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3(성읍민속마을)
성읍민속[城邑民俗]마을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表善面) 성읍리(城邑里)
1984년 6월 7일 중요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유형·무형의 여러 문화재와 옛 생활의 자취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1423년 이곳에 현청(縣廳)이 들어선 이래 한말까지 약 5백년 동안 정의현(旌義縣) 소재지 구실을 했으며 마을에는 성곽을 비롯하여 동헌으로 쓴 일관헌(日觀軒)과 향교에 딸린 명륜당(明倫堂)과 대성전(大成殿)이 남아 있다.
성곽의 크기는 객사 대문을 중심으로 지름이 대략 250보(步)이며 성곽은 가로 60첩(堞), 세로 50첩 규모로 세웠다. 살림집은 대체로 안거리와 밖거리 두 채로 이루어지며 ㄱ자 또는 ㄴ자 모양으로 배치되었다.
이들 가운데 조일훈(趙一訓) 집은 중요민속자료 제68호, 고평오(高平吾) 집은 제69호, 이영숙(李英淑) 집은 제70호, 한봉일(韓奉一) 집은 제71호, 고상은(高相殷) 집은 제72호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 천연기념물인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마을 한복판에 있으며 정의향교, 일관헌, 녹나무, 돌하루방, 초가 등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민간신앙도 다양하여 안할망당, 산신당, 상궁알당 등이 남아 있어 읍민들이 받들며, 동제인 포제때 목동신을 더불어 모신다. 걸궁민속도 근래까지 전승되었다.
성읍민속마을 정의현성 남문앞에서
기록에 의하면 원래 정의현청은 태종(太宗) 16년(1416) 안무사(安撫使) 오식(吳湜)의 건의에 따라 성산면(城山面) 고성리(古城里)에 정의성(旌義城)을 축성하였었으나,
현청이 동쪽에 너무 치우쳐 행정상 불편할 뿐아니라 태풍의 피해가 잦고 또한 우도(牛島)가 가까이 있어 왜적(倭賊)으로 부터의 침입이 빈번하였으므로 안무사 정간(鄭幹)이 건의하여 세종(世宗) 5년(1423), 당시 진사리(晋舍里, 현 표선면 성읍리)로 현청을 옮기게 되었다 합니다.
따라서 일명 진사성(晋舍城)이라고도 불리었던 정의성(旌義城)은 축석을 시작한지 불과 5일만에 세종(世宗) 5년 정월(正月)13일에 총 둘레 2,986尺, 높이 16尺의 규모로 완공되었는데, 성에는 동서남으로 세 개의 문을 두었고 성안에는 두 곳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읍치(邑治)로서의 정의성은 축성 초기에는 어느 정도의 가호(家戶)를 포괄하였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숙종(肅宗) 28년(1702) 이형상(李衡祥) 목사(牧使)의 탐라순역도(耽羅巡曆圖)에 의하면 당시 민가(民家) 호수(戶數)가 1,436호, 전답(田畓)이 140결(結), 성수비군(城守備軍)이 664명(名)말 1,178필(匹), 흑우(黑牛)228수(首)를 보유할 정도의 상당히 번성하였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순조(純祖)26년(1826)에는 성안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민가 80여동이 소실되는 재난을 겪은 적도 있었으나, 군(郡)으로 승격되어 군수(郡守)를 두게 되면서 성읍은 제주목(濟州牧)의 관할에서 벗어나 직접 전라도 관찰사의 관할아래 소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주의 지정학적(地政學的) 특성상 불편이 많자 고종(高宗)32년(1895)에는 지방제도 개편과 더불어 제주를 부(付)로 고쳤으며 따라서 목사를 관찰사로 바꾸었고, 판관제도(判官制度)를 참사관제도로 개편하여 군수를 겸하게 하였습니다.
광무(光武) 10년(1906)에는 고종 33년(1896)에 부활됐던 목사제도(牧使制度)가 다시 폐지되어 군수를 두게되었고, 급기야 1914년에 정의군은 대정군(大靜郡)과 함께 제주군에 합병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1423년 이후부터 약 5세기 동안 정의현의 도읍지로 번성하였던 성읍은 평범한 농촌마을로 차츰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1915년 5월 1일부로 제주군제도 마저 폐지되고 도제(道制)가 실시되면서 정의고을이었던 성읍은 한갓 표선면 면소재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지금의 표선면은 1935년 동중면이 개칭된 이름입니다.)
성읍민속마을 정의현성 남문앞에서
성읍민속마을 정의현성 남문 입구에서
성읍민속마을
성읍민속마을
정의현성 남문성곽을 거침없이 혼자 올라가는 신통방통
정의현성 남문위에서 내려다 본 광장
이 광장의 무대에서 각종공연을 한다.
성읍민속마을
성읍민속마을
명랑공주
성읍민속마을 정의현성 남문위에서
민속촌안에는 관광해설해주는 분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다가
관광객들이 오면 해설을 해주고 있다
민속해설자로부터 작은며느리와 채원이가 민속마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성읍리(城邑里) 경내에 개무덤이 하나 있습니다. 이 개무덤에는 매우 영리한 개가 묻혀있다고 합니다.
옛날 성읍리에 사는 어떤 사람이, 살림이 궁해서 서촌(西村) 어느 동네에서 양식을 꾸어다 먹었습니다. 가을이 되어 추곡을 거두어 들이자, 그 빚을 갚으려고 서촌 그 동네로 가고 있었습니다. 들판에는 아직 늦은 추수들이 남아 있었고, 길가 어떤 밭을 보니 메밀을 한창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서촌에 와서 빚을 갚고 서읍으로 돌아가는 길엔 날이 거의 저물고 있었습니다. 일직 메밀을 타작하던 밭까지 이르렀습니다. 메밀을 다 타작하여 사람들은 돌아갔고 집채만큼 쌓인 메밀짚 더미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었습니다. 성읍리의 사람들은 그저 불이 타나보다 생각하여 그 곁을 지나치려 했습니다.
이 때였습니다. 타오르는 연기 속에서 강아지 한 마리가 졸랑졸랑 띄어 나왔습니다. 강아지는 반쯤은 털이 그을리어 있었습니다. 주인이 타작을 할 때, 메밀짚더미 속에서 잠을 자다가 주인이 가는 줄도 모르고 그만 불쏙에 휩싸인 것이 분명했습니다.
강아지는 몸을 털며 이 사람을 따랐고 이 사람은 강아지를 정성스레 길렀습니다. 그런데 이 개가 사냥을 이만저만 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가기만 하면 노루니 사슴이니 한 두 마리 씩은 꼭꼭 잡아왔습니다. 이 개에 대한 소문이 점점 퍼져가던 어느 날 예촌(남원읍 신례리) 사람이라든가 효돈(지금의 서귀포시 효돈동) 사람이라든가 이 개를 팔아 달라고 찾아왔습니다. 몇 번 찾아와도 개 임자는 팔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몇 해 후에 개 임자는 모친상을 당하게 됩니다. ‘부모의 상을 만나면 사냥을 못하는 법이므로 이제야 개를 팔아주겠지’ 생각하고 그 사람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하도 사정을 해가니,
“팔지는 않을 터이고, 그저 데리고 가서 사냥을 시키다가 내 탈상하거든 돌려 보내시오.” 하고 주었습니다. 그 대신 사냥을 하거든 뒷다리 하나씩을 보내줘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개는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개는 역시 사냥을 잘했습니다. 첫 날 사냥을 나가서 노루 한 마리를 잡아 왔습니다. 뒷다리 하나를 베어 내어 성읍의 개 주인에게 보내려고 뒷문에 걸어 두었으나 날이 밝아서 보니, 걸어 둔 뒷다리가 없어졌습니다.
‘이상하다. 다시 사냥을 해서 보내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사냥을 나갔습니다. 역시 잡았습니다. 뒷다리를 또 뒷문에 걸어 두었다가 날이 새어서 보니 없어졌습니다. 몇 번 되풀이해도 개 주인에게 보내려는 고기는 꼬박꼬박 없어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직접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노루와 사슴이 한 마리씩 잡혔습니다. 사슴은 간수해 놓고 노루 한 마리를 둘러메고 직접 성읍으로 갔습니다. 뒷다리 하나씩을 꼭꼭 보내려고 했는데, 자꾸 잃어버려 못 보냈다고 사과했습니다.
“어, 난 벌써 먹엄서(먹고 있네).”
개 주인은 매일 고기를 받아 먹었다는 것입니다. 개가 꼬박꼬박 뒷다리를 물어다 준 것이었습니다. 감탄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삼년상이 끝나 개 주인이 탈상하는 날, 가라오라 말도 없이 개는 주인에게 가 버렸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주인이 병이 들었습니다. 병은 점점 무거워져서 주인은 꼬박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일어날 수 없게 되자. 개는 주인 방의 창문 밖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정말 꼿꼿이 앉아서 밥도 아니 먹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주인의 임종을 지켜 보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오래 굶어선지, 너무 슬퍼해서인지 주인이 죽자 개도 같이 죽어 버렸다. 개 임자 친족들이 너무나 기특하다 하여, 그 개를 주인의 묘소 옆에 같이 묻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개무덤’이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옛날 정의현(旌義縣)에 ‘어진 고 형방’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형방이면서도 남달리 성품이 어질고 인자한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고 형방이 살았던 시대에는 양민이나 관군들이 마음 놓고 산길로 나들이 할 수 없을 정도로 도적떼들이 온 섬 안에 득실거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정의 관군들은 영문(營門 : 지금의 제주시)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면 산길을 다녀야 했고, 그 고을의 양민들은 춘궁기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서 한라산 넘어 먼 마을까지 가서 쌀을 빚져다 먹어야만 했던 때였습니다.
이럴 때마다 산길을 다니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골칫거리는 도적떼들이었습니다. 도적떼들은 산길 가까이에 있는 굴에 살면서 오고 가는 양민들이나 관군들까지 잡아다가 쌀과 돈을 털어먹어 버릴 뿐만 아니라 저항하였을 때에는 잡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제주섬에 온통 흉년이 들고 말았습니다. 도적떼들은 더욱 득실거렸습니다. 먹고 살기 위하여 도적이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의현에서는 이만저만 걱정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여러 관원들이 모여 앉아 대책을 숙의했습니다. 대부분의 의견은 관군들이 모두 산으로 올라가서 도적떼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획대로 일은 잘 진행되었습니다. 관군들이 한 소굴을 찾아 습격하고 보니 도적떼들이 삼십여 명이나 모여 있었습니다. 모조리 결박해다가 하옥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내일은 모조리 죽여야 할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밤이었습니다. 삼경서부터 고 형방이 옥문을 감시할 시간이었습니다. 고 형방은 아무리 도적들이지만 목숨을 죽이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슬그머니 옥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도적떼들은 숨소리마저 죽이고 모두 고 형방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너희들, 내가 이 옥문을 열 테니 이 솜으로 내 입을 틀어막고 이 기둥에다 나를 잡아 묶어라. 밝는 날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묶어두고 도망쳤다고 이를테니, 어서! 너희들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이 길밖에 없다!”
도둑놈들은 고 형방의 명령대로 솜으로 입을 틀어막고 손목을 기둥에다 틀어묶은 다음 무사히 옥문을 빠져 나갔습니다.
새날이 되었습니다. 모든 아전들이 원님 앞으로 모이기로 되어 있는데 고 형방만은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인고!”
현감의 호통이 터졌습니다. 여러 형방들과 관군들은 옥으로 달려갔습니다. 도적떼들은 고 형방을 묶고 모두 도망쳐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몇 년이 흘렀다. 정의 고을에서는 제주목에 급한 장계(狀啓)를 가지고 가야 할 일이 생겼다. 모두들 꺼려하는 눈치였습니다. 도적떼들이 무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불쑥 나타난 것은 고 형방이었습니다.
“음, 도적떼들에게 들키지 말고 조심히 다녀오도록 하려무나.”
현감의 말씀이 떨어지자 곧 고 형방은 산길을 따라 제주목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깊은 산길에 접어들어설 즈음이었습니다. 부대오름(峰) 옆을 지날 무렵에 불쑥 한 무리가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아, 잘 만났구나!”
고 형방은 도적떼들에게 붙들려 굴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굴 입구에는 두 도둑이 창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초병인 것 같았습니다.
굴 안으로 막 들어설 즈음이었습니다. 도적 두목인 듯한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의젓하게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그 두목의 눈동자가 휘둥그래지기 시작했습니다. 슬며시 고 형방 앞으로 나오더니 손목을 잡고 상석으로 모셔 큰절까지 올렸습니다.
“어진 형방 어르신님을 저희 부하들이 몰라 뵈어 이렇게 박접했아오니 용서하옵소서.”
도적의 우두머리는 어진 고 형방을 상석으로 모셔 놓고 여러 가지 음식은 물론 주안상까지 풍성히 차려 대접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생명의 은인에 대한 극진한 대접이었습니다. 고 형방은 하룻밤을 도적들과 그 소굴에서 같이 보냈다.
날이 밝자 두목은 여러 부하들에게 고 형방님을 제주목까지 잘 모셔 다녀오라고 지시했습니다. 다른 도적데들에게 붙들려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진 고 형방은 도적떼들로부터 호위를 받으며 제주목에 도착하여 소임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올 때도 도적떼들로부터 호위를 받았습니다. 두목은 산길까지 마중나와 어진 고 형방을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굴속으로 모셔다가 후하게 대접했습니다.
어진 고 형방이 정의 고을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두목은 고 형방에게 집에가서 반찬이라도 하십사고 자루 가득 쇠고기를 싸주었습니다.
어진 고 형방은 굴 밖으로 한참 나와서는 두목으로부터 받은 소고기를 모두 내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불쌍한 양민들로부터 도둑질해 온 것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로 아무리 죄가 많은 도둑놈들이라지만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여 모두 살려보내 버린 고 형방만이 정의고을의 모든 장계를 제주목까지 가져가게 되었고, 그 고 형방을 두고, ‘어진 고형방’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날씨가 엄청더워 신통방통은 할머니와 차안에 있습니다
봉 3개가 다 내려져있으면 언제라도 들어와도 된다는 의미랍니다.
봉이 하나 올려져 있으면 가까운 곳에 외출한 거고,
두개 올려져 있으면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때 들어온다는 뜻이랍니다..
-- 해설 작은며느리 --
천연기념물 161호
1000년 수령의느티나무
팽나무의 전설!
성읍리 마을 복판에는 큰 팽나무가 있는데, 그 수령은 천년이나 됐을 것이라고 합니다. 워낙 오래된 나무여서 속이 텅 비어 있으며, 그 속에 고인 물은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눈병에 특효약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에서 순이 먼저 나는 방향을 보고 점도 치곤 해왔습니다. 동서남북 중 제일 먼저 순이 나기 시작하는 방향의 동네에 풍년이 들게 되고, 나무 가운데에서부터 순이 돋기 시작하면 성읍리 전체가 풍년을 맞는다는 속신(俗信)도 전합니다.
지난 날 이 마을이 현청(縣廳) 소재지였을 때 김면수라는 현감이 부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출이와 유득이라는 두 아들과 금전이9또는 북돋이ㆍ유행이)로 불리우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날 김씨 현감은, 느티나무 가지가 너무 뻗어 현청에 드는 햇빛을 가린다고 하여 그것을 잘라 버렸는데, 그 동티로 인하여 딸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는 이 나무에 함부로 손을 대려는 사람이 없어 오늘날에는 천연기념물 제161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일관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809-1
정의 현감이 정사를 보던 곳으로 지방문화재 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여러차례의 보수를 거쳤으며 지금의 건물은 1975년에 새롭게 단장한 것입니다.
이곳은 성읍리 거리 한복판에 천연기념물 161호인 느티나무와 마주하여 의젓이 서 있습니다. 그 울타리에는 천연기념물인 소나무 몇그루가 운치있게 서 있고, 건물이 단아한 모습은 현대들어 여러차례 보수가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옛스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마을의 균형이 잘 잡히길 기원하듯 원의 중심을 이루어 한결 운치를 돋굽니다.
그리하여 제주도 지정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고, 이어 1984년 6월에는 총 1,425필지 3,191.711㎡의 면적이 중요민속자료 188호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었으며, 1978년 9월에는 보호구역이 935필지(790.747㎡)로 약간 축소 조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서귀포 칠십리
바닷물이 철석 철석 파도 치는 서귀포
진주 캐는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휘파람도 그리워라 콧노래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황혼이 온다
금비늘이 반짝반짝 물에 뜨는 서귀포
미역따는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은조개도 그리워라 물파래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물안개 졌네
서귀포칠십리의 유래
서귀포칠십리'가 국내에 널리 알려진 직접적인 동기는 1938년에 조명암씨에 의해 「서귀포칠십리」가 노랫말이 지어졌고, 박시춘 작곡, 남인수의 노래로 불려지면서 부터입니다.
당시 일제치하에 억눌려 살았던 국민들에게 끝없는 향수와 애틋한 그리움을 이끌어 내면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서귀포칠십리'의 사실기록은 1416년(이조시대 태종16년) 안무사 오식에 의해 제주도 행정구역이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으로 나누어 지게 되었으며, 1423년(세종 5년) 안무사 정간에 의해 정의현청(고성)이 현재의 표선면 성읍마을로 옮겨지면서 70리의 거리적 개념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1653년 제주목사 이원진에 의해 발간된 『탐라지』에 의하면, 서귀포는 정의현청에서부터 서쪽 70리에 있으며, 원나라에 조공을 바칠 때 순풍을 기다리던 후풍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서귀포칠십리가 처음에는 정의현청이 있었던 현재의 성읍마을에서 서귀포구까지 거리를 알려주는 개념이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서귀포칠십리가 단순한 '거리개념'이 아니라, 제주도민의 마음속에 언제나 안식과 위로, 그리고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이어도'처럼, '서귀포칠십리'라는 의미 그 자체가 서귀포시민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영원한 이상향이자, 서귀포의 아름다움과 신비경을 대변하는 고유명사로 자리잡혀 왔슴니다.
이를테면, 서귀포칠십리는 '서귀포의 뿌리와 정서, 이미지'를 함축한 발전된 개념으로 정착되어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고향'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