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에서부산까지

제암리.용주사

만정도화(滿庭桃花) 2010. 4. 8. 09:32

고국방문일기-4

죽마고우 가인 강신봉

堤岩里탐방


제암리학살사건 [堤岩里虐殺事件]

3·1운동 당시 일본 군대가

경기도 수원군(지금의 화성시)

향남면(鄕南面) 제암리에서 주민을 집단적으로 살해한 만행사건.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일본 육군 중위가 이끄는

일단의 일본군경이 앞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제암리에 도착해서 마을 주민 약 30명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통곡하는 유가족

주민들이 교회당에 모이자

아리타는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였다.

그때 한 부인이 어린 아기를 창 밖으로

내어놓으면서 아기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일본군경은 그 아이마저 찔러죽였다.


불타버린 교회

이같은 학살을 저지른 일제는

증거인멸을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으며,

아직 죽지 않은 주민들이 아우성을 치며

밖으로 나오려고 하였으나 모두 불에 타 죽었다.

23명의 합장묘 앞에서,

이때 교회당 안에서 죽은 사람이 23명,

뜰에서 죽은 사람이 6명이었다.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일제는 인근의

교회건물과 민가 등 31호에 불을 질러 또다시 살상자를 내었다.

스코필드 박사

이와 같은 일제의 만행은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여 스코필드는

현장으로 달려가 그 생생한 모습을 사진에 담아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미국에 보내어 여론화하였다.

1982년 제암리학살현장의 유적은 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었다.

당시의 신문기사

화성시에서 새로 건립한 순국기념관

33인 모임회의





용주사탐방


용주사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의 화산(華山) 기슭에 있는 사찰.

일제강점기 때는 31본산(本山)의 하나였는데,

이곳에는 원래 854년(신라 문성왕 16)에 세운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다.

952년(고려 광종 3)에 병란으로 소실된 것을

조선 제22대 정조(正祖)가 부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화산으로 옮긴 후,

1790년 갈양사 자리에 능사(陵寺)로서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명복을 빌었다.


융건릉(隆健陵)

소재지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87-1

융건릉(隆健陵)은

사적 제206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장조(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융릉(隆陵)과

그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건릉(健陵)을 합쳐 부르는 이름으로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다.


융릉
융릉(隆陵)은 조선 정조의 아버지이자 사도세자로 알려진

조선 장조(莊祖, 1735년~1762년)와

혜경궁 홍씨로 널리 알려진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1735년~1815년)가 함께 모셔진 능이다.

본래 사도세자의 묘는 원래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기슭에 영우원(永祐園)이란 이름으로 있었으나

왕위에 오른 정조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숭하고 난 뒤,

묘지 이장을 준비하고 곧 그의 지시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붙였으며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죽은 후 그 곁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1899년 대한제국 고종은 왕계 혈통상

고조부인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숭하면서 현륭원이란 명칭도 융릉으로 격상시켰다.

정조대왕

건릉
건릉은 조선 제 22대 왕인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 6일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21년 후 순조 21년 1821년 3월 9일 효의왕후가 승하하였다.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에 안장하려다

김조순의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주장으로 길지를 찾아

순조 21년 1821년 정조의 릉을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가인 강신봉의 고모댁 손주들이

사준 저녁식사를 잘먹고 조카들과 기념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