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제주-1(용두암)

만정도화(滿庭桃花) 2008. 8. 2. 11:51

22년만에

가보는 제주도 여행

1986.2월! 집사람과 제주도여행을 처음 다녀 왔었다.


이당시는 내가 워낙 바뻣던 시절이라 설날 다음날 겨울에

설연휴를 이용해서 다녀온것이다.개인적으로 택시를 타고 다녔었다.

그러니까이번 제주도여행은 22년만에 가보는 여행이다.

사람도 변하고 제주도도 많이 변했을것이다.

이번 여행은 작은아들 내외가 적극 아버지 어머니 모시고

같이 가고 싶다고 해서 나선 여행이다.

큰아들네도 같이 갔으면 좋았을텐데큰아들이 바빠서 못가고

대신 여행 용돈을 보태 주었다.

그러나 동행을 못한것이 못내 아쉬웠다. 카리스마 손자가 아른거린다.



김포공항행 리무진 버스를 타고 가면서 바라다 본 한강

저멀리 서울의 이정표인남산타워가 보인다.

서울의 맑은 하늘!

서울의 하늘이 이렇게 맑으니 가슴도 후련하고 기분도 상쾌하다.



올림픽 도로를 달리면서 펼쳐지는 서울풍경!

올림픽대로의 역사

1982년 9월에 착공하여 1986년 5월에 완공하였다.

총 1412억 원을 들여 암사동∼성산대교(城山大橋) 간

기존 강남도로 4차선을 8차선(29m)으로 확장하였고,

성산대교∼행주대교 간은 제방을 쌓아 그 위에 6차선 도로(17.4m)를 만들어,

도로 이름을 올림픽대로로 고쳤다. 1986.5월 개통식한날 하루후에

새도로 답사차 한남대교에서 행주대교까지 갔다오던 생각이 난다.

이 도로에는 국내에서 가장 긴 다리인 2,070m의 노량대교를 비롯하여

염창교(鹽倉橋) ·동작(銅雀)2교 ·청담(淸潭)2교 ·

신천(新川) 2교 등 5개의 교량이 신설되었고,

인터체인지 11개, 지하차도 8개, 지하보도 11개 등

모두 30개의 접속시설이 신설되어,

이를 통하여 강남 ·북의 간선도로와 연결되게 되여있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여의도 63빌딩

63빌딩은 1979년 2월에 건축계획을 세웠고,

같은 해 8월에 설계하였으며, 1980년 2월 19일 기공식을 거쳐,

1983년 10월 15일 상량식 후, 1985년 7월 27일에 개관했다.

1987.1월에 큰아들 법대 합격발표 직후 우리가족이 63빌딩에서

식사를 하고 빌딩 전망대에 올라가 구경하던 생각이 난다.


기본설계는 미국 S.O.M社에서 하였으며,

실시 설계는 박춘명 설계사무소, 시공은 신동아건설(주)에서 실시했다.


안전과 쾌적성을 제고하면서 건물의 미려함과 함께

빌딩관리의 컴퓨터화를 이룩한 63빌딩은 한국, 미국,

일본의 학자 및 기술진이 참여한 국제적 협력작품입니다.



차장밖으로 보이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국회의사당의 역사

우리나라 국회는 초대 제헌국회와 2대 국회는

중앙청 회의실을 임시 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

2대 때는 6·25전쟁으로 거의 피란국회를 면하지 못하다가

1953년 9월 21일 국회가 환도(還都)하면서 옛날 부민관(府民李)을

개수하여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였다.


이 태평로 의사당은 1975년 9월 1일

여의도 의사당이 준공됨에 따라 1975년 7월 9일 회의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 9월 22일 제94회 정기국회를 개원하면서

여의도의사당의 역사가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것이다.

여의도 의사당은 1966년 2월 10일 제6대 국회운영위원회가

의사당건립위원회 규정을 제정하면서부터 건설계획을 수립하였고,

이에 1968년 6월 5일 대지 10만 평을 매입하는 한편, 구체적인 설계를 마련하였다.


건축규모는 의사당 본관 2만 4700평, 도서관 6400평,

의원회관 8800평, 기타 부속건물 2700평 등 합계 4만 2600평이며,

이를 3단계로 나누어 연차계획으로 건축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건축된 여의도 의사당은 웅장한 화강암의

각주(角柱) 24개가 사방에서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으며,

중앙은 반구형의 돔으로 되어 있는 백악전당(白堊殿堂)이다.

일반적으로 국회는 상하 양원제를 채택하는 국가가 많아

의사당은 좌우로 상하 양원용의 회의실을 마련하고,

가운데는 넓은 홀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나,

여의도 의사당은 그러한 좌우대칭형은 아니지만 장차 상원격인 참의원이

생길 경우와 통일된 후의 확대될 국회를 충분히 고려하여 건설하였다고 한다.



난지도

예전에는 난꽃과 영지가 자라던 섬으로, 섬의 이름은

오리가 물에 떠 있는 모습과비슷하다 하여 오리섬 또는 압도(鴨島)라고 하였다.

한강의 북쪽 연안에 치우쳐 있으며 상암동(上岩洞)에 속한다.

최근 자연제방이 도로로 개수(改修)되어 하안과 연결되었으며,

앞으로는 주택구로 개발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보리·채소·땅콩·화훼·버드나무의 묘목 등이 재배되고 있다.

1977년 제방이 만들어진 후 그 동안 서울의 쓰레기 매립지로 이용되었으나,

1993년 2월 완전히 폐쇄되어 생태공원으로 조성 중이다.



난지도

난지도 쓰레기매립장


난지도매립장이라고도 한다.

서울특별시의 마포구에 발달한 범람원 지역인 난지도를

사용해 만 15년간 생활쓰레기 전량과 산업쓰레기의 일부를 매립했다.

면적은 난지도 전체면적 82만 3000평(272만㎡) 가운데

57만 7000평(190만 7000㎡)이다.

매립 방식은 비위생 단순매립이며 생활쓰레기,

건설폐자재, 하수슬러지, 산업폐기물 등이다.

처음에는 국제적인 매립장의 일반 높이인 45m까지 매립할 계획이었으나

새 수도권매립지의 건설이 늦어져 계속 쌓아나갈 수밖에 없어

세계에 유래가 없는 95m 높이의, 윗부분이 편편한 쓰레기산(山) 2개가 생겨났다.

이렇게 쌓인 쓰레기양은 8.5t 트럭 1300만 대분인 9197만 2000㎥에 이른다.

1980년대 후반 매립지가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악취·먼지 공해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자 인근 주민들이 민원이 이어지기도 했다.

1991년 김포수도권쓰레기매립지가 조성되어 쓰레기

반입이 중단된 이후 메탄가스와 침출수(浸出水) 등으로 환경이

악화되어 생물이 살기에 부적합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자 수풀이 자라면서 곳곳에서

각종 동·식물이 발견되는 등 생태계가 되살아나는 것이 확인되었다.



난지도

난지도 쓰레기 산을 폐쇄 이후 환경오염의

방지를 위한 안정화 공사가 2020년까지를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1차로 1996년 12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메탄 등의

발생가스를 처리하기 위해 가스 추출공(抽出孔)과 소각시설을 설치하고

또 한강으로 침출수가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차수벽과 침출수 집정소 및 침출수 처리장이 설치되었다.

매립지에서 발생하는 가스의 배출량은 조사결과

하루 34만 4000㎥로 이중 절반인 17만 2000㎥의 메탄가스를 추출,

2017년까지 안정적인 에너지원으로 활용 가능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2020년 이후 각종 구조물을 세울 터로 개발되기 전까지

생태공원이나 골프장 등을 조성하여 활용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



가양대교

김포공항


1975년 김포국제공항에서의 그때 그시절!

내가 일본으로 출장가던날 공항으로 전송나온 우리가족

뒷줄 좌로부터 동생내외, 아기 승길, 그리고 집사람

앞줄 좌로부터 어머님 그리고 어린이는 승진 승인이다

내가 촬영했기 때문에 나는 안보인다

김포공항의 역사


우리나라 항공사(史) 자체이기도 한

김포공항에는 국력의 성장과 국민의 애환이 고스란히 서려 있다.

김포공항은 1939년 일본군이 가미가제 특공대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1,317m의 활주로를 건설하면서 태어났다.


해방후 군용공항으로 쓰이다가 지난 1958년 국제공항으로 탈바꿈했다.

1969년 3월에는 대한항공이 출범함으로써 민간항공시대가 개막됐으며

1988년에는 제2 민항인 아시아나항공의 탄생으로 복수 민항시대가 열렸다.

초창기에는 해외여행이 어려워 해외입양아나 일부 특수계층만 이용하였다.

1960년대의 경우 국제선이 1주일에 2, 3편뿐이어서

비행기를 놓치면 길게는 1주일이나 기다려야 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서독 광원과 간호사,파월장병,중동근로자 등이

주류를 이루면서 공항청사 옥상에는 송영대가 마련돼 가족·친지들이

이륙하는 항공기를 향해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다.

1968년말 죽마고우인 강 신봉이가 카나다로 이민떠날 때

내가 신봉이 형님등 가족들과 함께 송영대에서 이륙하는

비행기를 쳐다보며 손을 흔들며 눈물 흘리던 생각이 난다.

1975년 내가 회사 업무차 처음으로 일본 출장을 가고 올 때

어머님과 집사람,승진,승인 그리고 동생과 계수씨가 승길이를 업고

김포공항까지 나오셔서 환송, 환영해주시던 생각이 난다.

이 당시는 해외에 나간다는 것이 어렵던 시절이라 온가족들이 공항에 나왔었다.

1980년대에는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 등을 치르면서

해외관광객을 맞이하는 관문역할은 물론 경제성장에 따른 수출화물을 실어나르는 전초기지 역할도 했다.

1990년대 들어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후 해외여행객이

비약적으로 늘어나 1997년에는 여행객이 3,650만명을 기록, 김포공항이 전세계 9위 공항을 차지했다.

이같은 급격한 여행객 증가는 김포공항의 포화상태를 가져와 인천신공항 건설로 이어지게 된것이다.




1975년 김포공항에서

내가과장으로 근무할 당시 일본 출장 다녀 오던날

김포공항으로 마중나온 우리가족과 직원들!

좌측 우리내외와 어머님, 어린이는 승진 승인

우측의 두사람은 나를 마중나온 회사직원이다

나를 이세상 최고의 아들로 사랑해주셨던 어머님은

비행기 타고 여행 한번 못해보시고

1년후(1976) 하늘나라로 가셨다.

여행 한번, 자가용 한번,

태워드리지 못한 생각을 하면 또 눈시울을 적신다

.

재롱부리며 우리내외를 기쁘게 해줬던우리 어린 아들 형제는

무럭무럭 자라 우리나라의 훌륭한 인재로 자랐고

힘차고 패기 넘치던우리 내외는 이제는 노인이 되였다.

감개무량!

오늘날은자식들 덕분에 효도여행을 가고 있으니참으로 감개무량하다.

세월은 달리는 말처럼 참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김포공항 출국 수속중!

집에서 인터넷으로 비행기좌석까지 예약되는 참 좋은세상이다.



할머니와 명랑공주 손녀



공항대합실에서



모든것이 신기한 신통방통

아기때 비행기 타본것은 모르기 때문에 처음으로 보는 바깥 풍경에 환호성을 지른다




김포공항 이륙후 신통방통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



신통방통이 바라다 본 김포공항 상공


신통방통이 바라다 본 김포공항상공



신통방통이 바라다 본 김포공항상공



신통방통이 바라다 본 김포공항상공



신통방통은 눈아래 펼쳐지는 풍경이 보일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넋을 잃고 바라다 보았다.



이제 창문을 닫고 대한항공에서 제공하는 음료수 한잔을 마신다



여유만만한 신통방통 손자!

할아버지! 이젠 안전벨트 풀어도 되죠?



작은아들 내외

고맙다^^ 너희들 덕분에 아버지 어머니는 행복하다.


듬직한 작은아들내외



아니 벌써 제주도 공항이라네..

신통방통은 또 넋을 잃고 제주도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제주도 공항 도착기념







제주공항 도착 기념!

렌트카 도착을 기다리면서





맨처음 여행지는 제주공항 근처에 있는 용두암이다



용두암 전망대에서!

작은아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해지는 제주앞바다를 바라다 보고 있다



신통방통! 딴데 쳐다보지말고 할아버지를 쳐다봐라!


귀여운 제스쳐

용두암은 제주시 용담동 해안에 있는 기암으로 용두암은 해안가의 바위다.

마치 용이 고개를 치켜들고 막 솟아오를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용두암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 바위는 화산폭발로 인해 생성된 용암이 굳은 화산암이다.



작은며느리가 찍어준 사진!

1시방향이 용두암이다




명랑공주 사진 찍어주기에 바쁜 작은며느리



작은아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용두암 전망대에서



우리내외가 1986년도에 왔을때는 아무시설이 없었는데

지금은 전망대며 계단이며 시설들을 잘꾸며 놓았다.


용두암 전망대에서

신통방통은 사진 촬영에는무관심^^



밤에 본 용두암

밤에 보니 용이승천하는 모습같다




제주도 오면 물항식당에서 참치조림을 꼭 먹어봐야

갈치조림 참맛을 알수있다는 물항식당이다.

작은며느리가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로제주도 도착 첫식사로 물항식당을 찾았다



우리는 서서 대기중

사람들이 바글바글 손님이 많다.



물항식당 프론트에 게시된 사진

2006 노무현 대통령과 2004 고건 총리가

식사했다는 식당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아주 유명해졌다고 한다.



갈치조림 30,000원 다른 식당보다 약간 비싸편이다




갈치조림(사진.우)을 식구들이 잽싸게 한토막씩

가져간후 내가 먹을 갈치조림한토막만 촬영했다.

보기에는 그저 그렇지만 양념 맛이 좋았다.

아주 맛있게 먹었다. 또 먹고 싶다.^^




물항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나니 날이 어두졌다.



한밤중에 초행길

길안내를 똑소리 나게 해준 X-Road 네비게이숀에게 감사한다.



저멀리 12방향으로 우리가 1박할 팬션 마을이 보인다



제주도에서 첫날 숙박한 팬숀

제주도성산시 수산동 3988-3번지

성산 아일랜드 팬숀

서귀포 칠십리

바닷물이 철석 철석 파도 치는 서귀포
진주 캐는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휘파람도 그리워라 콧노래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황혼이 온다

흰비늘이 반짝반짝 물에 뜨는 서귀포
미역따는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은조개도 그리워라 물파래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물안개 졌네

서귀포해안 [西歸浦海岸]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호근동 일대에 펼쳐진 해안경승지이다. 서귀포해안은 푸른 바다와 기암절벽, 폭포, , 항구 등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경승지이다.

흔히 서귀포칠십리해안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서귀포해안의 길이가 70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서귀포는 조선시대 정의현(현재의 서귀포시 성산읍, 남원읍, 표선면에 이르는 지역)의 현청(현재의 표선면 성읍마을)으로부터 서쪽 70리에 있다<탐라지>의 기록으로부터 비롯된 명칭이라 한다.

1942년 시인 겸 극작가이자 대중가요작사가로도 활동했던 조명암이 서귀포해안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서귀포칠십리라는 대중가요의 가사를 썼고, 이 노래가 유행하면서 서귀포칠십리라는 명칭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서귀포칠십리의 유래


서귀포칠십리'가 국내에 널리 알려진 직접적인 동기는 1938년에 조명암씨에 의해 「서귀포칠십리」가 노랫말이 지어졌고, 박시춘 작곡, 남인수의 노래로 불려지면서 부터입니다.

당시 일제치하에 억눌려 살았던 국민들에게 끝없는 향수와 애틋한 그리움을 이끌어 내면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서귀포칠십리'의 사실기록은 1416년(이조시대 태종16년) 안무사 오식에 의해 제주도 행정구역이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으로 나누어 지게 되었으며, 1423년(세종 5년) 안무사 정간에 의해 정의현청(고성)이 현재의 표선면 성읍마을로 옮겨지면서 70리의 거리적 개념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1653년 제주목사 이원진에 의해 발간된 『탐라지』에 의하면, 서귀포는 정의현청에서부터 서쪽 70리에 있으며, 원나라에 조공을 바칠 때 순풍을 기다리던 후풍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서귀포칠십리가 처음에는 정의현청이 있었던 현재의 성읍마을에서 서귀포구까지 거리를 알려주는 개념이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서귀포칠십리가 단순한 '거리개념'이 아니라, 제주도민의 마음속에 언제나 안식과 위로, 그리고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이어도'처럼, '서귀포칠십리'라는 의미 그 자체가 서귀포시민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영원한 이상향이자, 서귀포의 아름다움과 신비경을 대변하는 고유명사로 자리잡혀 왔슴니다.

이를테면, 서귀포칠십리는 '서귀포의 뿌리와 정서, 이미지'를 함축한 발전된 개념으로 정착되어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고향'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