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에서 고국을 방문한 가인 죽마고우함께
박정희대통령생가 방문
[朴正熙大統領生家]
소재지 경북 구미시 상모동 171
잘 정비되여있는
박정희대통령생가 들어가는길
박정희대통령 생가 입구에서
바라본 집뒤뜰 풍경
엄청큰 벗나무에 마침 벗꽃이 만개해 화려했다
박대통령내외분과 기념촬영
박정희대통령생가
박정희대통령이 태어나서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건립 당시는 초가였으나 1964년에 개축하였다.
1993년 2월 2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이 일대 대지 228평이 문화재보호구역으로 고시되었다.
박정희(朴正熙)는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에 있는
이 집에서 1917년에 태어나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20년을 살았다.
박정희의 본관은 고령(高靈)이지만,
선조 때 고령에서 성주(星州)로 옮겼다가,
1914년에 현 위치인 상모동으로 이사하였다.
이 집은 1900년경에 지은 15평 규모의 초가집으로,
전형적인 농촌 가옥이다.
1964년 구미시가 안채 및 사랑채를 단장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꾸몄다.
생가 안에는 1979년에 설치한 분향소가 있다.
박대통령생가 주차장위 언덕의 모습
생가 입구초소
이 초가에서대통령이 탄생했다
원래의 안채는 一자 모양으로
부엌과 방 두 개 사이로 마루방이 하나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난 사랑채에도 방이 둘 있었다.
박대통령이 애지중지 했던 감나무
대통령이 마셨던 감로수
대통령이 마시셨던 물
우리도 한바가지 마셔보자
물 한바가지 마실래요.?
물이 차갑고 맛이 좋았다.
사랑합니다.존경합니다.
박대통령 생가는동쪽을 제외하고 사방이
대나무와 탱자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어서 담을 쌓을 필요가 거의 없다.
안채는 북향으로, 정면에 있는 언덕과
대나무 숲이 바람막이 역할을 하게 방향을 잡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되기 이전의 생애 [편집]
유년시절과 가정 배경 (1917 ~ 1926) [편집]
박정희는 1917년 음력 9월 30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1978년~현재: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의 금오산 자락에서 몰락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경명왕의 왕자였던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言成)의 후손으로 대한제국 말기에 효력부위(效力副尉)와 사과를 지낸 아버지 고령 박씨 박성빈(朴成彬, 당시 46세)과 어머니 수원백씨 백남의(白南義, 당시 45세)의 5남 2녀 중 다섯째 아들이었다.
당시 박정희의 위로는 박동희(22세), 박무희(19세), 박귀희(15세), 박상희(11세), 박한생(7세), 박재희(5세)가 있었고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두 형 박동희와 박무희는 결혼하여 자녀가 있었고,
은씨 집안으로 시집간 큰누이 귀희는 임신중이었다. 아버지 박성빈은 영락한 양반 계급으로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1892년, 동학의 접주로 활동하였고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하자 연좌되어 이후에는 외가의 선산인 상모동의 약 1600평짜리 위토를 소작하기로 하여 상모동으로 이사를 하였다.[18]
어머니 백남의는 45세의 나이로 박정희를 임신하였기 때문에 박정희는 백남의에게 있어 원치 않는 자식이었다. 누나인 박귀희에 의하면 당시 두 아들이 결혼하여 며느리가 있었던데다가 딸과 며느리가 임신 중이었고 집안은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백남의는
박정희를 낙태하기 위하여 간장을 한 사발 마시기, 밀기울을 끓여서 마셨다가 까무러치기도 했다.
섬돌에서 뛰어내려 보기도 하고, 장작 더미위에서 곤두박질 쳐보기, 수양버들 강아지의 뿌리를 달여 마시기, 일부러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다 대고 뒤로 넘어져 물레방아에 스스로 깔리기 등 온갖 민간요법을 총동원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아기가 태어나면 솜이불에 돌돌 싸서 아궁이에 던져버리리라'고 작심하고 낙태를 포기했다고 한다.[19] 그의 어머니는 맏딸 박귀희에게 임신사실을 비밀리에 말하였고 귀희는 어머니의 낙태를 돕기도 하였다.[19]
박정희는 결국 태어났으나 태아 시절에 겪은 시련 탓인지 아버지와 형들이 기골이 장대한 데 비해, 왜소하고 까만 얼굴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노산에 모유가 나오지 않아 밥물에 곶감을 넣어 끓인죽을 먹고 자랐으며, 큰누나 귀희의 젖을 먹기도 했다 한다.[20]
또한 변비로 고생하기도 했다고 한다.[19] 영아기에 박정희는 집 마루에서 굴렀다가 마루밑에 놓은 화로에 떨어져 머리카락과 눈썹 부분에 화상을 입기도 하였다.
아버지 박성빈은 황토흙을 짓이겨서 갓난 아들에게 발라주었고,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화상을 입어 피부가 검게 그을린 것이라 한다.[19]
이 이후로 박정희는 짧은 옷을 입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고도 한다.[19] 유년기에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漢學)을 수학하였으며,[21]
훗날 입학하는 구미보통학교의 입학전 경력에도 한학 수학이라 기입되어 있으며[21] 학교에 다니면서도 일요일에는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다녔고, 나머지 시간을 이용해서 서당에 다닌 것이다.[21]
소년 시절 (1926~1934) [편집]
박정희는 1926년 4월 1일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22] 구미공립보통학교 시절, 2학년 때까지는 급장을 담임선생이 지명했으나 3학년 때부터 교칙이 바뀌어 1등을 하면 급장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공부를 잘하던 박정희는 3학년 때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다.
이때 박정희의 급우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었다고 같은 반 동기생이었던 박승룡이 회고한 바 있다.[20]
한편 그의 담임 선생은 박정희에 대해 평가하기를 '성적은 전 과목이 고루 우수하며 암기력이 좋아 산수, 역사, 지리 등은 언제나 만점을 받았다고 기록하였으며, 조리있는 발표력과 예민한 사고력을 특기사항으로 기록하였다.[22]
반 학생들 중 나이가 어렸으나 급장으로서 통솔력이 탁월하고 자습시간 등에는 학우들을 지도하였으며 체육시간에 선생이 나오기 전에 준비를 갖추어 기다리도록 지도를 잘한다고 평하였다.[22]
수업시간에 박정희는 남보다 먼저 손들고 발표하기도 하였다.[22] 당시 박정희는 학교 수업 외에 독서를 즐겨했는데, 군인을 동경하였으며 그 중 나폴레옹과 이순신의 위인전을 탐독해 읽었다고 한다.
박정희 자신의 회고에도 '소년시절에는 군인을 무척 동경했음. 그 시절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 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하며[23]
보통학교 시절에는 일본인 교육으로 일본 역사에 나오는 위인들을 좋아하다가 5학년때 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을 읽고 이순신장군을 존경하게 됐고, 6학년때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레옹을 숭배하였다고 회상하였다.[23]
소년시절에 박정희는 친구를 따라 개신교 교회에 다녔다.[24] 그의 동창인 한성도는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때 그가 주일학교에 다녔다고 증언하였다.[25]그러나 뒤에 박정희는 종교를 바꾸게 되었다.
형편상 도시락을 싸올수 없을 때도 종종 있었다.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지만 한약방을 하던 집 아들인 급우 이준상과 친해지면서, 도시락을 싸올수 없는 날에는 학교에서 5분 거리인 그 친구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기도 하였다.[25]
이준상의 집안은 그의 아버지가 작고한 이후 가세가 급속히 기울어진데다가 병이 있어 어렵게 살고 있었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선거에서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박정희는 경주에 있다가 생가를 찾아 구미역에 도착했다.
환영 인파를 대하자 박정희는 제일 먼저 이준상을 찾아 허름한 차림의 그를 자신의 지프에 태운뒤 생가로 이동했다.이 사건 이후 구미에서는 가난한 장애자 이준상을 아무도 업신여기지 못했다[25] 한다.
1972년 이준상은 어릴 때 다친 다리를 또 다시 다쳐서 입원했을때 대통령 박정희는 그의 병원치료비를 지원하기도 했으나[25] 그는 53세에 사망했다.
1932년 3월 1일 구미공립보통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한[22] 박정희는 1932년 그해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총 응시자는 조선인, 일본인 합하여 모두 1,070명이었다.[26] 당시 박정희의 집은 가난하여 학비를 댈 엄두도 못냈고, 그의 가족들은 내심 그의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면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선생님들과 교장선생이 방문하여 박정희의 부모님을 설득하여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게 하였다.
누이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박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도록 빌었다고 한다. 합격하고 진학 못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합격하였고, 입학성적은 51등이었다.[26]
교육 활동 (1932 ~ 1940) [편집]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직후 '예비소위' 시절의 박정희[27]1932년 4월 1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제 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이때 입학정원 100명이었는데 이 중 한국인 90명, 일본인 10명이었다.[26]
대구사범고등학교 진학후 박정희는 집을 떠나 대구시내의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다. 대구사범학교 5년 중 3년간 그의 성적은 하위권이었다.[28] 품행평가에서 '양'이 네번, '가'가 한 번이었으나, 군사 및 체육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
이 성적표는 그의 집권기간에는 비공개로 공개금지가 되기도 하였다.[28]
대구사범을 졸업하기 1년 전인 1936년 4월 1일, 세 살 아래인 김호남과 결혼했다.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 박성빈이,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간청하여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을 졸업하였고 1937년 4월 1일 만 20세의 나이에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
[29] 박정희는 여기서 1940년 2월까지 재직하였는데[30] 박정희가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38년 9월 4일에 아버지 박성빈이 67세로 사망하였다.
박정희는 1937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북도 교육청에 대기발령 받았다가 4월 문경공립보통소학교 담임교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1940년까지 문경소학교에 근무하였다.
한편 1939년 행적에 대해 다른 견해도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중국 조선족 작가 류연산은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서 박정희가 신경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기 전인 1939년 8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고 이후 간도 조선인특설부대에 자원입대해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나섰다고 주장하였다.[31][32]
박정희의 셋째딸 박근령은 2005년 2월, 이러한 주장을 담고 있는 서적이 부친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국내 출판사 대표인 아이필드 출판사 대표 유연식을 검찰에 고소했고
대법원 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까지 올라갔으며[31][32][33]
1939년, 박정희가 서명한 문경공립보통소학교 “성적통지표”와 1940년, 박정희가 교직을 의원면직했음을 보여주는 교육 당국의 서류를 제출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재판에서 안대희 재판관 등 재판부는
“그의 친일 행적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고 특설부대에 근무했는지도 한국현대사의 쟁점으로 계속 연구돼야”한다고 판결을 내린 동시에 “책에 적시된 내용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반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이 ‘허위’임을 인식했다고 단정할 수 없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며 무죄를 판결했다.[31][32]
이와 관련하여 데일리안은 다른 언론들이 무죄판결을 가지고 류연산의 주장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34]
청년기 [편집]
만주군 장교 활동 (1940 ~ 1945) [편집]
박정희는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지만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만주신문의 1939년 3월 11일자에 따르면 박정희는 만주군에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하였다.[35][36]
현재 박정희가 쓴 혈서는 없으나, 혈서에 대해 보도한 만주신문은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고 있다. [37] 혈서로 쓴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38]
동봉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첨부되어 있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1940년 4월 박정희는 만주국 신경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이때의 박정희의 동기생들 가운데는 5·16에 가담한 사람이 없었으나, 간도 용정의 광명중학 출신의 선배 기수에서 5·16을 지지하게 되는 등, 이 때의 인맥은 박정희의 지지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39]
1942년 3월 박정희는 만주국 신경군관학교 2기 예과 졸업생 240명 중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때 박정희는 수석졸업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로부터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하사받았다.[40]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친 박정희는 1942년 10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300명 가운데 3등의 성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를 졸업한다.
그리고 견습사관 과정을 거쳐 1944년 7월 열하성(熱河省) 주둔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다. 12월 23일 정식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였다.[41]이때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등은 훗날 5·16 군사 정변의 동지가 된다.
보병 제8사단의 주 토벌 부대는 중국의 팔로군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투사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고 박정희가 팔로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투사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정설은 아니다.
2004년 동아일보가 제안한 가상토론에서 조갑제는 박정희가 팔로군을 토벌하였으나 이는 중국군이므로 독립군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 반면, 진중권은 팔로군에 독립운동 세력이 참여하고 있었다고 하였다.[42]
정설에 따르면 1930년대 이후의 만주지역 조선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공작인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최소 500여명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숙청되거나 학살당하였고
만주 지역 내에서의 조선인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중국공산당이 이를 방관함으로서 민생단 사건 이후 만주 지역에서의 조선인의 영향력은 위축되었고 조선인과 중국 공산당 간의 연대도 약화되었다.[43][44]
국민공통 교육과정‘국사’교과서에도 1940년 이후 한국의 독립군 대부분이 광복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근거지를 중국 내륙에 위치한 충칭(重慶)으로 옮겼다고 서술되어 있다.[45]
한편 박정희와 같이 만주 제8단에서 복무한 신현준, 방원철 등은 오마이뉴스의 취재에서 “당시 제8단 지역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팔로군 토벌을 위해 주둔하고 있었으나 박정희는 복무 당시 팔로군 토벌 기회가 전혀 없었으며 놀고 술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증언하였다.[46]
박정희 임시 육군 군인(군속) 계군관시절 박정희는 일제 성명 강요에 의해 다카키 마사오(일본어: 高木正雄)로 창씨 개명하였고, 만주군관학교 2기생 졸업앨범과 일본 육사 졸업앨범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47]
박정희의 셋째형 박동희가 1945년 3월 박정희의 병적사항을 알리기 위해 경북 구미 면사무소에 제출한 병적기록부를 바탕으로 작성된 《임시육군군인군속계》에서도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때 박정희는 문경으로 돌아와 교사 시절 자신을 핍박하였던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 사과를 요구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래는 제자인 이순희의 증언이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48]
박정희는 만주 보병제8사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근무하였고,[49]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북경으로 건너가 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1945년 8월 해방 직전에 만주 싱릉에서 중국 국민당의 부대에 의해 체포되어 북경으로 끌려갔다는 견해도 있다.[50]
이후 해방조선으로 질서정연한 귀국을 하기 위해 장교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 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한국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5월 귀국하였다.[51]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하였다.[50]
광복 직후(1945 ~ 1950) [편집]
해방 이후 박정희는 한국 광복군에 입대하였는데 만주군 출신이었던 박정희가 광복군에 바로 입대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광복군이 만주에 있던 조선인들에게 선전했던 투쟁지침과 관련된 내용이 주된 이유로 알려진다.[52]
비밀리에 일본군 내 조선인 장교들에게 살포된 이 선전문에는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시키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1946년, 광복군 제2중대장으로 귀국한 그는 그해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단기 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
광복을 맞은 한국의 군대에서 다시 육군 소위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박정희와 2기생도들은 1946년 12월 14일에 졸업하였다. 교육 중 동기군번 69명이 탈락하고 194명이 졸업하였고, 군번은 성적순으로 받았다. 1등은 신재식 (육군소장, 군수기지사령관 역임)이었고, 박정희는 3등이었다.[53]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는 본부가 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받았다. 8연대는 1947년 2월, 미군이 38선 경비업무를 일부 이관하면서 다섯 곳에 경비초소를 설치하게 되었다.[53]
당시 경비중대장은 경비사관학교 1기인 김점곤 중위가 중대장으로 있었다. 원용덕 연대장이 장교들을 소집하고 경비초소(CP)의 위치와 소대장의 배치장소를 의논하였는데 미군 고문관 브라운이 소대장의 서열에 따라 배치하면 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면전에서 미국놈이 왜 간섭을 하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미국놈'이란 욕을 알아들은 브라운은 고소하였고 원용덕 연대장이 미국놈은 애칭이며 욕이 아니라고 변명해도 통하지 않았다.
브라운은 타이피스트한테 들어서 안다며 미국놈은 욕이라 하며 박정희의 징계를 요구하였으나 원만한 원용덕이 적당히 달랬다.[53]
그뒤 육군 소령으로 진급, 1948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를 받는다.
한국군 내의 남로당 프락치의 상부였던 그는 여수·순천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프락치 활동의 핵심 역할을 했던 박정희는 그해 11월 11일 체포 되었다.
그후 그는 군사재판에 회부 되어 사형 선고를 받지만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군부내 남로당원의 이름을 군 특무대에 실토하면서[54]
실형은 면하고 다음해 1월 강제 예편되었다[55].
이때 군부내 김창룡 등 숙군사업을 지휘한 사람들이나 백선엽, 원용덕 등 만주군 선배들은 박정희가 좌익 명단을 죄다 불었고,
박정희를 데리고 다니며 각 부대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했기 때문에 좌익들이 박정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그를 살려주기로 마음먹는다.
박정희의 육사 동기로 숙군에 직접 참여해 박정희를 수사한 김안일은 '자기 조직을 털어놓은 공산주의자란 거세된 환관과 같아 풀어줘도 안심할 수 있다'고 회고했다.[56]
그 이후, 그는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때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의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10월 육영수를 소개받았고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가 서울특별시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10월 25일 장도영의 추천으로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57]
박정희가 정보국 문관으로 재직중에 북한군이 38도선에 총집결되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바로 국방부에 보고서를 올렸으나 이승만 대통령 이하 당시 초대정부 구성원들은 이렇게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육군본부 장교클럽에 모여서 놀고 먹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에 크게 화가 난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군사반란을 시도하지만 북한군과 전투상황이였기에 그의 상급자들이 박정희를 무마시켜서 군사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이 앙금을 계속 갖고 있던 박정희는 그로부터 10년 후 군사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한국전쟁 이후(1950 ~ 1959) [편집]
육영수의 부친 육종관은 박정희와의 결혼을 반대하였지만 육영수와 그의 모친 이경령은 집을 나와 박정희의 거처 주변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는 대구광역시의 한 성당에서 육영수와 결혼하였다.
주례는 대구시장 허억(許億)이 주례를 보았고 신부의 손을 잡은 이는 예비장인 대신 박정희의 대구사범 스승 김영기가 임석하였다.[57]
이때 주례를 맡은 허억은 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을 바꿔 부르는 실수를 하게 된다.
1950년 육군 정보국 제1과장이 됐다.
1952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이용문 준장의 사무실에 찾아갔다가 그로부터 시인 구상을 소개받게 된다.[58]
그는 이후 이용문과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들을 동원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뒤에, 국회에서 개헌을 통과시키고 직선제 대통령으로 출마하려는 데 반발하여 쿠데타를 계획하였다.[58][59]
1952년 5월 군부 내에서는 이승만 축출 시도가 있었다.[60] 이용문 등 군부의 일부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장면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계획[60],
이용문은 장면의 비서로 있다가 1952년 4월 사퇴한 선우종원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선우종원이 협조를 거부하여 무산되었다.[60]
박정희는 이때 주동적 역할은 아니었지만 이용문을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다.[58] 쿠데타 계획은 미수로 끝났고 이용문은 그 1년 뒤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58]
1953년 11월 25일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으며[61]
1955년 7월 14일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61] 1955년 겨울 예기치 않은 폭설이 발생, 작업중이던 여러 사단 소속 장병들이 사고를 당한 사건이 있은 후 박정희는 문책성 인사조치로 대기발령되었다가 1956년 육군대학에 입교하였다.
6군단 부군단장 시절1957년 3월 20일 육군대학을 졸업한 뒤[62] 육군 소장 진급심의대상이 되었다.
이때 박정희의 육군 소장 진급심사위원회가 열려 22명의 심사위원이 참가하여 찬성 18표, 기권 2표, 반대 2표로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되는 듯하였다.
이때 경무대 행정관 곽영주(郭永周)가 나타나 박정희의 사상 문제, 결혼 문제 등을 이유로 그의 진급을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고 있던 곽영주의 반대에 부딪혀 박정희의 소장 진급 문제가 계류중에 있을 때 김정렬이 나타나 심사위원들을 설득함으로서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하게 되었다.
이 때의 일로 박정희는 곽영주에 대한 개인적 원한을 품게 되었고, 곽영주는 5·16 군사정변 후 혁명재판에서 경무대로 몰려온 데모대를 살상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이어 박정희는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하였다.[62] 1957년 제7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61] 1959년 7월 1일 육군 제6관구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 1월 21일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61]
이승만 정권 말기에도 박정희는 쿠데타계획을 세웠으나 1960년 5월 이승만이 자진 하야함으로서 실패하였다. 그뒤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수반의 과도내각을 거쳐 1960년 7월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하였다.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 이종찬 장군은 국무총리 장면을 찾아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였다.[62]
그러나 총리 장면은 이 문제를 바로 답변하지 않고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 사령관을 찾아 논의하였다.[62]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 육군본부로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 육군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며 항의를 했습니다.[62]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이었다가 이 일이 있은 후 12월 15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61]
미국의 감시도 감시였지만 당시 박정희에 대한 사상문제는 한국군 내부에서도 완전히 정리가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매그루더에게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하였던 김형일은 이 일로 박정희와 등을 지게 되었는데, 김형일은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에 반대하다가 참모차장에서 예편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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