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종의며느리

만정도화(滿庭桃花) 2009. 9. 23. 13:50


세종대왕은 며느리 복이 없었다

세종 소헌왕후

그러면 세종의 며느리 즉 문종의 부인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깐깐하고 점잖키로 이름난 세종대왕과

지성을 갖춘 세종비 소헌왕후는 금실도 좋고,

만백성의 어버이라 불리우기 손색이 없는 임금내외였지만

단한가지, 며느리 복만은 없었다.

세종대왕의 맏아들

문종(文宗, 1414-1452)


조선의 제5대 왕(재위 1450∼1452).

왕비 현덕왕후(顯德王后)
아버지 세종(世宗)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




문종의 첫번째 부인


휘빈 김씨는 김오문의 딸로서

문종이 임금이 되기전 세자로 있을 때 결혼해 세자빈이 되었다.

세자나이 14살에 4살연상인 18살이였다


세자빈 휘빈 김씨는 요즈음 말로 미모의 육체파 스타였으나

세자(문종)는 궁녀들과 바람을 피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부인하테 관심이 없어서인지 하여간에 세자가 부인을 멀리하였다.


그래서 휘빈 김씨는 세자의 마음을 자기에게

되돌리고자 남편의 바람을 잠재우는 방법을

비서(시녀)들과 연구하게 되었다.

연구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첫 번째
세자가 좋아하는 궁녀의 신발을 훔쳐다가 그 신발을 태워

세자가 마시는 술이나 차에 섞어 마시게 한다.

두 번째
교미를 하는 뱀 한 쌍을 잽싸게 잡아다가 가루로 내어 동궁전 뒤뜰에 묻는다,

세 번째
수컷 노루의 고환을 품속에 지니고 다닌다.

이상과 같은 방법을 시행하면 바람피우던 세자는

바람을 피우지 않게되여 반드시 빈궁한데만 온게 된다는것이였다.

예나 지금이나 이러이러케 하면 좋다더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궁내에 알려지자 말많은 대신들이 들고 일어났다.

장차 이나라의 국모가 되실분이 이렇듯

질투가 심하여 이런 해괴한 일을 행하였음은

용납할 수가 없다고하면서 폐서인 하라고 난리를 쳐댔다.

전하!

며느님을내 쫒으셔야 됩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점잖키로 유명한

세종대왕 내외분은 하는수 없이 첫째 며느리인

휘빈 김씨를 사가로 내쫒고

빈궁의 지위를 박탈하고

휘빈 김씨의 아버지 김오문의 벼슬도 박탈해버렸다.

이 당시 김오문은 세종의 사돈이 되면서

삼군부 도총재의 관직에 있었는데 성미가 괄괄하고

대쪽처럼 곧기로 이름이 난 사람이였다.


세자빈에서 쫒겨온 딸을 보고 충격 받은

김오문은 부인과 딸과 같이 자결을 해버린다.


자식 잘못둔 죄는 부모에게도 있다며

부인과 딸과 같이 자살을 한것이다.

세자한테 시집보낼때는 큰복인줄 알았으나

복이 화가 되여 딸과 부인과 함께 죽게되는 엄청난 화가 된것이다.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것인데

부모와 딸이 모두 자살한것은 너무 한것같다.

문종의 두번째 부인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세자는 3개월만에

두 번째로 세자빈을 맞아들이는데 순빈 봉씨이다


종부소윤 봉려의 딸로 세자와는 동갑이였다.

세종은 나이가 위이고 육체파인 큰며느리
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몸집이 작고 유약한 새며느리를 간택하였다.

세종은 첫 번째 며느리인 폐빈 김씨가

육체파 미인으로 정열이 넘쳤기 때문에

아들이 비실비실 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며느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몸집이 작고 유약한 듯이 보였지만 사실은 엄청남 색광이였다.

순비봉씨는 온화한 세자와는 달리 봉씨는

직선적이고 다혈질에 성질이 작난이 아니였다.

세자저하! 왜 저를 멀리하시나이까

그러다 보니 세자와 순빈봉씨는 사이가 멀어져갔다.

보다못한 세종내외가 나서서 중재를 나섰지만

시부모가 나선다고 부부간의 일이 해결될 리가 없었다.


거기다가 결혼한 다음해에

권.홍.정씨등 3명의 후궁까지 들어왔다.

후궁으로 들어온 권씨는 세자와의

사이에서 딸까지 낳았다.

바로 단종의 누나를 낳은 것이다.


당시 권씨는 회임을 하자 종2품

(세자의 후궁들은 종2품이 가장 높았다.)

품계를 얻었고 홍씨는 종 4품품계를 얻었다.

홍씨는 문종이 살아생전에 종2품 귀인이 되고

단종조에는 혜빈 양씨(단종의 유모. 맨아래 설명참조)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훈구세력들이 홍씨에게 정1품 빈의

품계를 내려줄 것을 단종에게 간언하였다.

그녀는 숙빈 홍씨가 된다.

다른 후궁정씨는 일찍 죽었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 되자 봉씨 성격에 완전 미치고 팔짝뛰게 되었다.

남편 만나기도 쉽지않고

젊은 나이에 독수공방으로 밤을 지새우자

외간남자를 엿보는가 하면 술을 진탕마시고 술주정도 부린다.

세자가 자주 방을 비우자 독수공방하던

순빈 봉씨는 홧김에 오입한다고

이름도 이상한 소쌍이라는 시비와 동성애를 하게 된것이다.

소쌍

기록에 의하면 동성애를 시작한후부터는

동성애에 푸욱 빠져 이때부터는

오히려 세자가 올까봐 전전긍긍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된 동기가 재미나는데

동성애인 소쌍과 술시중을 드는 시비가

서로 자기가 봉씨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사랑 쟁탈전으로 싸우다가 들켰다고 한다.

순빈 봉씨의 동성애 사실이

궐내에 퍼지자 궐내가 발칵 뒤집혔다.

요즈음 말로 매일 신문 방송에 톱뉴스가 되였던것이다.

전하! 이번 며느님도 또 내 쫒으셔야 되겠습니다

통촉하여 주십시요. 전하

대신들이 들고 일어났다.

장차 이나라의 국모가 되실분이

이렇듯 해괴한 동성애를 행하였음은

용납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폐서인 하라고 또 난리를 쳐댔다.

결국세자빈 봉씨는 폐서인이 되어 내쫒기게 된다

세자빈 봉씨는 서인이 되여 소복을 입고 대궐을 나왔다.

경복궁 중전으로 들어가 시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드리려 했으나

소헌왕후는 크게 노하여 일언지하에 뿌리쳤다.

폐빈 봉씨는 그래도 일루의 희망을 걸어보았으나

중전이 하직인사 조차 받지 않는 것을 보자 그만 체념해 버린다.


한편 폐빈 봉씨가 친정집에 이르자

그 친청집에서는 몇 해전 김오문의 집에서 일어났던 참상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울음소리가 지붕마루를 들썩이고

봉씨의 어머니가 딸을 얼싸안는다.

폐빈 봉씨는남자와 동침한것도 아니고

시녀와 함께 잠자리에 든것뿐이라며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이 추호도 없는지라

이를 지켜보던 그의 아버지 봉려는 자기 딸이 미운 생각이 들었다.

저토록 자신의 죄를 회개할줄 모르니

멸문지화를 당함이 마땅하구나.

한심한 일이로다.이때 봉려의 나이 육순이였다.

그는 일찍이 음보로 사헌부의 감찰에 올랐다가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면서

출세의 길이 열려 지금은 지돈녕부사의 관직에 있었다.

봉려는 자기의 허리띠를 딸에게 풀어주며 말했다.

새 세상에서나 부디 잘살아라.

다시 태여날때는 남자로 태여나거라.


딸이 숨을 거두자 봉려는

딸의 시신을 단정히 수습하여 눕히고

옷깃을 가다듬은 다음 북향사배하고 자신도 자결했다.

문종의 세 번쩨 부인

권전(權專)의 맏딸

현덕왕후(顯德王后).


단종은 모두 잘알고 있지만

단종의 아버지인 조선 제5대임금 문종의

몇째부인의 아들인지는 잘들 모르고 있다.


사람 팔자는 알수없다고

앞의 2명의 세자비들이내쫒겨 죽는바람에

권씨는19살의 나이로 생각지도 못한 세자빈의 자리에 오르게 된것이다.

거기다가 세자나이 27살 결혼한지 무려 13년만에

첫아들 왕자까지 낳으니 세종내외는 손자를 안아주며

춤을 덩실덩실 추며 죄인들을 대사면 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권씨(현덕왕후(1418-1441)는

단종(端宗,1441-1457)을 낳고이틀만에

23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정말로 하늘도 무심하시지 않은가! 너무나 애석하다.

역사란 가정이 있을수없다고 하지만

만일 현덕왕후가 죽지않았다면

당연히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며

세상을 호령했을것이고 따라서단종의 비극도 없을텐데 말이다.

당시에 현덕왕후는안산의 소릉에 묻혔다.


단종 복위사건에 의해 1457년(세조 3) 추폐되었다가

1512년(중종 7) 복위되어 다음해 봄 문종이 묻혀 있는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6-3번지 동구릉 안에 있는 현릉으로 이장되었다.

이렇듯 세종의 며느리(아들 문종의 부인)들은

3명 모두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자살해죽거나

병으로죽게되였으니

세종은 며느리 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종하고 결혼만 했다하면

젊은 나이에 모두 저승길로 갔으니

말하자면 문종은 저승사자인 셈이였다.


단종의 어머니 권씨(현덕왕후)가 이렇듯

단종을 낳고 이틀만에 죽었는데

훗날 단종이 임금이 된후 시동생인 세조가 단종을 죽이자

세조의 꿈에 나타났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세조는 심한 부스럼을 앓고 있었는데

그 부스럼의 원인이 현덕왕후가 뱉은 침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으아 . 형수님 침 밷지 마세요!

세조가 잠을 자고 있는데

꿈 속에서 권씨가 나타나 그를 꾸짖으면서

"내 아들을 죽게 했으니 네 놈을 비롯한

네 놈의 자식들의 명줄을 끊어놓고 말테다."라고

저주하며 그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고 합니다.

그 후로 세조는 부스럼병이 더욱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세조의

큰아들 덕종(1438-1457.성종의 아버지)도

19세의 나이에 일찍죽고
둘째아들 예종(1450-1469)도 19세의 어린 나이에 일직 죽습니다.


예종이 일찍 급살당한 이유가

예종의 꿈속에도 현덕왕후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또한
손자며느리인 한명회의 딸이자

성종(세조의 손자)의

첫번째 황후인 공혜왕후 한씨의 경우에도

죽기 전에 단종의 어머니를 봤다고 하죠.



말하자면 단종의 어머니가 저승사자였던것이다.

세조가 쿠데타를 일으켜

단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게 된 동기를 되돌아보자

수양대군

세조의 형인 문종이 죽고나자 순서에 의해

임금이 된 나이어린 단종은 정승들의 황표정치를 하였다


단종은 모두 알다시피

아버지 문종이 죽자 12살의 어린나이에 임금이 되였다.

하지만 단종은 12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왕실에는 수렴청정 해줄 어느 누구도 없었다.

문종은 자신이 병약하고

세자가 나이 어린 것을 염려하여

황보 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자신이 죽고 난후

세자(단종)가 왕이 되거던 잘 부탁한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황표정치를 하게 되었다.

문종의 어필

아버지 세종을 그대로 닮아 성실하고 학문이 깊었다


황표정치란 황색표시 정치란 뜻으로

신하를 뽑을 때 세 정승이 노란색

동그라미를 그려 놓은 사람을 뽑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문종에게 고명을 받았던 황보인과 김종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 결과 어린 단종임금은

황표에 적힌 대로 승인만 해주는

형식적 위치에 놓여

왕권은 유명무실화하고 대신들이 나라를

실질적 운영하는 재상정치가 나타나게 되었다.


김종서

수양대군

내증조할아버지 이성계임금과

할아버지께 태종임금께서 세운나라인데

김종서 황보인 이사키들이 정말 황표정치로 제멋대로 정치하네, 아 열받는다.


황보인과 김종서는 자신의 반대세력인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해 안평대군을 대항마로 내세웠다.


동시에 왕실인사들의 집에 사람들이 출입을

못하게 하는 분경을 실시해 수양대군의 세력을 꺾으려고 했다.

수양대군

증조부 이성계가 세운 조선의 국사를

대신들 멋대로 정치를 하자 문종의 아우 수양대군이 열받은 것이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이른바 패륜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계유정난을 일으킨 직접적인 이유는

김종서를 비롯한 대신들이 '황표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나이 어린 단종을 왕으로 옹립해 놓고

나라의 정사를 저희들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평대군과 고명대신들의 견제 속에서

수양대군은 잠시 권력에 대한 야망을 참아야만 했다.

한명회


그런 와중에 한명회라는 존재는

수양대군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따지고보면 한명회가 없었다면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이나 왕위 집권은 불확실했을 것이다.


훗날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는

남편인 영양위 정종이 수양대군 무리들에게 억울하게 사사당하자

공주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관노 신세가 되었다가

세조가 조카딸을 측은하게 여겨 관노 신분에게 해방시켜 주었다고 한다.

경혜공주는 관노가 되었으면서도

공주 특유의 당당함과 기품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애지중지 아가 단종을젓먹여 키운죄로

세조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비운의 여인이다

혜빈 양씨(惠嬪 楊氏) 1456년 11월 사망


혜빈양씨는 세종(世宗)의 후궁이자,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의 어머니이며 단종의 유모였다.

(할아버지의 후궁이므로 단종 의 작은할머니가 된다)

내명부(內命婦)의 궁인이였으나 지병으로

병약한 문종을 보살피던 중 세종의 눈에 들어서

후궁이 되었고 첩지를 받아, 정1품의 빈에 오른 후 혜빈이라는 칭호를 하사 받게 된다.

첫째 아들 한남군과 둘째 수춘군, 셋째 영풍군을 자식으로 두었다.

그녀가 영풍군을 키우고 있을 때

당시에 세자빈이 단종을 낳은 후 이튿 날 갑자기 죽게 되자
세종은 문종에게 알려 경혜공주와 단종을 혜빈에게 맡기도록 했다.


혜빈은 기뻐하며 자청했고 단종과 경혜공주를 극진히 보살폈다.
특히 직접 기른 단종에게는

더욱 지극한 사랑을 주었으며 단종 또한 혜빈의 품에서 잠들기를 늘 원했다.


왕이 되어서도 단종은 혜빈의 처소에서

숙하는 것을 희망했으나 수양이 모사를 염려하여 가로막았다.

그 후 왕위에 오른 문종(文宗)이 재위 2년여만에 죽고

12살의 단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 때 산에 있던 혜빈이 다시 궁으로 들어오게 되어

단종을 보필하던 중 세력을 염려한

수양이 문종의 후궁인 홍 귀인의 작위를 높여

단종을 보필하게 하므로 혜빈은 더 이상 단종을 보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종이 찬탈을 당하고 수양대군이 보위에 오르자,

혜빈 양씨는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여

세조에게 옥새가 건네지는 것을 성삼문과 막으려 한 죄로

셋째아들 영풍군과 함께 청풍으로 유배보내졌다.


혜빈이 유배된 그 해 11월,

세조에 의해 교수형을 당해 사망하였다.

아들 영풍군도 곧 살해당하였고,

한남군은 금산 1457년 10월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사후 복권되어 문혜(文惠)의 시호가 내려졌다.


위의 사진들은

글을 설명하기 쉽게 하기 위해 대왕세종등에서 빌려온 것이고

글의 내용은청아출판사 이야기한국사를 공부하며 참고로 편집한 글입니다

- 편집자 유유자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