 지저귀는 청령포야
치솟은 기암절벽 굽이치는 물결은
말해다오 그 옛날의 단종대왕 귀양살이
아~ 오백년 그 역사에 비각만 남아 있네
동강물 맑은 곳에 비춰주는 달을 보고
님 가신 뒤를 따라 꽃과 같이 사라진
아름다운 궁녀들의 그 절개가 장하구나
아~ 낙화암 절벽에는 진달래만 피고 지네
[출처] 단종애사 심수봉
청령포 망향탑 [淸冷浦望鄕塔]
청령포 층암절벽에 있는 돌탑으로 단종이 쌓았다고 전해진다.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 뒤 층암절벽에 있는 돌탑이다.
단종이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 속에서도 한양에 남겨진 정순왕후(定順王后)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1974년 허물어졌던 탑을 복원하였다.
“헤어진 왕후를 그리워하면서
이 돌탑을 쌓아올렸다고 하는데,
망향탑에 담긴 단종의 마음은 어땠을까”
부인도 그립고 돌아가신 부모님도 보고 싶었겠지..
노산대
단종은 1457년(세조 3)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었는데
단종이 자주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청령포 뒤의 절벽은 노산대라고 불린다
지금은 관광객들을 위해 편리하게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 왕방연 -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자시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세조는 1457년 6월에 단종을 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영월로 유배시켰다.
10월에는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등시켜 사약을 내렸다.
이 때 금부도사로 유배길도 호송하고 사약을 들고 간 이가 왕방연이다.
왕방연은 청령포에 단종을 두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곡탄 언덕에 앉아 여울물 소리를 들으며 이 시조를 지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사모하는 님을 두고 와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마음 같아 울며 밤길을 가는구나.
단종에 대한 곡진한 그리움이 지금도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왕방연은 사약을 들고 차마 단종의 처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머뭇대자 나장이 재촉했다.
“어명이오.”
단종은 관복을 갖추고 금부도사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금부도사가 또 어인 일인가? ”
왕방연은 말도 못하고 뜰에 엎드려 흐느낄 뿐이었다.
단종 곁을 시중들던 공생(貢生)이 공을 세워볼까 금부도사도 하지 못하는 일을 자청했다.
공생은 활시위로 올가미를 만들었다.
문틈 뒤로 단종의 목을 걸어 올가미를 힘껏 잡아 당겼다.
단종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천근의 몸을 부렸다.
1457년 10월 24일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단종은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시신은 그대로 강물에 던져졌고 그날 밤 거센 폭풍우가 몰아쳤다.
검은 안개비로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단종을 죽인 공생은 몇 발자국 걷다 피를 토해 죽었다.
단종을 모시고 있던 궁녀들도 강물에 몸을 던졌다.
단종과 궁녀의 시신이 강물에 떠 있었으나 수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멸문지화를 당하기 때문이었다.
호장 엄홍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단종의 죽음을 듣고 대성 통곡을 했다.
그리고는 시신을 수습하여 동을지에 무덤을 마련해주었다.
지금의 장릉이다.
그 이후 영월에 부임하는 부사들은 첫날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나갔다.
어느 누구도 영월 부사로 가는 것을 꺼려했다.
이러한 소문은 궁중은 물론 조선 팔도에 이르기까지 급속히 퍼져나갔다.
영월 부사를 자청한 이가 있었다. 부임 첫날이었다.
그는 정중하게 관복을 차려 입고 밤늦게까지 관헌에 앉아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한바탕 바람이 불더니 순간 불이 꺼졌다.
대들보가 흔들리고 선반 위의 물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잠시 후 소년 혼령이 수십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리고는 뚜벅 뚜벅 동헌 마루로 올라갔다.
단종의 영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부사는 동헌 마루로 내려가 예우를 올리고 하회를 기다렸다.
“나는 공생의 활시위에 묶여 목숨을 잃었다.
목이 답답하여 견딜 수 없으니 이 줄을 풀 어 달라.”
“저는 임금님의 옥체가 어디인지 모르옵니다.”
“ 엄홍도라는 사람을 찾아 물어보라.”
한 바탕 바람이 불더니 혼령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침이 되었다. 사람들은 장례 준비에 바빴다.
죽은 줄만 알았던 부사가 관복을 차려입고 동헌에 고추 앉아있지 않은가.
엄홍도를 불렀다.
매장한 곳을 파보니 용안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목에는 가느다란 활시위가 감겨져 있었다.
부사는 단종의 제사를 정중히 모셨다.
영월은 평온을 되찾았다.
왕방연. 생몰 연대 미상으로 조선 초기 문신이다.
사육신,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사건은
결국 단종의 유배와 사약으로 이어졌다.
심부름꾼, 금부도사가 무슨 힘이 있으랴.
그래서 나온 시조이기에 더더욱 애틋하기만하다.
영월에는
‘동서 300척, 남북으로 490척이라 새겨진 금표비,
단종의 비참한 생활을 보고 통곡 소리를 들었다는 600년이나 되는 관음송,
사약을 받은 자리 관풍헌, 달 밝은 밤 단종이 자규시를 읊었다는 자규루가 있다.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그리워하여 쌓아 올렸다는 망향탑,
엄홍도의 충절을 새긴 장려각,
청령포에 새겨진 왕방연 시조비가 있다.
지금 우리는 어디쯤 서 있는가. 한 밤중 자규 울음 소리가 들리는가.
산마루 누각은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그리워서 높이 서 있는 것이다.
그리움만큼 애틋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있다면 이제는 자규가 울고 있는 우리의 산동네 어려운 이웃들이 아닌가.
출처. 대전일보사
# 슬픈 역사의 흔적 - 단종 유적지
청령포는 영월의 랜드마크다.
동강이 굽이 돌아 삼면이 물로
막혀 있고 뒤로는 육육봉 절벽이 가로막아 자연의 감옥을 형성하고 있다.
단종이 왜 여기로 유배를 왔는지 직접 보면 이내 알 수 있다.
청령포는 소나무로 유명하다.
수백 년 묵은 소나무 700여 그루가 장관을 이룬다. 청령포는 소나무에도 사연이 전해온다.
일제는 다른 지역에서는 소나무를 마음껏 베었어도
청령포 소나무는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고 한다. 태백선 기차를 타고
청령포를 지날 때는 일본군이 군모를 벗고 예의를 갖췄다는 얘기도 전해내려온다.
청령포 소나무 중 관음송(觀音松)이 있다.
두 갈래로 갈라져 하늘 높이 솟구친 모습이 위엄이 있다.
그 둥치에서 어린 단종이 울음을 쏟아냈다고 한다.
신기한 건 청령포 소나무는 한결같이
어소(御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담장 안으로 고개를 디밀고 있는 것도 있다.
빛을 더 받으려는 식물의 본성 때문이겠지만,
영월에서는 나무도 왕에게 예를 표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청령포 일대 단종 유적지는 반경 200m 안에 있다.
단종이 묵었던 어소, 왕비 송씨를 그리며
돌을 쌓았다는 망향탑,
한양을 바라봤다는 노산대, 모두 그 안에 있다.
그 반경은 금표비에 새겨진 것과 거의 일치한다.
금표비에는 “동서로는 300척,
남북으로는 490척 밖으로 드나들지 못한다”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