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병마용
병마용에 입장하려고
빽빽하게 줄지어서있는 관광객들
진시황제(秦始皇帝)
향년50세
(기원전 259년 1월-기원전 210년 음력 9월 10일)
진나라의 제31대 왕이며, 중국 최초의 황제이다.
이름은 영정이며,
조나라에서 출생하였기에 조정(趙政)이라고도 한다.
진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세도가 대단하던
조나라의 상인 출신의
승상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탄압사건인 분서갱유사건을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였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병마용 입장료 90元
(환율 1/175원. 15,750원)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왕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병마용까지는
전기자동차를 타고 이동한다
진시황제(秦始皇帝)
초기 생애 [편집]
영정(진시황 이름)은
기원전 259년에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온
진나라 공자 영자초와 그 부인 조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조희는
조나라 수도 한단의 기생으로,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다.
여불위는 조희를 영자초에게 바쳤고,
영자초는 조희를 아내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원래 조희는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으나,
여불위가 이를 숨기고
정치적 목적에서 영자초에게 바쳤다는 설도 있다.
어쨌건,
영정은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나,
줄곧 조나라에서 자라다가 기원전 250년,
영정의 증조부인
소양왕 영직이 동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소양왕은 얼마 후, 사망하였고
그 아들인 효문왕 영주가 즉위했다.
이에 영자초는 처자와 여불위를 데리고
진나라로 돌아와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효문왕은 즉위한 지 1년 뒤에 사망하고,
태자 영자초가 즉위하니, 이가 장양왕이다.
영정은 곧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3년 뒤에 아버지 장양왕이 훙서하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나라의 제31대 왕에 즉위하였다.
병마용입구
진시황제(秦始皇帝)
여불위와의 분쟁 [편집]
영정은 왕위에 올랐으나,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기에,
아버지때에 승상이 된 여불위가 섭정이 되어 국사를 돌보았다.
여불위는 마음대로 국사를 휘둘렀으며,
심지어는 영정의 모친 조태후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한다.
이에 여불위는 노애라는 자신의
수하를 환관처럼 꾸며 조씨의 처소로 보냈고,
조씨는 노애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에 조씨는 노애와 함께
수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거처하였다.
하지만, 기원전 238년에
영정은 성인식으로
잠시 함양을 비우자,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소식을 들은 영정은 곧바로 군사를 파견하여
노애를 능지처참에 처하고 어머니 조씨를 감금하였다.
또한 노애와 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2명을 환관에게 시켜 목을 졸라 살해하였다.
그리고, 영정은
여불위를 승상의 자리에서 내치고, 자결을 강요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237년에 여불위는
결국 자결하였으며
영정은 비로소 친정을 시작 할 수 있게 되었다.
진시황제(秦始皇帝)
중국 통일 과정 [편집]
기원전 230년부터 영정은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 통일을 위한 통일 사업을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진나라는 가장 세가 약했던 한나라부터 멸망시켰다.
기원전 228년에는 조나라까지 멸망시켰다.
그 때, 연나라의 태자 희단이
자객 형가를 시켜
잔치자리에서 영정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기원전 225년에는 위나라,
기원전 223년에는 진나라 다음으로 세가 가장 세었던 초나라,
기원전 222년에는 연나라,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드디어 마지막 남은 제나라까지 멸망시켜
영정의 나이 39세에 전 중국 땅을 마침내 통일하였다.
진시황제(秦始皇帝)
최초의 황제 [편집]
영정은 왕이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를 원하였다.
그리고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 합쳐서 황제(皇帝)라 칭하였고,
자신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시황제로 시작하여,
자신의 뒤를 잇는 황제들이 2세, 3세 등
만세까지 진 제국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진시황제 영정은 승상 이사에
의견에 따라 군현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었다.
또한, 모든 결재는 자신이 직접 챙겼으며,
도량형과 화폐, 문자 등을
통일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 하였고,
도로 역시 정비하여 각지의 교통체계를 강화하였다.
시황제는 남쪽으로도
군사를 파견하여 4개 군을 증설시켰으며,
북방의 흉노족이 중국을 위협하자,
대장군 몽염을 변방으로 보내어,
그들을 정벌, 내몽고의 땅 일부도 편입시켰다.
병마용 가는길
진시황제(秦始皇帝)
분서갱유와 폭정, 대토목공사 [편집]
기원전 213년, 어느 연회 때,
박사 순우월이 봉건제와
군현제를 놓고 복사 주청신과 언쟁을 벌였다.
이 때,
순우월이 봉건제로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승상 이사는 30일 내에
진나라의 역사와 의술, 농경 등에
관한 책 이외의 모든 책들을 태워버리라 주청올렸고,
시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실행시켰다.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212년,
시황제는 방사 후생과
노생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 명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은 시황제를 비판하며,
도망쳐 버리자
화가 난 시황제에게
조정 안에 수상한 학자가 일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학자들은 모두 자기가 아니라며 잡아뗐으나
시황제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으니, 그 수가 460여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이다.
그리고 이를 모두 합쳐서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불렀다.
이에 분개한 황태자 부소가 시황제에게 간언했으나,
부소는 오히려 시황제의 분노를
사 대장군 몽염이 있는 국경 근교로 쫓겨났다.
직접보니 병마용갱이 엄청나다
여기 병마용갱은 세계 8대 불가사의로,
중국 산시성 린퉁현에 있는
진시황릉에서 1km가량 떨어져 있는 유적지로
흙을 구워 만든 수많은 병사, 말 등의 모형이 있는 갱도이다.
1974년 농민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되어 지금까지 4개의갱도가 발견되었다.
병용은 키가 184cm에서 197cm로
큰 편이며 장군이 보다 크게 만들어져 있다.
병마용은
전사, 전차, 말,장교, 곡예사, 역사,
악사 등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발굴된 4개의 갱도 중 3곳에 모두 8천여 점의 병사와
130 개의 전차, 520 점의 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직 상당수가 흙 속에 묻혀 있다.
넓은 병마용갱주위에 수많은 관람객들이 보인다
병마용은
진시황의 무덤안에 있는것이 아니다.
진시황의 무덤은 여기서 1km가량 떨어져 있다.
여기 와보기 전에는 무덤안에 있는것으로 착각했었다.
진시황제는
북방에 흉노의 침입을 염려하여
서쪽으로 임도로부터
동쪽으로 요동까지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도록 명했다.
이 만리장성에 동원된 인부가 150만여 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하였다.
빽빽하게 입장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또한, 시황제는 함양 근교에 아방궁을 쌓도록 하였고,
나아가서는 70만 명의 인부를 동원,
함양 근교의 여산 전체에 자신의 능묘를 건설토록 했다.
이런 대토목공사를 하는 동안,
국가의 재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법을 매우 엄히 하여
백성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게 하였으며,
한 사람이 죄에 연루되면 그 친족을 몰살시켰고,
나아가 한 집이 법을 어기면 그 마을의
모든 가구들도 그에 똑같은 형벌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관청으로 가는 길에는
항상 죄인들의 행렬이 즐비했다 전해진다.
불로장생의 꿈 [편집]
시황제는 자신이 무병장수 불로장생하길 간절히 빌었다.
(진시황은 향년 50세로 죽었다)
그리하여, 전국의 명산에 방사들을
보내 불로장생의 약을 얻으려 하였으나, 없었다.
그리하여 죽으면서까지 그 약에 매우 집착을 하였는데,
그 중 서복이라는 사람이
시황제에게 왜국에 그 약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시황제는 많은 돈을 서복에게 내주고
왜국으로 가 어서 그 약을 가져오라 명했다.
하지만,
몇 년이 다 되도록 그 약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시황제는 서복에게 독촉을 했고,
서복은 소년소녀 3,000명을 데리고
왜국으로 건너가 다시는 진나라로 돌아오지 않았다.
역사의 현장에서
전국 순행 [편집]
시황제는 재위 기간 중 무려
다섯 차례씩이나 전국 곳곳을 순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때에 많은 협객이 폭군 시황제를 죽이려 하였다.
그리하여 시황제는 순행 시,
언제나 5개의 수레를 군사들이 호위토록 하고,
자신은 그 수레 중 하나에 탔다.
시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드는
협객을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시황제는 길가에
자신의 송덕비를 세워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번은 시황제가
금릉(金陵, 현재의 남경)에 왔을 때, 왕기가 일어났다.
이에 분개한 시황제는
근처에 소나무를 빽빽이 세워 왕기의 기운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금릉은 삼국 시대까지 말릉으로 불리었다.
이렇게 시황제는 거의 온 중국
대륙을 돌아다녀 자신이 성공한 군주임을 천하에 과시하였다.
- 위키백과 -
진시황릉의 병마용
시황제는
기원전 210년에 마지막 순행을 하였다.
여기에는 승상 이사와 중거부령인 환관 조고,
그리고 자신의 26번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인 호해가 자신을 뒤따랐다.
사기에 따르면 시황제는 돌아오는
도중 평원진에서 유성이 떨어졌는데
그 운석에 누군가가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分)'
즉,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고 써놓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시황제는 병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그리고 시황제는 사구 지방에 이르자,
병이 매우 위독해졌으며 유언장을 조고에게 쓰라 하고,
그 내용은 옥새를 적장자인
황태자 부소에게 전달케 하고,
부소에게 함양에서 자신의 장례를 주관하라 명하였다.
기원전 210년 음력 9월 10일,
진시황제 영정은 50세의 나이로 붕어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만든 지하궁전인 여산에 묻혔다.
이 능묘는 1974년 우물공사를 하면서
부장품인 병용(군사모양의 인형)과
더불어 발견되어 지금도 발굴 중이다.
그러나 이사와 조고, 호해는 시황제의 죽음을 숨겼으며
시황제의 시신이 있는
수레 옆에 절인 생선을 같이 운반하여
시신 썩는 냄새가 들키지 않도록 했다.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
황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부소는 자결하였으나
몽염은 이 명에 대해 의심을 품어 자결하지 않았다.
그러나군사들에게
체포당해 압송된 후 처형당했다.
얼마 뒤, 시황제의 26남 호해는 황제에 오르니 그가 진 2세 황제이다.
진시황제.
대부분의 무덤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만드는 것이지만,
이집트의 왕들도 그렇고...
중국의 왕들도 자기가
죽은 후의 일들은 믿을 수가 없어서인지...
집권을 하면서부터 자기의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불노장생 하고 싶어 서복(徐福)이라는 신하를 보내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명령하였으나
구하지 못하고 결국 죽은 걸 보면 비록 스스로를 신격화하여
황제로서 백성 앞에 군림하였지만
죽음이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었나보다.
진시황릉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7,000 토우 전사들을 실제크기로 병마용(兵馬甬)을 만들어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한 것은 오히려
얼마나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처사인지...
살아있는 7,000 병마를 무덤에 함께 데리고
들어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1974년에 이것이 출토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고...지금은 관광명소가 되어있습니다.
진시황제는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황제이고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그가 죽은 지 2,000년이 넘었지만
지금까지 그의 명성은 사라지지 않고있다.
그는 최초로 거대 중국을 통일하였고,
최초로 통일된
정부의 통합관리체제를 만들어 놓았으며,
최초로 문자를 통일하는
작업을 단행하여 한자를 정형화시키는 기초를 다졌고.
최초로 전국적인 군현제를 실시.
토지 분봉제 대신 전면적인 행정구역제도를 마련했으며,
최초로 도량형을 통일하고
지역 간에 서로 다른 환산표준을 하나로 일치시켜
경제활동의 활성화를 꾀했다.
최초로 ‘황제’라는 칭호를 창조하고 사용했다.
이 칭호는 후세의 제왕들이 계속해서 사용했으며,
2천여 년의 중국 봉건사회
속에서 줄곧 최고 통치자의 법정 호칭이 되었다.
최초로 통일된 중앙집권제도를 창설하였는데,
이 제도 역시 한나라 때 수정과
보완을 거쳐 마침내 중국 봉건사회의 기본제도가 되었다.
진시황의 탄생
진나라의 왕자 장양왕은
인질로 잡혀와 초나라에서 살았답니다.
이때 거상 여불위 라는
간교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첩이 절세미인...
보자마자 탐을 내니 여불위가 생각하기에
장양왕에게 주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판단
바로 장양왕에게 넘겨
주었는데 그때 그 여자는 임신 중이었다는 것...
그 후 9개월 후에 누구의 아기인지
아리까리한 때에 태어난 아기가 영정...
후에 진시황제가 될 아기였다는 것입니다.
진시황은 장양왕의 아기일까요?
여불위의 아기일까요?
기원 전 2세기의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여불위의 아기라고 분명히 말 했으나 신빙성이 없다는..
"여불위는 최고의 무용수이자 한단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부(情婦)를 첩으로 맞아들였고,
그녀는 아이를 가졌다.
장양은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그녀를 가질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어느 누구보다 여불위가 격노했다.
그러나 여불위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이로운 점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는 그녀를 장양에게 넘겨주었다.
그녀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다.
정상적인 임신 기간이 지난 후, 그녀는 아들 영정을 낳았다."
이 글은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여불위가 장양왕이
죽은 후 영정의 교육자 역할을 맡았고, 13세에 즉위하여 22세에
왕권을 쥐기까지 섭정에 있는
태후와 관계했고 어린
왕의 책사(策士)였고 승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야심차고 똘똘한 영정은
열세 살에 왕위에 올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권력’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권력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기원전 238년 영정의
22번째 생일 직전에 여불위와 결별하였다.
여불위는 자신과 태후의 관계가 들통날까봐
환관 노애를 소개해서 태후와 관계 하게하여 두 아들을 낳았고...
그니까 노애는 환관이면서 거세하지 않았다는 증거..
궐내에서 상당한 권력을 누렸겠지요...
왕이 이복형제의 존재에 대해 눈치 채게 되자,
노애는 왕에게서 권력을 찬탈하여
자신의 아이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궁중 혁명을 일으켰다.
진시황을 완전 물로 본 것이지요...
말 할 것도 없이 반역으로 바로 진압되었고
노애와 그 추종자 20명은
말에 끌려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죽임을 당했다.
또 그의 두 아들도 가죽
주머니에 집어넣어져 몽둥이로 때려 죽였고..
여불위도 지위를 잃었고,
1년 후엔 쓰찬 지방으로
추방되어 유배되는 도중 자살했고...
황제의 어머니 태후도 페위되어
궁중을 떠나 멀리 멀리 유배되였다.
최초의 반역을 피로 진압한
젊은 왕은 권력의 주도권을 잡았으며,
기원전 221년에 스스로 진시황제(秦始皇帝)라 하고
그후 15년동안, 생각보다 얼마 안된다.
통일 중국을 통치하는
무소불위의 절대 군주로서 군림하게 된다.
진시황의 죽음
시간은 흐르고,
그에 따라 사람도 늙기 마련인 것을....
진시황제는 영원히 살며 영원히
권력을 휘두르며 나라를 통치하기를 바라고
불로초를 구하려고
서복(徐福) 일행을 바다 건너보내기도 하였지만...
사마천의 기록에는 이런 그를 두고
"허무맹랑하게 불로초를 찾는 바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런저런 기록을 볼 때 사마천이
진시황제를 좋게 보지 않은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러니까
싫은 사람을 좋게 기록했을 리가 없다고
그의 진시황제에 대한 기록을 의심하나봅니다.
불로초를 구하려고 한 일화에서 보듯
죽음 앞에서는
그도 약한 한 인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죽음 또한 비참하게 맞았습니다.
진시황은 자주 그 넓은 중국 대륙
이곳저곳으로 시정시찰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는데...
그때에도 궁중을 떠나 광총시안
북서쪽 허베이 지방으로 나가서 병을 얻어서...
그때 수행 중이던 사람이 환관 조고(趙高)와
예의 그 분서갱유(焚書坑儒)사건의 이사(李斯)였답니다.
그리고 궁중은
장남이자 왕위 계승자인 부소(扶蘇)에게 맡기고
총애하던 막내 호해왕자을 데리고 다녔다고...
호해왕자는 왕자 중 17번째라고 합니다
부소는 너무나 강직하고 착한 효자였기에
조고와 이사 같은
간신배들과 사이가 좋았을 리가 없지요.
왕이 자기의 병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유언을 적어 환관 조고에게 맡기니...
조고가 이것을 서찰로 만들어 오니 왕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
기원 전 210년 7월...
진시황의 50세 되는 무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부소에게 보낸 유서의 내용은
군대는 가장 신실하고
의협심이 강한 장군 몽념에게 맡기고
돌아와 유해를 맞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을 좋지 않게 보는
부소가 왕이 되면 당근 자기들이 살아 날 길이 없으니...
유서를 위조합니다.
왕의 글씨를 흉내 내어 부소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데...
이 편지에는 부소와 몽념
장군은 자살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유는 유목민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였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부소는
몽념장군이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말리는 데도
그 편지가 아버지의 뜻이라 믿고 자결하고...
환관과 두 공범은 그 편지를 보낸
후에 황제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은 진시황의 시체를 마차에 싣고 전국 순행을 계속하였습니다.
요즘같은 냉동시설이 있을 리가 없고...
죽은 진시황제의 시체에서
송장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하자 그것을 위장하기 위하여
소금에 절여 말린 생선이 들어 있는
수레를 황제의 마차 앞뒤로 끌게 하였습니다.
산천초목이 그의 앞에서 벌벌 떠는
권력을 휘두른 진시황제였지만 죽음은 비참하였고
객사한 그의 시체가 썩어
송장냄새가 등천을 하도록 아직도
시정 시찰하는 척 마차 속에 방치되고....
평생을 공들여 만든 어마어마한
규모의 무덤 속에 바로 묻히지도 못하였습니다.
이 천인이 공노할 끔찍한 여행은
제1왕위계승권자인
부소의 자살 소식을 들은 후에야 중단되었고...
그들은 곧장 수도인 셴양으로 돌아왔습니다.
비로소 황제의 죽음이 공표되었고
그들의 계략대로 호해가 제 2대 황제로 옹립되고...
그러나 사실적인 권력은
환관 조고의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약한 왕들이 흔히 그러하듯,
간신들의 계략에 의해 왕이 되었으니
그 간신들의 손에 놀아나는 나라가 제대로 될 리가 없으며
왕위가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하여
형제 자매들을 의심하는
병이 생겨 일벌백계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
가장 잔인한 방범으로 형제 자매와
이복 형제 자매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나...
그 왕을 무서워하기 보다는
나약하고 잔인하기만 한 왕을 없애려는 역적모의 반란세력만 늘어가...
병사와 말
왕조 말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전 철을 예외없이 하나씩 밟아
결국 그는 집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암살 당하고..
이사도 반역의 누명을 쓰고 허리가 잘리는
요참형을 받아 백성들이 지켜보는 길거리에서 처형 당했고,
그 가족은 삼족이 멸함을 당했습니다.
이 모든 일의 배후 조종자인
조고도 기원전 207년에 주살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망국의 길로 접어든 진왕조는
불과 몇 달 후인 기원전 206년에 농민반란으로 멸망..
진시황제가 꿈꾸었던 세세만년의
제국은 불과 15년 만에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이상 빌려온글 -
병마용앞에 있는 간판
진시황도 한국의 이영애를 사랑해
병마용탐방 기념사진
병마용갱(兵馬俑坑)은
중국 산시 성 시안 시 린퉁 구에 있는
진시황릉에서 1km가량 떨어져 있는
유적지로 흙을 구워 만든 수많은 병사,
말 등의 모형이 있는 갱도이다.
1974년 농민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되어 지금까지 4개의 갱도가 발견되었다.
병용은 키가 184cm에서 197cm로
큰 편이며 장군이 보다 크게 만들어져 있다.
병마용은 전사, 전차, 말, 장교,
곡예사, 역사, 악사 등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발굴된 4개의 갱도 중 3곳에 모두 8천여 점의 병사와
130 개의 전차, 520 점의 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직 상당수가 흙 속에 묻혀 있다.
장교병마용갱은
진 시황제의 장례에 사용된 테라코타이다.
병사, 말 등을 흙을 사용하여 등신대로 제작하여 구워 만들었다.
진 시황제는 기원전 210년
사망하였으므로 그 즈음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병마용갱은 1974년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어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진시황릉이 70만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기원전 246년에
건축되기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의 기록은
진시황릉이 완공된 후 1 세기가 지난 때에 저술된 것이다.
그는 진시황릉이
지하에 황궁을 그대로 옮긴 것과 같은 규모였으며
수은이 흐르는 100여개의
강과 수십 개의 망루를 가진 도성에
온갖 보물과 병사를 조성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진시황릉은 지하 궁전으로 지어졌으며 완공이 된 후에는
도굴을 막기 위해 인부들을 생매장하였다고 한다.
2003년 1월 9일 진시황릉의 부장릉이 발견되어
진시황릉이 병마용 뿐만 아니라
실제 황궁을 재현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병마용탐방 기념사진
최근 조사 결과 병마용갱
부근의 리산의 토양이
많은 수은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이것이 바로 진시황릉이라 추정되고 있다.
진시황릉은 높이 76미터
넓이 350 평방미터에
이르는 흙으로 조성된 피라미드인 것이다.
리산에 대한 발굴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7년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원격
탐지 장치를 이용하여 내부에 벽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병마용
말과 병사병마용의 병사들은
장인들에 의해 머리, 몸통,
팔 다리가 각각 제작된 후 결합되었다.
연구 결과 제각기 다른 얼굴을
위해 8 종류의 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른 부위도 각기 여러 종류가 있어
이들을 조합하여 다양한 형태의 병마용을 제작한 것이다.
다리 부분은 대부분 동일한 형태로 같은
틀을 사용하여 대량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조립을 위해서는 각각의 부분을 맞춘 뒤
다음 과정으로 넘겨주는
생산 공정에 따른 조립 라인이 있었을 것이다.
최근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 기와의 생산과 같은
일상 생활 용품의 제작에서도
이러한 생산 라인이 존재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병마용은 살아있는 듯한 모습의 등신대로 제작되었으며
얼굴 부위에는 채색의 흔적이 있다.
병마용의 존재는 진 시황제의 권력을 상징한다.
병마용탐방 기념사진
갱도 [편집]
병마용갱은 1974년 1호 갱이
발굴된 이후 현재까지 발굴이 진행 중이다.
1호 갱
: 1974년에 발굴되었다.총 14260제곱미터이며,
진용 약 6000구에 전차 40대가 발굴되었다.
2호 갱
: 기병과 근위대의 용병이 있다.
3호 갱 :
1976년에 발굴되었으며,완전 발굴된
520제곱미터의 3호갱은 지휘부로 추정되는데,
장군의 것으로 보이는 채색된
전차 1량과 갑옷 입은 보병용 64건,
마용 4건이, 진용 78건, 전차 1대가 출토되었다.
4호 갱 :
다른 갱도와 달리 병마용이 없이 비어있는 갱도였다.
5호 갱 :
발굴 되었다.
6호 갱 :
2000년에 발굴되었으며, 400 제곱미터이다.
7호 갱 : 2000년에 발굴되었으며, 700 제곱미터이다.
진시황병마용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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