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좌로부터
강신봉회장내외, 이승만전대통령며느님 조혜자여사, 블로그멤버 혜천여사, 그리고 나
이화장에서
이화장 안주인 조혜자집사 -
역경의 열매 신앙 간증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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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 안주인 조혜자집사
[역경의열매] [국민일보]1999-04-21
/정리=박선호 shpark@kukminilbo. co. kr
이승만 대통령의 며느님
조혜자여사
초대대통령 며느리 파란의 삶
이화장에서의 31년간의 결혼 생활. 초대 대통령가의 며느리로서 나의 결혼생활은 역사에 대한 또 다른 증언이라 할 수 있다.
시어머님 프란체스카여사를 모시고 시아버님인 고 이승만 전대통령의 유품들을 정리했던 일들. 그와 함께 접하게 된 한시대의 선각자들에 대한 발자취를 정리했던 것은 나의 결혼생활중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나에게는 큰 부담중 하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남편 이인수박사를 만나 결혼하기까지 어찌 생각하면 너무 철이 없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앞선 시대의 일들을 보존해 후대에 제대로 전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사소한 집기, 책상가구 하나, 다 떨어져 기워진 돗자리 마저도_뒤에 밝히겠지만 여기에는 얽힌 추억이 있다_역사적인 물건이었고 이곳 저곳의 관심으로 사적인 행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런 저런 이유로 이화장 안주인으로서 역할은 쉽지만 않았다. 가끔은 시어머님 프란체스카 여사가 계속 오스트리아에 사셨더라면 하고 상상해 본다. 또 내가 하나님을 몰랐더라면 어땠을가 상상해본다. 결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시어머님께서는 언제나 조용히 기도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셨다. 그리고 내게는 언제나 말없는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고 나는 그런 후원으로 힘들었던 견딜 수 있었다.
“얘야 이리와 기도를 해라. 하나님이 답을 주실거야”
지금도 시어머님의 음성이 귓전을 맴돈다. 이화장에서의 생활에서 시어머니는 내게 근검 절약 등 많은 교훈을 전하셨지만 그중 가장 큰 교훈은 `기도하는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 교훈은 나를 비롯한 두 아들과 남편 그리고 이화장의 모든 가족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끔 아직 만년 집사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때가 있다. 혹 내가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전남 영광출신으로 64년 대학을 졸업할 당시만 해도 나는 꿈많은 처녀였다.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교수가 되려는 꿈도 품었고 한 때 UN관련 일을 맡아 일해보려고도 했다. 또 대학졸업후 우연한 계기로 스위스에 가게돼 중앙일보 초대 주스위스 통신원이 되었을 때는 언론관련 일도 해볼까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의 운명은 이화장의 안주인이었다. 이화장과 전혀 관계없었던 처녀 시절, 4·19세대로 65년 7월 19일 이승만박사의 서거 사실을 TV로 담담히 접했던 내가 당시 여자로서는 드물게 스위스 생활을 하며 영어와 독어를 접하게 돼 외국인 시어머니를 모시는 자격을 갖추게 된 것. 그리고 스위스에서 남편 이인수박사와 첫만남을 주선한 한표욱대사를 만나게 된 것.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점차 이화장과 가까와지고 있었다.
□약력
△1942년 전남 영광 △1964년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중앙일보 초대 스위스 통신원 △서울 정동교회 집사 △한국부인회 부회장.
2 “미스조, 이인수박사를 소개하지…”이인수박사를 비롯해 이화장 가족들을 처음 가깝게 느꼈던 때는 스위스 유학시절이었다.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나는 스위스에 있는 페스탈로치 아동촌 교사로 근무하게 됐다. 보사부에 근무하던 것이 인연이 됐다.
당시만 해도 여자들의 해외 진출은 드문 일이었다. 당연히 가족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당시 보사부 위원으로 활동하던 아버지 조영선씨는 기꺼이 딸의 후원자가 돼 주셨다. 어떻게 보면 남편과의 만남도 아버지의 후원 덕이었다.
65년말부터 1년6개월간의 스위스 체류기간 동안 아버지는 당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차윤근 박사를 통해 용돈과 고추장 등 한국 음식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차박사를 통해 남편과 만남을 주선한 한표욱대사도 알게 됐으니 결국 아버지의 후원 덕에 남편과 인연이 이어진 것이다.
66년 5월 어느날 스위스를 방문하게 돼 나를 찾은 차박사는 당시 스위스 대사로 계시던 한대사를 소개해 주었다. 한대사는 그날 저녁 만찬에 초대했다. 식사를 마친 우리 셋은 아름다운 레만호수 주위를 산책했다.
“미스조. 저 호텔이 한국사에 중요한 사적지중 한 곳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한대사가 호숫가의 한 호텔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오” 내가 대답하자 한대사는 “저 곳에서 33년에 이승만박사가 프란체스카여사를 처음 만났지. 그리고 바로 사랑에 빠졌다네”라고 말했다.
그곳이 바로 호텔 드 루시(Hotel de Russie)였다. 저녁 노을이 물든 호숫가. 나는 낯선 이국땅에서 처음 조우한 이승만박사 내외분을 그려 보았다.
고국에 돌아온 뒤 외국생활을 하고 온 노처녀 대접을 받고 있어 일에 더욱 몰두했다. 당시만 해도 27살이면 노처녀였고 특히 외국생활을 한 덕에 인기가 하한가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날 한대사가 전화를 했다. “미스조. 어떻게 지냈어” 무척 반가왔다. “미스조. 시간있으면 나오지. 같이 만나면 좋을 사람이 있어” 누구를 말하는지 그때는 몰랐었다.
단지 한대사를 만나겠다는 생각에 나선 것이 나의 인생을 바꿨다. 같이 나왔던 사람이 이인수박사였다. 훗날 안 일이었지만 그 당시 한대사는 이미 나를 이화장의 며느리로 소개했고 이화장측에서는 대학교 등 여러 곳을 통해 나에 대해 알아 보았었다. 외국인 시어머니를 모시기에 적합한지, 이화장의 뜻을 잇기에 적합한지 등을 살폈다. 이인수박사는 첫만남부터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반면 나는 그날 나오는 사람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3 이교수 결혼제의에 할머니만 찬성68년 늦가을 서울의 한 호텔에서 한대사와 이인수 박사를 만났다. 당시 남편은 박사는 아니었지만 숙대와 단국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첫 만남은 그냥 식사를 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식사를 마치고 한대사가 다시 연락을 했다.
“미스 조. 사귀는 사람 있나” 나는 당시 신여성으로 만나는 남성들은 있었지만 사귀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오” “그럼 내가 이교수에게 미스 조 전화번화번호를 알려줘도 될까” “예?” 전혀 뜻밖이었다. 한대사는 내게 이교수를 정식으로 만나보라고 했다. 잠시 머뭇 거렸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이어 이교수와 단둘이 만나는 자리가 주선됐다. 우리의 첫 데이트는 워커힐에서 만나 전차를 타고 종로 영화관에 가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당시 이교수는 깔끔하다는 인상을 내게 줬다. 특히 인상에 남았던 것은 이교수가 전철표를 꺼냈던 지갑이었다. 색은 기억나지 않지만 귀퉁이가 헤어진 지갑은 정말 오래돼 보였다. 낡았지만 차분히 정리된 지갑속에서 전철표를 꺼내던 그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그와 결혼생활이 쉽지 않다는 암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이교수의 모습이 너무 좋게만 보였다. 그리고 막연히 멀게만 여겨지던 이교수를 가깝게 느끼는 계기가 됐다. 이교수는 이날 당시 연희동에 있던 친가까지 함께 배웅해주면서 첫 프로포즈를 했다.
37살 자신의 나이와 입장을 밝힌 정중한 결혼신청이었다. 하지만 놀란 나는 바로 집으로 뛰어들어왔다. 내 스스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곧 이교수의 결혼신청은 집안에 알려졌다.
집안 식구들은 대부분 반대였다. 이교수의 집안 명성이 워낙 대단한데다 문제는 이제는 그 가세가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집안은 흥하고 있어도 부담스러운데 지금 상태에 딸을 보내면 고생만 한다'는게 이유였다.
하지만 의외로 할머니가 이교수의 적극 후원자로 나섰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이교수에 대해 국회내 아는 분들을 통해 알아보았다. 당시 이교수의 생가 부친 이승용씨는 경기 양주군 교육장으로 계셨고 그 인품이 소위 `법없이 사는' 그런 분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교수가 할머니에게 호감을 얻은 부분은 망명한 이승만 박사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 사연과 그 후 이교수가 보여준 효심이었다. 이교수는 고 이승만 전대통령이 하와이 망명생활 18개월째인 61년 11월 13일 양자로 입적됐다. 6대 독자면서 자식이 없었던 이전대통령은 전내무부장관이었던 이후락씨를 통해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종친회에 양자천거를 부탁했고 종친회는 고르고 골라 남편을 양자로 선택했다.
훗날 남편은 양자의 입적 한달 뒤 하와이에서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를 처음 만났다. 당시 이박사는 재미교포인 윌버트 최씨가 제공한 와이키키해변의 목조 2층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 뒤 남편은 이박사의 병 간호는 물론 귀국주선 등에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부친을 통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들은 할머니가 “사람만 좋으면 된다”며 가장 먼저 결혼을 찬성하셨다. 할머니가 먼저 이화장에 전화를 했고 그에 용기를 얻은 이교수가 다시 내게 연락을 했다. 우리는 다시 만났고 이때 이화장을 처음 방문했다.
4 처음 가 본 이화장은 담이 일부 무너져 철조망으로 막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한 뒤 하와이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보았다. 이승만박사의 살아 생전 모습들, 시어머님과 이교수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이교수는 사진마다의 추억을 이야기 하며 “빈의 친척댁에 신세를 지고 계시는 어머님 프란체스카여사를 한국에 모시고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이교수는 이어 이화장 곳곳을 소개해주었다. 우리나라 첫 내각이 탄생한 조각당. 자신의 아버지가 쓰시던 서재, 거처하시던 방과 거실. 자기 방, 부엌 등을 보여주었다. 이화장은 검소했지만 깔끔했다. 이교수와 건물을 돌아본 뒤 정원을 산책했다. 이교수와 이야기를 하며 돌아본 이화장 정원은 외견과 달리 아름다웠다.
산책을 하는 동안 이화장에는 저녁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희미한 안개속에 이화장 정원은 빛나기 시작했다. 저녁 어둠은 나무 밑둥지부터 그 그림자를 드리고 안개로 촉촉히 젖은 나무들이 노을 빛을 반사시켰다. 안개 방울로 반짝이는 정원의 대리석 선녀상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그 날의 인상이다.
이화장 저녁식사 후 우리의 결혼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가족들은 나의 마음을 알고 결혼에 화답했고 이교수는 나의 사진을 동봉한 편지를 시어머님에게 보냈다. 시어머님은 이교수에게 “그녀의 미소가 너를 행복하게 해주리라 믿는다”며 찬성을 하셨다.
그 후 우리는 서로 상의하여 고유 풍습에 따라 약혼식없이 간소하게 사주를 받는 것으로 정혼했다. 결혼식 날짜는 12월 21일로 잡았다. 결혼준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부끄럼없는 각오와 실질적이고 허식없는 태도 그리고 겸손하고 세심한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했다.
고 이승만전 대통령이 자주 다니시던 정동교회에서 식을 올리기로 하고 동작동 묘소 참배 등 예식절차도 정했다. 나는 그 때 이교수에게 선물로 태극기를 준비했다. 빈에 계시는 시어머님께 친정부모님과 새며느리의 선물을 보내는 것으로 결혼식 준비를 마쳤다.
이교수는 몇 번 안되는 만남이었지만 과묵하면서도 세심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나는 조용히 그에 빠져들었다. 에머슨의 글 `자연'을 좋아하는 이교수는 조용하고 사색을 즐겼다. 훗날 시어머님은 당신의 결혼생활에 대해 가끔 이야기 해주셨지만 그 때마다 나는 어쩌면 남편과 시아버님이 이리 닮았을까 생각했다.
전해들은 시아버님은 무뚝뚝하지만 행동속에 세심한 배려가 숨어있는, 그런 멋을 아는 분이셨다. 결혼 직후 “우리나라 남자들은 부엌에 들어가 여자를 돕지는 않소”라며 무뚝뚝히 말하셨던 분이었지만 경무대 뜰을 산책하면서 꺽은 꽃을 시어머님이 즐겨치던 타자에 얹어 놓고 놀라게 해주시는 멋도 아는 분이셨다. 두달이 조금 넘는 짧은 만남의 기간이었지만 이교수도 가끔 사소하고 작은 일들로 나를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었다.
드디어 결혼식. 이제 정말 이화장의 식구가 된 것이다. 결혼식에는 많은 분들이 자리를 함께하며 축하를 해주셨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지인 워커힐의 아담한 빌라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저녁무렵에 도착한 빌라는 조각 조각 반짝이는 보석을 비단위 펼쳐 놓은 듯 불빛을 반짝이는 강물이 보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5 이화장 안주인 조혜자집사우리는 저녁식사후 성서를 읽는 것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신혼여행지에서 잊혀지지 않는 추억은 남편과 함께 춤을 추었던 기억과 아침의 함박눈이다.
지배인 내외의 초대로 저녁식사가 있었고 축배를 든 그가 춤을 추자고 신청했다. “춤출줄 아세요”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남편의 권유는 거절하기 힘든 것이었다. “마침 아는 곡이 나오니 흉내만이라도 내봅시다” 둘은 용감하게 나가 춤을 추었지만 시종 남편의 구두만 밟았던 나는 마침내 얼굴이 빨개진 `미시즈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첫날밤을 지낸 워커힐의 아침. 밤새 내린 함박눈으로 온통 세상이 눈부신 하얀색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남편은 조용히 다가와 “내년엔 풍년이 들려나”며 기원하듯 말했다. 그리고 조용히 “기암괴석이 눈 속에 묻혔세라. 우인은 오지 않고 볼 것 없다 하더라” 자신이 좋아하는 율곡선생의 고산구곡 시 한구절을 읊어 주었다.
그렇게 나의 이화장 생활은 시작되었다. 당시 이화장의 경제상태는 상당히 어려웠다. 우리의 결혼식은 정말 많은 분들이 참석해주셨고 그것은 어려운 이화장 경제에 조금 숨통을 트게 해주었다.
이어 남편이 전임강사에서 조교수로 승진했으니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보살핌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두분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분은 시어머님이셨다. 시어머님은 결혼식 하루 전에 축하편지를 보내셨다.
“내 사랑스런 너희들. 너희들의 결혼은 그 옛날 나의 결혼시절을 상기시켜주는구나. 너는 아버님이 독실한 기독교인임을 알 것이다. 아버님께서 살아계신다면 너에게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으라고 하실 것이다. 이 성경말씀은 네 인생의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제일 먼저 나에게 읽어주셨던 이 성경구절은 강한 정신력과 인내심을 우리에게 길러주었단다. 너도 극복해야 할 많은 문제가 있지만 참으며 믿음을 가질 때 힘이 솟아오를 것이다. 사랑은 즐거움과 행복만이 아니요, 깊이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이며 또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자기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것이니라”
시어머님의 축하편지가 결혼생활의 부부 사이에 대한 기도였다면 다른 기도는 며느리와 아내로서의 덕목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나의 친정할머니께서 해주셨다. 친정할머님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지 못하셨지만 성경을 읽겠다는 일념 하나로 나이 50세에 한글공부를 시작한 독실한 신자셨다.
“착하고 어진 나의 보배들아. 무엇이든 있을 때 아껴야지 없을 때는 아낄 것도 없느니라. 쌀 한톨에는 농부의 땀방울이 배어있느니라. 밥 한톨도 소홀히 여겨서는 아니되느니라. 콩 한 조각도 웃으며 나눠 먹을줄 알아야 하느니라. 여자든 남자든 아량과 도량이 커야 하느니라. 마음을 하늘처럼 높게 땅처럼 넓게 가지고 둥글둥글하게 잘 살아라”
나는 할머님의 말씀을 이화장 뒤주에 새겨 놓고 매일 읽었다. 두분의 말씀은 이화장 생활이 어렵거나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게 힘을 주었다. 또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6 청빈생활 일깨운 `돗자리 사건'
[국민일보]1999-04-28 55판 24면 1570자 생활·여성
이화장 안주인 조혜자집사이화장 정원에 봄이 찾아왔다. 이화장의 나무들도 푸르름을 찾았고 봄꽃들이 꽃망울을 맺기 시작했다. 철없던 새댁도 점차 이화장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처음 몇번의 실수와 해프닝을 통해 나는 어느새 이화장 며느리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이화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돗자리 사건과 이화장 며느리로서 인사를 드렸던 여러 인사들의 청빈한 생활이었다. 이들 통해 나는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고 경건한 마음으로 이화장의 내핍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다.
결혼 후 인사를 드리며 돌아본 건국초기 어른들은 대부분이 청빈한 생활을 하고 계셨다. 출장비를 돌려준 것으로 유명한 변영태 전총리는 조그만 집에 가구도 낡았던 것이 기억에 남았다. 김마리아여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던 이범석 전총리는 집도 작았고 난방시설도 제대로 안된 곳에서 생활하고 계셨다. 부친이 의사로 당시 어느정도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던 내게 건국초기 유명인사들의 이런 생활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남다른 데가 있는 분들은 역시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품게 됐다. 그분들은 내손을 꼭 잡아주셨고 “외국식 드레스가 만연하고 있는 가운데 한복입고 결혼식을 참 잘했다”며 칭찬도 해주셨다. 모두가 따뜻한 충고로 이승만박사 후손으로서의 자세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참 고맙게만 생각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청빈한 생활에 대한 깨우침을 얻은 사건은 돗자리 사건이었다. 이화장은 빗물이 새는 곳이 있을 정도였고 곳곳에 낡은 물건들이 쌓여 있어 정리가 필요했다. 나는 새댁으로서 당연히 팔을 걷고 나섰다. 날씨가 풀린 어느날 집안의 모든 물건들을 마당에 내놓았다. 집안의 중요한 유품들과 낡고 지저분한 것들을 분리했다. 청소후 정리를 하려 했다. 지저분한 것들을 앞마당에 모아놓고 태울 것은 태우고 버릴 것은 버리려 했다.
수차례 오가며 지저분한 물건들을 날랐다. 온몸에 땀이 차기 시작했고 마당 한가득 지저분한 물건들이 쌓였다. 다시 집안의 물건들을 한아름 들고 나설 때였다. 고 이승만박사를 항상 곁에서 모셔오던 황규면 비서가 버리려 쌓아둔 물건 중 낡은 돗자리를 꺼내고 있었다.
“아이고 새 사모님. 이건 국보나 다름없어요. 이것만큼은 절대 버리면 안됩니다” 돗자리는 곳곳을 천으로 꿰맨 초라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뭘 실수했을까'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모님 이건요. 이박사님과 프란체스카여사님이 꿰매시며 사용하시던 거예요”하며 황비서는 돗자리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 해주었다. “이박사님은 프란체스카여사와 함께 꿰매며 사용한 돗자리를 무척 아끼셨습니다. 처음엔 없어서 그렇게 사용했지만 그 뒤에는 그것을 사용하시며 와신상담하듯 옛날의 어려움을 잊지 않으셨고 부국을 꿈꾸셨어요”
황비서는 한동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는 시아버님께서는 수차례 이사를 하시면서도 돗자리만큼은 챙겼다고 하셨다. 그리고 옛날 함께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이나 함께 국정을 논의할 분이 오시면 언제나 그 돗자리 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셨다고 했다.
아차 싶었다. 국보급 물건을 태우려 했던 것이다. 그날 기도를 드렸다. 돗자리에 서린 검소의 정신을 이을 수 있도록 기도했다.
7 시어머님 망명 10년만에 귀국이화장의 봄과 함께 기쁜 소식이 잇따랐다. 연금법이 통과됐고 69년 1월부터 연금이 지급됐다. 또 남편도 조교수가 됐다. 숙대 강사, 단국대의 전임강사였던 남편이 단국대 조교수로 승진한 것이다. 이것은 이화장 생활의 또 다른 변화였다. 그동안 어렵기만 했던 이화장 살림이 조금 나아졌다.
남편은 연금이 나오자 마자 오스트리아에 계신 시어머님께 연락을 했다. 남편은 당장이라도 어머니를 모시고 싶어 했다. 하지만 시아버님 일로 몇번 귀국하셨던 시어머님께서는 결혼 예물로 반지와 시계를 전해 주시며 당장 귀국하시지 않고 아이를 낳으면 귀국해 아이를 키우겠노라고 말씀하셨다.
“두분이 하와이에 계실 때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연금이 지급된 후 남편의 첫마디였다. 시어머니는 연금을 보내주려는 남편에게 “곧 한국에 갈테니. 살림에 보태쓰고 저축하라”고 하셨다.
연금은 이화장 생활에 정말 큰 도움을 주었다. 본관인 한옥이 낡으면서 비가 세는 곳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동안 돈이 없어 수리를 못했던 것치고는 깨끗히 보관된 편이었다. 남편을 비롯한 이화장 사람들의 노력을 알 수 있었다.
남편은 이화장이 특히 낡은 모습 그대로였던 까닭이 시아버님의 고집 때문이었다고 말해주었다. 생전 시아버님께서는 “공직을 가진 사람이 자기 집 수리를 하게 되면 부정이 싹튼다”며 이화장 수리를 미루셨다.
연금과 남편의 월급으로 급한 곳을 수리했다. 생활은 여전히 내핍과 검소가 요구됐다. 하지만 나도 이제는 이화장의 사람이었다. 시부모님들이 덧버선도 기워서 신으셨듯 남편을 비롯한 우리 가족들도 역시 최소한의 지출로 살림살이를 살았다.
여기에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첫 아들 병구를 임신한 것이다. 69년 11월 17일부터 나는 태교를 시작했다. 더욱 몸가짐이 조심스러웠다.
첫아들의 임신으로 약속처럼 시어머님께서도 귀국하시게 됐다. 시어머님께서는 결혼식을 전후해 몸이 좋지 않으셨다. 그것이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하셨던 이유였다. 몸이 약하신 시어머님께서 불편하지 않도록 세심한 준비를 해야 했다.
70년 5월 16일. 마침내 시어머님께서는 완전 귀국하셨다. 첫아들이 6개월째 되던 때였다. 시어머님이 60년 하와이 망명이후 10년만의 귀국이셨다. 그리고 그해 시어머님은 6월 15일 70회 생일을 맞으셨다. 시어머님의 귀국에는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이셨고 우리는 최선의 준비로 생일 잔치를 마련했다.
좋지 않은 모습으로 고국을_시어머님께서는 한국을 고국이라 생각하셨고 귀국해서는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 외국에 나가시지 않으셨다_떠나셨기에 준비에는 더욱 소홀함이 없어야 했다.
시아버님께서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한국에서 운명을 맞으시길 소원하셨다. 곁에서 그런 모습을 보시면서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시어머님께서는 그런 모든 것에 대해 일일이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귀국해서 모시게 된 시어머님은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분이셨다. 그리고 하루라도 기도를 잊지 않으셨고 매일 성경을 한구절씩 읽으시는 그런 분이셨다.
8 시어머님의 `한국 틀니'사랑 인상적
시어머님에 관한 것 중에서 잊혀지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시어머님이 한국에서 오시자마자 틀니를 하신 일이다.
귀국하신후 어느날 시어머님이 부르셨다. 한 뭉치의 달러를 내놓셨다. 외국에서 시어머님이 모으신 돈이었다. 시어머님께서는 그 돈을 속옷에 꿰매 가져 오셨던 것이다. 시어머님의 속옷은 아직도 이화장에 보관돼 있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시어머님은 그 돈을 내놓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얘야 이 돈으로 틀니를 해야겠다”
시어머님이 이가 좋지 않으신 것을 알았지만 뜻밖의 일이었다.
“네? 외국에 계실때 틀니를 하고 오시지 그러셨어요”
“무슨 소리니. 한국의사만큼 틀니를 잘하는 의사가 없다고 하더라. 그런데도 한국이 다른 곳보다 싸다고 하더라” 잠시 말씀을 멈추셨던 시어머님은 이어 힘주어 말씀하셨다.
“그리고 얘야. 네 시아버님은 단돈 1달러에도 벌벌 떠시는 분이셨다는 것을 알고 있니. 그런데 이런 거금을 어떻게 외국 치과의사한테 주고 틀니를 할 수 있겠니. 그러니 네가 한번 알아보렴”
그 때 느꼈다. `참 대단한 분이시구나' 시어머님이 새롭게 보였다. 하지만 치과쪽으로는 전혀 아는 사람이 없어 걱정이 됐다.
“하지만 어머님. 제가 아는 사람이 없어요”
“걱정하지 마라. 중앙의료원인 메디컬센터(현 국립의료원)에 가면 좋은 의사가 많다”
중앙의료원은 외국의 의료지원을 받기위해 건립된 병원이어서 시어머님이 잘 알고 계셨다. 시어머님 말씀대로 중앙의료원에 아는 사람을 찾아 보았다. 하지만 이게 무슨 인연인가. 친정 아버님의 절친한 친구분인 차윤근박사가 중앙의료원의 원장으로 계셨다.
차박사을 통해 시어머님의 치료시간을 정했다. 약속시간은 오전 9시였지만 늦기 싫어하시는 시어머님이 서두르셔서 오전 8시45분쯤 도착했다. 차박사께서는 시어머니께서 한국말을 못하시는줄 알고 “아니 벌써 왔어”하고 말씀하셨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차가 막힐까 봐서요” 시어머님이 대답하시자 차박사는 깜짝 놀랐다. 시어머님은 유창하지는 않으셨지만 일반적인 회화에는 문제가 없으셨다. 그전에는 더 잘하셨지만 10년간 외국생활을 하면서 잊으셨던 탓에 한국어 실력이 줄으신 상태였다.
어쨌든 이날 맞춘 틀니는 상당히 훌륭했다. 시어머님의 이후 평생 사용하셔도 잘못되거나 하는 법이 없었다. 마음껏 음식을 드실 수 있게된 시어머님은 건강이 좋아지셨다. 그리고 한국 틀니에 대한 사랑도 깊어가셨다.
시어머님께서는 외국손님을 치르기만 하면 틀니 자랑을 하셨다.
“한국의 치과 의사가 세계 최고인 것을 아세요. 틀니가 필요하시면 한국에 계실 때 맞춰가도록 하세요”
시어머님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은 시어머님의 시아버님에 대한 애뜻한 정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시어머님은 매주 한차례씩 동작동 국립묘지에 있는 시아버님의 묘소를 찾는 일을 거르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분에게 기도와 같은 일이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시어머님은 매주 한차례 시아버님 묘소를 찾으셨다.
9 남편 “선친 재조명” 미국 유학시어머님이 돌아오시고 안정을 찾은 이화장에 변화가 찾아왔다. 남편이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남편은 오래전부터 시아버님의 역사적 재평가 작업을 하고 싶어했다. 사실 국내에서 시아버님의 평가는 상당 부분이 잘못돼 있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소천하시는 그 날까지 검소하게 부국을 꿈꾸시던 분이 정치적인 입장들의 틈바구니에서 너무 평가 절하되어 있었다.
남편은 그런 부분들을 정치, 학문 등 모든 분야에서 새롭게 평가하고 싶어했다. 그 준비로 남편은 단국대 조교수 시절부터 정치학을 따로 공부하고 있었다. 시어머님이 오시기 이전인 70년 2월27일 남편은 경희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유학 결정이 쉬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학비 문제, 가정문제까지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었다. 71년 둘째 아들이 태어났고 남편은 유학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냈다.
“당신이 힘들거라는 것은 알아. 조교수의 월급도 이제는 포기해야하고…. 하지만 이 일을 내가 아니면 누가 한단 말이오. 당신이 이해해 주구려”
“그렇지만 시어머님도 오신지 얼마되지 않았어요” 남편을 말렸다. `학비도 문제였지만 둘째도 있는데 남편과 이별을 해야한다니'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남편 가슴속에 불타고 있는 열정은 억누르기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작정 말릴 수만은 없었다. `시아버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런 분의 아들로 남편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여러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열심히 기도를 했고 어떤 것이 남편을 위한 길인지 하나님의 답을 소망했다.
그런 가운데 남편은 계속 유학에 대해 여러 곳에 문의를 하고 있었다. 한미재단에서 남편에게 장학금을 지불키로 했다. 학교도 미국 뉴욕대학으로 정해졌다. 결국 기왕 가는 길이라면 남편이 편하게 빨리 박사학위를 받아오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난제였던 학비 문제가 해결되면서 남편의 유학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얼마동안 남편을 따라 갈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오랜만에 귀국하신 시어머님을 두고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특히 시어머님이 아이들이 외국에 장기간 머무는 것을 반대하셨다. “아이들만큼은 철저한 한국아이들로 키워야 한다” 시어머님은 누차 강조하셨다.
혼자 떠나게 된 남편 역시 마음이 편했던 것은 아니었다. 남편은 자신의 결정에 찬성해준 내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표시했다. “걱정하지 말구려. 5년이면 박사학위를 받을테니 조금만 참으시오” 걱정하는 내게 가끔 위로도 잊지 않았다.
마침내 남편의 미국유학 날짜가 잡혔다. 72년 11월4일 남편은 출국했다. 원래 하루전 둘째 아들 돌날 출국하려 했지만 시아버님 묘소 정비 문제가 있어 하루 늦춰졌다. 미국에는 남편 생가쪽 남동생인 이범수씨 내외가 의사로 활동하고 있어 그나마 마음에 위안이 됐다.
이렇게 남편의 8년간 유학생활이 시작됐다. 5년을 예상했지만 박사학위 취득에는 8년이 걸렸다. 그리고 남편의 유학은 내게 이후 8년간 또 다른 역경의 시작이었다.
10 국민 돈받아 편히 지낼 수 있나”남편의 유학과 함께 살림이 다시 위축됐다. 시어머님 연금과 자동차 보조비만을 가지고 생활해야 했다.
연금은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당시 이화장을 관리하며 생활하기에는 부족했다. 특히 75년 시아버님 탄생 1백주년 기념식 등 크고 작은 행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방비 등 여러 가지 쓰임새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내게 또 다른 부담은 시어머님을 홀로 모시게 된 일이었다. 시어머님은 항상 정갈하시고 남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하는 분이어서 곁에서 모시기 힘들었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라면 공감하듯 시어머님을 모시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어머님은 이화장의 모든 경제권을 쥐고 계셨다. 살림살이에 필요한 단돈 10원이라도 시어머님에게 타서 써야했고 가계부를 써서 다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시어머님은 평생을 검소하게 사신 분이셨다. `속옷을 꿰매고 겉옷은 차려 입고'라는 이화장의 검소한 정신은 모두 시어머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생활의 교훈이었다. 그래서 어려운 가운데도 이화장 살림은 언제나 흑자였다.
시어머님은 이화장을 수리하는데도 많은 돈을 쓰는 걸 바라지 않으셨다. 누구라도 이화장을 수리하고 꾸미자고 말을 건네면 시어머님은 단호히 말하셨다. “내가 어렵게 사는 국민들의 돈을 받아 어찌 집수리를 하고 편하게 지내겠냐”
그러던 중 기억에 남는 사건이 터졌다. 76년인지 77년인지 정확히 기억되지는 않지만 여름 장마에 이화장 지붕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바로 시어머님이 주무시던 방의 옆방 지붕이었다. 집안이 온통 물로 가득 찼다.
모두가 놀랐다. 시어머님의 안부가 걱정돼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머님, 어머님 괜찮으세요” 차가운 물에 시어머님도 무슨 일인지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래 너희들은 괜찮냐”
놀라신 가운데도 시어머님이 다른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다행히 그날 가족들 중 누구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 거의 지붕전체가 무너졌으나 다친 사람은 없었다. 정말 다행인 것은 그 날 지붕이 무너지는 굉음에 둘째 아들은 며칠간 헛소리를 할 정도로 놀랐지만 시어머님은 한쪽 귀가 어두우셨기 때문에 놀라시지도 않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 일은 청와대까지 알려졌다. 박정희대통령이 친절하게도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통해 지붕수리비를 보내주었다. 그밖에도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 등 많은 분들이 걱정어린 관심을 보여주었다.
특히 김옥길 총장께서는 계속 사람을 보내 지붕관리를 해주셨다. 김옥길 총장은 자주 이화장을 찾아와 시어머님과 함께 기도를 하시던 분이었다. 또 여러 가지로 이화장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시던 분이다. 시아버님의 추모 행사 때마다 도움을 주셨고 또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서 이화여대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울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그럼에도 이화장은 비가 샜다. 그리고 시어머님과의 이화장 생활도 큰 변화가 없었다. 조금만 힘들어도 남편이 그리울 때가 많았다. 그 때마다 기도로 참는 길 밖에 없었다. 시어머님은 국제전화 한통, 편지 우표값 하나라도 아끼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11- 끝없는 내핍…가뭄걱정에 목욕 금지시어머님의 검소는 새댁에게 지나친 부담이 되기도 했다. 시어머님은 오스트리아 빈에 사시는 당신의 친척에게도 국제전화 한통 하지 않으셨다. 오로지 편지만 쓰셨을 뿐이다. 가끔 “전화 한번 하세요”라고 권하면 시어머님께서는 “국민들이 쌀 한톨을 아껴서 내는 세금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하겠니”하며 반대하셨다.
시어머님도 시어머님이지만 문제는 신혼에 생이별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문제였다. 미국에 유학중인 남편의 목소리라도 들으면 좋으련만 시어머님 앞에서 감히 전화 한통 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참고 참았지만 남편에 대한 그리움에 가끔 심통이 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시어머님을 찾아 따지기도 했다. “남편에게 국제전화 한통 정도는 마음 놓고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하지만 그 때마다 시어머님은 “휴전선 저편 가족에게 편지 왕래도 못하는 이산가족들이 내는 세금을 가지고 어떻게 전화를 할 수 있느냐”고 잘라 말씀하셨다.
시어머님의 단호한 반대에 나는 항상 따라야 했다. 시어머님이 경제권을 쥐고 계셨기도 했지만 오스트리아 빈에서 생활하고 있는 당신의 친척에게까지 국제전화 한통 않는 분이셨기에 감히 반박할 수 없는 노룻이었다.
특히 빈에 사시는 시어머님과 당신의 언니가 얼마나 다정한 사이였는지 알고 있어 더욱 반박할 수 없었다. 시어머님의 귀국 때 수행을 했던 당시 오스트리아 주재 대사였던 유양수씨는 귀국전 공항에서 시어머님이 함께 사셨던 세살 위의 언니와 한동안 손을 놓치 못하고 눈물을 훔치셨다고 전했다.
시어머님이 이끄시는 이화장의 내핍생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이든 분이 손빨래를 직접 하시는 것은 물론 10여년이 넘은 앞치마를 직접 꿰매 입도록 하셨다. 74년 여름에 최치환 국회의원이 금성사에서 처음으로 에어콘을 생산하게 돼 시어머님께 선물을 한 적이 있었다. 시어머님은 선물을 받자마자 선풍기로 바꿨다. 전기료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선풍기마저도 함부로 틀지 못했다. 시어머님은 손님이 와야 선풍기를 틀도록 허락하셨다.
언론에서 가뭄 걱정을 하는 뉴스가 나오면 이화장에서는 목욕조차 금지됐다. 시어머님은 아이들을 위해 받아놓은 물에 수건을 적셔가며 손수 씻기셨다. “물 조금, 전기 조금 …” `조금, 조금'이란 단어가 시어머님의 말씀끝에 항상 따라 붙었다.
그런 가운데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결국 병이 되었다. 남편 유학 기간이 6년을 넘어서면서 온 몸이 아팠다. 가끔씩 시어머님 몰래 남편에게 국제전화를 했지만 일시적으로 나아질뿐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깊어만 갔다. 또 시어머님께는 죄책감마저 들어 병은 더욱 심해졌다.
누구의 위로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한시 바삐 시간이 흘러 남편을 다시 볼 수 있다면 하는 조바심으로 하루 하루를 보냈다. 돌이켜보면 이때 `시어머님처럼 신앙심이 깊었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해 본다.
나의 그런 조바심과는 달리 시어머님은 항상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수십년을 떨어져 지내면서 당신의 친가족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마는 시어머님은 언제나 기도로 그리움을 극복하셨다. 조용히 성경을 펼쳐 읽고 계시는 모습. 아직도 이화장을 지키는 가장 큰 힘이다.
13) 이화장 안주인 조혜자집사
[국민일보]1999-05-11 55판 24면 1487자 생활·여성
남편 마침내 박사학위81년 여름 남편이 돌아왔다. 오랜 유학 끝에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그것으로 나의 모든 병도 나았다. 불면증도 절뚝이던 발도 모두 나았다.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는다는 소식에 모든 피로도 씻은 듯 사라졌다.
소식을 듣자 당장 시어머님의 허락을 얻어 미국으로 갔다. 시어머님도 흔쾌히 승낙하셨다. 그동안 며느리의 고민을 잘 아셨던 때문인지 두말 없이 허락하셨다.
가슴이 가벼워지니 이화장이 갑자기 밝아진 듯했다. 나무와 잔디는 신선한 초록으로 더욱 푸르러 보였고 꽃들도 영롱한 색으로 송이송이가 선명해졌다. 정원을 걷다보면 절로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
“아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었다. 시어머님의 건강도 그렇고 남편 친아버님의 은밀한 보살핌도 고마웠다. 그 분은 평소 서울에서 주례를 많이 보셨는데 주례를 맡는 날이면 언제나 미리 연락을 주셨다. 가끔씩 용돈을 주시기도 했고 아이들의 옷가지를 마련해 전해주시기도 했다. 그 분을 직접 모시지는 못했지만 며느리에 대한 사랑만큼은 흠뻑 받았다.
시어머님도 그런 것을 알고 말없이 지켜보셨다. 80세가 되셨지만 시어머님은 언제나 정정하셨다. 아마 그것은 시어머님의 검소한 식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어머님은 평생 현미에 밀기울까지 함께 드셨다. 그것이 요즘은 일부 사람들이 건강식으로 먹기도 하지만 시어머님은 쌀 한 톨도 아끼려는 마음에서 그렇게 드셨다.
시어머님은 들떠하는 며느리를 미소로 격려하셨다. 마치 `그래 네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알고 있단다'고 말씀하시는 듯했다. 출국준비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또 오래 머물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준비도 필요치 않았다.
드디어 출국. 미국에 가게 된 것은 6월초였다. 그동안 남편은 가능한 한 귀국하지 않으려 했었다. 가끔 시아버님의 일로 귀국을 해도 얼마 머물지 않고 다시 떠났다. 자신의 친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귀국해 1주일만 머물렀을 뿐이다.
`남편은 어떻게 변했을까' 비행기 안에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고 그동안 투정이 부끄러워졌다. 시어머님께도 죄송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정말 더욱 잘해드려야지' 다짐과 기대로 언제 어떻게 미국에 도착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당신 고생 많았지. 이제 내가 도울테니 걱정하지 말구려” 공항에서 만난 남편이 말했다. “아니에요. 당신이 더 고생이 심했어요” 우리는 두 손을 꼭 잡고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미국에서 남편과 보낸 시간은 행복의 최절정이었다. 함께 머물며 그동안 어떻게 생활하고 공부했는지를 들었다. 그동안 학비 등 여러 문제도 남편도 마음 편히 공부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장학금이 나왔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고통들은 우리의 행복을 더욱 달콤하게 만들기 위한 감미료가 되었다. 우리는 미국에서 오래 머물지는 않았지만 둘만의 시간을 가지며 최대한 그 시간들을 즐겼다. 그리고 자랑스런 남편의 박사 수여식에 참석한 뒤 함께 귀국했다.
14 가정에 행복주신 하나님께 감사남편이 돌아온 이화장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남편은 결심한데로 선친인 고 이승만 박사의 역사적 재평가 작업을 벌였다. 시어머님은 여전히 건강하셨다. 남편이 귀국하고 92년 3월 19일 시어머님이 소천하시기까지 이화장에는 큰 분란없이 평온함이 이어졌다.
이화장은 82년 12월 `지방기념물 제6호' 지방문화제로 지정되었고 84년에는 서울시에서 수리를 해주었다. 정원은 더욱 깔끔해졌고 나무와 푸른 잔디는 더욱 단정해졌다. 남편과 저녁에 틈을 내 정원을 산책하다보면 `아 이것이 행복이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런 행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시어머님의 기도도 계속됐다. 시어머님은 가족의 평온과 함께 조국의 안녕을 위한 기도도 잊지 않았다. 언제나 국민들의 평화를 바라는 기도들. 모든 점에서 시어머님은 완전한 한국인이셨다. 시어머님 국적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시어머님이 오스트리아에 계실 때 이야기다. 당시 오스트리아 대사였던 유양수 대사는 오스트리아의 제 1호 `대한민국' 시민이 시어머님이었다고 전했다. 오스트리아에는 북한 사람들도 왕래를 하여 오스트리아 공무원들이 우리 한국인을 쉽게 알아 보게 하기 위하여 시민증을 만들어 주게 되었는데 1호 시민증이 시어머님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시민증은 오스트리아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편의상 제작된 것으로 법적인 효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장기체류중인 한국인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이다'라는 소속감을 높히는데 일조를 했다. 당시 시민증을 받았던 사람들은 장기 체류중인 유학생, 취업자, 기업인 모두에게 교부되었고 시어머님은 그 분 스스로가 한국인임을 자랑으로 여기셨다.
시어머님의 조국 사랑은 생활의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잘 나타났다. 며느리가 작성하는 가계부를 보름마다 10원짜리 하나 꼼꼼히 점검하시고 매사에 `조금, 조금'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셨던 분이셨지만 독도사랑회에는 아낌없이 10만원을 기증하시는 그런 분이셨다. 남들이야 10만원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시어머님 한테는 10만원이면
10억원이나 다름없는 큰 돈이었다.
그런 시어머님은 이화장의 상징이셨다. 그분의 조국 사랑과 검소한 생활은 이화장을 찾은 여러 사람들을 통해 담밖으로 전해졌다.
하루는 이화장에 도둑이 들었다. 경찰들과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도와주었고 결국 고 이승만 박사의 유품들은 도난 두달만에 돌아왔다. 당시 시어머님은 유품들을 찾는데 도움을 준 경찰관들의 부인 20여명을 초청 다과회를 마련해 주었다. 부인들은 시어머님과 함께 경무대 시절 대통령 내외가 사용했던 생활용품과 시어머님의 검소한 생활 태도를 목격하고 돌아가더니 이구동성으로 “박봉의 남편에 대한 불만이 씻은 듯 가셨다”고 말했다.
유학직전 명지대 조교수로 적을 옮겼던 남편은 81년 9월 귀국이후 부교수로 승진하였다. 남편은 그후 선친인 고 이승만 박사의 유물과 관련 자료들을 수집했다. 이화장을 기념관으로 개관하려는 계획이 남편에게 서있었다. 시어머님도 남편을 도왔다. 기념관 개관은 이승만박사 탄생 1백13주년을 맞아 공개키로 했다.
15 이화장 방문객들 `검소한 삶' 감탄남편이 돌아오고 시어머님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보냈다. 고 이승만 박사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차분히 진행됐고 무엇보다 이화장을 개방해 시어머님과 시아버님의 생활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남편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모아 이화장에 전시했다. 82년 지방 문화재로 지정됐던 이화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 남편과 시어머님은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고 이승만 박사의 생활모습과 건국관련 됐던 비화들을 알렸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화장을 방문했던 많은 사람들은 건국 당시 조국의 운명을 결정했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무엇보다 시어머님은 이화장의 상징이었다. 이화장을 방문했던 어른들은 시어머님의 검소한 생활 모습에 감탄했다.
많은 사람들이 시어머님이 경무대 시절부터 쓰시던 타자기나 양산 등을 보고 놀랐다. 특히 주부들은 시어머님의 검소한 생활 양식에 탄복을 했다. 생활속에 나타난 시어머님의 조국애 실천도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시어머님은 92년 3월 19일 소천하시기 전까지 많은 이야기를 남기셨다. 특히 74년 8월 육영수 여사의 장례식 때 하셨던 말씀은 잊을 수가 없다. 육영수여사의 장례식을 TV를 통해 보시던 시어머님은 “내 장례식에는 저렇게 많은 꽃을 사용하지 마라”고 하셨다.
시어머님은 이어 “저런 꽃이 다 음식이라면 얼마나 좋겠니. 방문했던 모든 사람들이 즐겁게 음식을 즐길 수 있지 않겠니”하고 말하셨다. 이 말을 듣자 처음 시어머님이 고국을 찾아 70회 생일을 맞았던 때가 기억이 났다. 당시 시어머님은 “왜 이렇게 꽃을 많이 준비했니. 차라리 음식을 더 준비했으면 많은 사람들과 나눠 먹을 수 있잖니”하고 말씀하셨다.
시어머님은 그런 생각을 20여년간 단 한번도 잊지 않으시고 생활속에 실천하셨다. 시어머님을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기도를 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시어머님은 이화장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중 특히 아이들을 좋아하셨다. 아이들이 이화장을 찾는 날이면 시어머님은 아이들과 함께 이화장 곳곳을 거닐며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주셨다. 시어머님은 언제나 두 손자의 연필을 깎아주고 학업준비를 하셨기 때문에 아이들의 마음을 잘 알고 이해해 주셨다.
그런 때문인지 아이들도 이화장을 떠나며 “할머니 오래 오래 사셔요!” “우리는 할머니가 제일 좋아요” “할머니는 아직도 예쁘셔요” 하고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 때 시어머님의 웃음. 시어머님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시어머님은 언제나 건강하셨지만 워낙 고령이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웠다. 순간 순간 시어머님의 언동에 주의를 해야 했다. 어찌 보면 노인네의 잔소리 같지만 시어머님은 항상 일관되게 며느리에게 주의를 주셨고 그것은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유언처럼 여겨졌다.
시어머님의 틀니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님은 “내가 죽기 전에 틀니를 잊지 말고 꼭 끼워다오”라고 말했다. 90세 생신까지 건강하게 맞으셨던 시어머님은 항상 그렇게 때때로 유언을 하시며 당신의 소천이후를 준비하셨다.
16 역경의열매] (16) 이화장 안주인 조혜자집사
[국민일보]1999-05-14 50판 24면 1534자 생활·여성
“성경·태극기 넣어다오” 시어머니 소천시어머니가 쓰러진 것은 92년 1월28일이었다. 항상 건강했던 시어머니는 그날 하와이한인교회 후원회 조찬모임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 갑자기 쓰러졌다. 처음엔 병원에서도 검사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후 계속 건강이 악화된 시어머니는 결국 3월19일 밤 0시15분 소천하셨다.
“태극기와 성경책을 함께 넣어다오” 시어머니의 유언이었다. 시어머니의 임종은 30여명의 친지들이 함께 해 주었다. 장례식은 5일장으로 23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예배를 올렸다. 생전 매주 꼭 한번씩 찾던 남편의 묘소에서 함께 영면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 시어머니가 쓰러졌을 때 아무도 그것이 소천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만큼 건강했기 때문이다. 단지 92세로 워낙 고령이라 걱정했을 뿐이었다. 쓰러진 뒤에도 시어머니는 항상 밝은 표정이었다. 왕진을 오던 시어머니의 주치의 윤해병 박사와 농담도 했다.
“손주 장가가는 모습은 꼭 보고 싶다”고 하던 시어머니. 시어머니는 말년을 남편의 기념사업들과 88년부터 개방된 이화장에서 방문객을 맞는 것으로 보냈다. 특히 85년 8월15일 시아버지께서 개척한 하와이한인교회에 시아버지의 동상이 건립되고 이날을 `이승만의 날'로 정해 기념했던 일은 시어머니를 가장 기쁘게 했다.
이화장을 찾는 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도 시어머니에게는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특히 아이들을 좋아한 시어머니는 아이들과 함께 이화장 곳곳을 돌아보며 남편의 유품과 생활모습, 그리고 그분의 조국애를 전했다.
누가 보더라도 시어머니의 인생은 특이했다. 동양의 조그만 나라의 독립투사와 결혼한 것부터 초대 대통령 부인이 되고 결국 다시 외국생활을 하게 된 것 등등. 결코 평범한 인생은 아니었다. 또 그만큼 시어머니의 인생에는 한도 많았다. 존경하고 따랐던 남편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을 떠나 결국 이국에서 소천한 것은 시어머니에게 가장 큰 아픔이었다.
하지만 며느리로서 가까이 모시면서 본 그 분의 인생은 참 복된 생이었다. 시어머니는 당신 인생에서의 많은 역할들 중 독립 투사의 부인이었던 것을 평생 자랑스러워 했다. 그 때문에 시어머니의 조국 사랑도 남달랐다. 언제나 국민들을 생각했고 “소원이 있다면 남편이 그토록 바랬던 남북이 통일되는 모습을 살아 생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끔 10년이 넘은 앞치마를 손수 꿰매는 시어머니께 “검소도 좋지만 너무 하시는 것 아니냐”고 물으면 시어머니는 “국민이 아껴야 나라에 돈이 많아진다. 나라가 돈이 많아지면 조국 통일도 절로 된다”고 말하곤 했다.
시어머니의 소천 뒤 그분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화장 가계부를 토대로 `통일준비 알뜰가계부'를 만들어 보급하고 있다. 시어머니 생전에는 그토록 귀찮아 했는데, 참으로 청개구리 며느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시어머니께서 보여준 작은 노력들은 나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참으로 훌륭한 것이 많다. 시어머니 1주기 이후 유품과 생활모습들을 이화장에 전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뜻을 이해하고 본받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다.
이화장 안주인 조혜자집사 -
역경의 열매 신앙 간증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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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 안주인 조혜자집사
[역경의열매] [국민일보]1999-04-21
/정리=박선호 shpark@kukminilbo. co. 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