룽먼석굴 [龍門石窟(용문석굴)
Longmen Grottoes]
뤄양(洛陽):
동방조각예술의 보고 ‘룽먼스쿠(龍問石窟)’
뤄양은 허난성 서쪽에 위치한,
당나라 시대의 이백, 두보 등 예술가들이 가장 사랑했던,
또한 수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해 낸 예술의 본 고장이다.
뤄양하면 역시 룽먼스쿠(龍問石窟, 용문석굴)이다.
둔황(敦煌)의 모가오쿠(莫高窟)와
다퉁(大同)의 윈강(雲崗)석굴과 더불어
중국 3대 불교 석굴로 불리는 룽먼스쿠은
당삼채(唐三彩)·
모란꽃 등과 함께 뤄양이 자랑하는 '3대 보물' 중 하나이다.
북위 효문제가 493년 뤄양으로
이주한 전후 이하(伊河)의 동산(東山)과
서산(西山)에 조성되기 시작해 수·당나라를 거쳐 북송 대까지
400여 년에 걸쳐 완성된 룽먼스쿠에는
현재 2345개의 석굴과 불탑 70여 개, 불상 10만 점이 남아 있다.
불상들은 미신을 믿는 풍속과 문화대혁명시대
홍위병(紅衛兵)에 의해 수 차례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대부분 목이 베이거나 반쪽이 없어져 안타까움은 자아낸다.
그러나 10만 점에 달하는
불상의 표정이 모두 다르고 정교해,
‘동방 조각 예술의 보고(寶庫)’로 불리며
2000년 11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남쪽
약 14km 지점에 위치한 석굴사원.
중국의 불교문화뿐 아니라
빼어난 건축, 조각 예술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국가 중국(China)
지정연도 2000년
유네스코분류 문화
테마분류 고대문명
소재지 Luoyang City, Henan Province
좌표 N34 28 0 E112 28 0
룽먼석굴 [龍門石窟(용문석굴)은
뤄양[洛陽] 남쪽 약 14 km 지점.
당나라의 고종(高宗)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만들기 시작하여 675년에 준공되었다.
룽먼석굴은
뤄양 교외를 흐르는 이허(伊河)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룽먼산(龍門山)과
샹산(香山)의 암벽을 따라 약 1.5km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북위 시대인 5세기 말부터 당나라 때인
9세기까지 2300여 개의 석굴과 벽감(壁龕)이 조성되었고,
내부에 총 10만 점이 넘는 불상,
2800여 개의 명문, 40여 개의 탑이 조각되어 있다.
룽먼석굴은
다퉁(大同)의 윈강석굴(雲崗石窟)과
둔황(敦煌)의 모가오굴(莫高窟)와 더불어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히는 이곳은
특히 예술성이 높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으로 유명하다.
룽먼석굴은
암벽을 따라 벌집처럼 늘어선
크고 작은 굴 안에 불상이나 불탑이 모셔져 있는데,
불상은 10여 미터가 넘는 것부터
수 센티미터에 불과한 작은 것까지 실로 다양한 모습이다.
룽먼석굴은
10만여 점이 넘는 불상 하나하나가
제각기 다른 표정에 뛰어난
솜씨와 멋을 자랑하고 있다니 가관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오랜 세월 방치되면서
훼손된 부분이 많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불상머리를 소장하면 복이 온다는
미신 때문에 머리가 떨어져나간 불상이 특히 많고,
이외에도 도굴단에 의한 불법반출,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한 파손 흔적도 뚜렷하다.
목단석
룽먼스쿠(龍問石窟)에서 제일로 알아주는 목단석이다.
입장권
여기 룽먼석굴의
불상은 머리가 없는 불상이 많다.
불상의 머리를 소장하면
복이 온다는 미신도 한몫했지만
특히 문화혁명때 홍위병들이 무차별 파손했다고 한다.
홍위병이란
1966년부터 1976년 문화대혁명때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조직된
준군사적인 조직으로 대학생 및 고교생 집단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을 지지하며
류사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등의
당 지도자들을 배척하며
중국의 구시대적 문화유산을 제거하고
각지역의 당 지도자들은 물론 교사
및 학교 지도자, 지식인,
그리고 전통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공격하고 박해하며 수십만 명을 처형시켰다고 한다.
펑셴쓰(奉善寺)의 대형 비로자나불
룽먼스쿠(龍問石窟)’의 하이라이트이다
10만 점이 넘는 불상 중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펑셴쓰(奉善寺)의 대형 비로자나불을 들 수 있다.
폭 35m 석굴 안에 있는
대불은 전체높이가 17.4m에 이르며, 귀 길이만도 1.9m나 된다.
펑셴쓰(奉善寺)의 대형 비로자나불앞에서
수려한 용모에
인자한 웃음이 인상적인데,
건축자금을 대면서 남다른 애정을 보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펑셴쓰(奉善寺)의 대형 비로자나불에서
펑셴쓰(奉善寺)의
대형 비로자나불에서
룽먼스쿠(龍問石窟)’의 하이라이트
용문석굴 정문
용문석굴 정문에서
이허(伊河) 강
역사공부
이허(伊河) 강에서
용문석굴을 배경으로
이허(伊河) 강에서
용문석굴을 배경으로
우리를 친절하게 안내해준
조선족3세 吳光顯(오광현)군과 함께
이허(伊河) 강에서 용문석굴을 배경으로
이허(伊河) 강에서
건너편 용문석굴을 바라본 풍경
여기 룽먼스쿠(龍問石窟)에는
현재 2345개의 석굴과
불탑 70여 개, 불상 10만 점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머리가 없어진 불상이 많아 참으로 안타깝더라..
우리를 친절하게 안내해준
조선족3세
吳光顯(오광현.HP153-0920-6502)군과 함께
측천무후
[則天武后, 624~705.12.16]
중국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가 되었던 인물로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였지만 690년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였다.
본명 조
국적 중국 당
출생지 중국 산시성
성은 무(武), 이름[諱]은 조(?),
시호(諡號)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이다.
중국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皇帝)가 되었던 인물로 무후(武后),
무측천(武則天), 측천후(則天后),
측천제(則天帝),
측천여제(則天女帝), 측천여황(則天女皇) 등으로도 불린다.
측천무후(則天武后)라는 호칭은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皇后)로서의 지위를 나타내지만,
690년 당(唐)의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무측천(武則天)’이라는 호칭이 더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이름인 ‘조’는 ‘비출 조(照)’의 뜻을 나타내는
측천문자(則天文字)로서
해(日)와 달(月)이
하늘(空)에 떠있는
모양처럼 세상을 비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측천무후(則天武后)는
624년 2월 17일(武德 7년 1월 23일)
당(唐)의 수도인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에서
당의 건국 공신(功臣)인 무사확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펑셴쓰(奉善寺)의 대형 비로자나불
무사확은
병주(幷州) 문수현(文水縣, 지금의 山西省 文水)
출신으로 목재상으로 큰 부자가 된 인물이다.
그는 당 고조(高祖, 재위 618~626) 이연(李淵)이
수(隋) 양제(煬帝, 재위 604∼618)에 맞서
타이위안[太原]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부터
그를 지원하여 당 건국에 큰 공을 세웠고,
당이 건국된 뒤에
원종공신(元從功臣)으로 대우를 받으며 공부상서(工部尙書),
이주(利州, 지금의 四川 廣元)와
형주(荊州, 지금의 湖北 江陵) 도독(都督) 등을 지냈다.
그는 620년에 본처를 잃고
양(楊)씨를 새로 처로 맞이해 세 딸을 낳았는데,
그 가운데 둘째가 무후(武后)이다.
무후는 637년(貞觀 11년)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의 후궁으로 입궁하였으며,
4품(四品) 재인(才人)으로서 태종에게
‘미(媚)’라는 이름을 받아 ‘무미랑(武媚娘)’이라고 불렸다.
649년에 태종이 죽자 무후는 황실(皇室)의 관습에 따라
감업사(感業寺)로 출가(出家)하였다.
그러다 651년 고종(高宗, 재위 649~683)의
후궁으로 다시 입궁하였고,
이듬해에 2품(品) 소의(昭儀)가 되었다.
무후는 고종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낳았으며,
655년 왕황후(王皇后)와
소숙비(蕭淑妃) 등을 내쫓고 황후(皇后)가 되었다.
펑셴쓰(奉善寺)의 대형 비로자나불
황후가 된 무후는
고종을 대신해서 정무(政務)를 맡아보며
태종 때부터 봉직해온
장손무기(長孫無忌, ?~659), 저수량(596~658),
우지녕(于志寧) 등의
대신들을 몰아내고 신진 세력을 등용해 권력을 장악하였다.
656년 황태자(皇太子)였던
이충(李忠, 643~664)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인
이홍(李弘, 652~675)을 황태자로 앉혔고,
664년부터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통해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치하였다.
675년 고종의 병세가 악화하자
무후는 섭정(攝政)이 되어 전권을 행사했으며,
그 해 이홍이 죽자
둘째 아들인 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다.
그러다 680년에는 이현(李賢)을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인 이현(李顯, 656~710)을 황태자로 세웠다.
683년 고종이 죽자 이현(李顯)이 황제가 되었는데,
당의 4대 황제인
중종(中宗, 재위 683~684, 705~710)이다.
펑셴쓰(奉善寺)의 대형 비로자나불
하지만 중종의 황후인 위후(韋后)가
아버지 위현정(韋玄貞)과 함께
정권(政權)을 장악하려 하자 684년 중종을 폐위시키고
넷째 아들인
이단(李旦, 662~716)을 황제로 세웠다.
그가 당의 5대 황제인 예종(睿宗, 재위 684~690, 710~712)이다.
그 해 서경업(徐敬業), 서경유(徐敬猷) 형제가
일부 황족(皇族)들과 연합하여
양주(揚州)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무후는 40일만에 이를 진압하였다.
688년에도 태종의 아들인 월왕(越王) 이정(李貞)이
아들인 이충(李沖)과 함께
박주(博州, 지금의 山東省 濟寧)와
예주(豫州, 지금의 河南省 汝南)에서
무후에 반대해 군사를 일으켰지만 곧바로 진압되었다.
무후는 내준신, 색원례(索元禮),
주흥(周興) 등을 등용해 반대파에 대한
밀고와 감시에 기초한
공포정치를 펼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처럼 황실(皇室) 안팎의 반대파를 제거한
무후는 690년 예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라 하고
수도를 장안(長安)에서
신도(神都)라 이름을 바꾼 뤄양[洛陽]으로 옮겼다.
역사가들은 이를 고대의
주(周, BC 1046∼BC 771)와 구분하여
‘무주(武周)’라고 부른다.
무후는 과거제도를 정비해 적인걸(狄仁傑),
요숭(姚崇), 송경(宋璟) 등의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행정 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무후는 반대파를 매우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했지만,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다.
그녀의 통치기는 태종이 통치하던
‘정관(貞觀)의 치(治)’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아
‘무주(武周)의 치(治)’라고 불리며,
이후 당(唐)의 전성기인 현종(玄宗, 재위 712∼756) 때의
‘개원(開元)의 치(治)’의 기초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699년 이후에는 장역지(張易之),
장창종(張昌宗) 형제와
환관(宦官) 설회의 등의
총신(寵臣)들이 횡포를 부리는 등의 폐단이 발생했다.
결국 705년 무후가 병을 앓아눕자
재상(宰相) 장간지(張柬之, 625~706) 등이
그녀에게 양위(?位)를 압박하였고,
무후는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나고 698년에
다시 황태자가 되었던
중종(中宗)이 복위되어 당(唐) 왕조가 부활하였다.
그리고 무후는 그 해 12월 16일(長安 5년 11월 2일)
황제(皇帝)가 아니라 황후(皇后)로서
장례(葬禮)를 치르고,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등의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용문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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