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역사공부 혜경궁 홍씨 헌경왕후(獻敬王后, 1735~1815) 조선 영조의 아들 장조(莊祖:사도세자)와 동갑 나이이며 비(妃)이며 17세에 정조를 낳았다. ![]() 자신의 일생을 회고한 기록 《한중록》은 궁중문학의 대표작이다. 1744년(영조 20) 혜경궁의 나이 9살에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고, 1762년 장헌세자(사도세자)가죽은 뒤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1776년 혜경궁의 나이 41세에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宮號)도 혜경(惠慶)으로 올랐고, 27세에 남편을 비명에 잃은후 1815년 12월(순조 15) 향년 80세로 운명했다 이듬해 헌경이라는 시호를 받고 사도세자의 현륭원에 합봉되었다. 1899년(고종 36)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의황후(懿皇后)에 추존되었다. 우리들이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저서 《한중록(閑中錄)》은 사도세자의 참사를 중심으로 정조대왕 정조(正祖, 1752-1800) 향년48세 이름 이산 재위 1776년~1800년 할아버지 영조 왕비 효의왕후(孝懿王后) 아버지 장조(莊祖.사도세자) 를 10살때 잃었다. 어머니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홍씨) 효의왕후 효의왕후(孝懿王后, 1753-1821) 향년68세 본관 청풍(淸風).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이다.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 1762년(영조 38) 만9세 때 세손빈(世孫嬪)에 책봉되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잘 섬겨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고, 슬하에 소생이 없어 1790년(정조 14) 수빈(綏嬪) 박씨가 아들을 낳자 왕세자로 삼았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여 60세가 넘어서도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와 혜경궁 홍씨를 공양하여 칭송을 받았다. 일생을 검소하게 지냈으며, 수차에 걸쳐 존호(尊號)가 올려졌으나 모두 거절했고, 1820년(순조 20) 68세가 되어 여러 대신들이 하수연(賀壽宴)을 베풀고자 했으나 사양하였다. 능은 건릉(健陵:水原)이다. 정조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할아버지인 영조의 제4부인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정조의 친할머니인 영빈이씨는 1남 3녀 즉 사도세자 그리고 딸인 화평옹주, 화완옹주, 화협옹주를 슬하에 두었다 화완옹주 다시말해 정조는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이고, 정조의 외조부 홍봉한 정조의 어머니는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惠嬪)이다. 이산(정조)은 1759년(영조35) 세손에 책봉되고, 10세때인 1762년 2월에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1753-1821)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 효의왕후는 1762년 시집오자마자 이해5월에 시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1764년 2월 영조는 제3부인인 정빈 이씨의 소생으로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孝章)세자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 그러니까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뒤를 이은 것이 아니라 배다른 큰아버지인 효장세자의 뒤를 이은것이다. 영조가 1775년(영조 51) 12월, 그러니까 죽기 4개월전에 영조가 세손인 이산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자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이 이를 방해하여 조정이 한때 크게 긴장하였다. 홍인한 홍인한은 정조의 외할아버지의 동생으로 기대를 모을 위치였으나, 탐포하고 무지한 그를 세손이 비천하게 여겨 멀리했다 . 이에 원한을 품고 정조의 친고모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자로서 어미와 함께 권세를 부리던 정후겸(鄭厚謙)에게 붙어 세손의 반대파가 되었다. 화완옹주 정후겸과 화완옹주 홍인한은 세손을 고립시키기 위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궁료 홍국영(洪國榮)·정민시(鄭民始) 등을 참소하기까지 했으나 세손이 이를 듣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 홍국영 세손이 대청(代聽)의 명을 받게 되었을 때는 이를 극력 반대하면서 대청을 명하는 왕의 하교를 받아쓰려는 승지를 몸으로 가로막기까지 했다. 홍인한 그야말로 죽을려고 환장을 했었다.
1745년생 1735년생 시어머니(정순왕후) 며느리 혜경궁 시어머니 정순왕후가 며느리 혜경궁 보다 10살이나 아래였으니 혜경궁도 불편한점이 많았을것이다. 그리고할머니이지만 손자인 정조보다 7살위였다 1776년 3월 할아버지 영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오른 정조는7년 연상인 젊은할머니 정순왕후를 대비로 모시고 어머니 혜빈(惠嬪)을 혜경궁으로 높였다.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도 진종(眞宗)대왕으로 추숭하고, 효장묘도 영릉(永陵)으로 격을 높였다. 그 다음에 생부의 존호도 장헌세자(사도세자)로 높이고, 묘소도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하고 경모궁(慶慕宮)이라는 묘호(廟號)를 내렸다. 자신의 왕통에 관한 정리를 이렇게 마친 다음 홍인한 정후겸 곧 홍인한·정후겸 등을 사사(賜死)하고 재위 13년째인 1789년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 기슭에 있던 것을 수원 화성으로 옮긴 것이다.(융릉) 의빈 성씨 정조 재위10년째에 의빈 성씨에게서 얻은 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1782.9.7-1786.5.11)가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786년 음력 5월 11일에 만4세로 요절한다. 이 당시에는병에 걸리기만 하면 죽는경우가 아주 많았다.
수빈(綏嬪)박씨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자 24년째 정월에 수빈(綏嬪)박씨 몸에서 난 아들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 아이가 훗날 순조(1790-1834)임금이다. 정조는 임금이 된지 18년째인 1794년에 발병한 절후(癤候), 즉 부스럼이 피부를 파고드는 병이 격무와 과로로 아주 심해져 1800년 6월 28일에 49세로 일생을 마쳤다. 부모곁에 묻어달라느 유언에 따라 현륭원 옆에 묻고 건릉(健陵)이라 했다. 그래서 부모님의 융릉과 정조내외의 능인 건릉으로 융건릉이라고 하는 것이다. ------------------------------------------------- 용주사의 역사 본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절이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후 폐사되었었다 그러다가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용주사 경내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아들 정조는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왔다. 용주사 대웅전 앞의 신도들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한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1.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아들따라 죽을려고 했다. 왜 일까? 그 이유를 아래에서 알아보자 시어머니가 높은가, 며느리가 높은가? 웃기지도 않는 어이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웃기는게 아니라 어이없는 일이 있었다. 혜경궁 혜경궁(시어머니)과 효의왕후(며느리)의 서열은 정조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당연히 혜경궁이 며느리 효의왕후의 위로 대비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정조할머니정순왕후 정조부인효의왕후 정조어머니 혜경궁 하지만 혜경궁의 아들 정조가 죽은후 혜경궁의 시어머니인 정순왕후에 의해서 내명부 서열이 다시 정해졌는데 그 때 서열을 시어머니(혜경궁)를 며느리(효의왕후)의 아래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로 인해 아랫사람들의 조석문안 순서가 며느리(효의왕후)보다 시어머니(혜경궁)가 며느리인 효의왕후 밑으로 내려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효의왕후 그러나 효의왕후는 시어머니의 마음이 다치는 것을 염려해 대전과 중궁이 자신에게 먼저 문안하는 것을 여러번 거부했다고 한다. 혜경궁 혜경궁은 친손자 순조의 가례때 폐백조차 받지 못하는 엄청난 굴욕까지 맛봐야 했답니다. 어머니 혜경궁은 아들 정조가 세상을 떠난 영춘헌에서 목숨을 끊으려까지 했다니 아들을 잃은 비통함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설움이 얼마나 컸는지 알 것 같습니다. 정말 죽고 싶었을 겁니다. 정조가 죽은후에 당시 궁중서열은
1.정순왕후(대왕대비, 영조의 계비 ), 2.효의왕후 (왕대비,정조의정비 ),혜경궁의 며느리 3.순원왕후( 순조의 비), 혜경궁의 손자며느리) 4.혜경궁(사도세자의 비 )정조의 어머니, 5.수빈박씨(정조의 후궁, 순조의 생모 ) 순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며느리들은 서열에 관계없이 시어머니인 혜경궁을 잘 모셨다고 한다 특히 효의왕후는 혜경궁을 지극정성 모셨다고 한다. 한중록을 비롯한 여러 기록에 의하면 웃전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고 국모의 자질이충분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혜경궁은 효의왕후를 '효부'라며 무척 아꼈다고 합니다. 또 수빈박씨도 웃전을 공경하고 성품이 온화해 현빈(賢嬪)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혜경궁은 정실며느리인 효의왕후와 화빈윤씨, 수빈박씨에게는 자애로웠으나 원빈홍씨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좌로부터 효의왕후 화빈윤씨 수빈박씨 원빈홍씨는 홍국영이 정조를 이용해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야망으로 여동생을 후궁으로 들이민 것이라 여긴 혜경궁은 홍국영 원빈홍씨 내명부의 으뜸인 중전 효의왕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元(으뜸 원)"이라는 빈호를 사용한 것 부터못마땅하게 여겼다. 5. 혜경궁은 정조의 어머니인데도 대비가 못되고 며느리는 고사하고 손자며느리보다도 열에서 밀리는 서러움을 당했을까. 그것은 사도세자비 혜경궁홍씨는 아들인 정조가 사도세자의 아들이지만 죄인인 사도세자의 뒤를 이은것이 아니라 큰아버지 효장세지의 양자로 즉위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영조는 임오화변(뒤주사건)이 일어난 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에게서 '죄인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를 떼주기 위해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 부부의 아들로 입적을 시켰다. 그러니까 혜경궁은 법적으로 정조의 어머니가 아닌것이다. 정조가 양자로 가버렸으니 생모자격만 있는것이다 그 후 정조가 즉위 일성으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긴 했으나 할아버지 영조가 생전에 자신이 죽은 후에 사도세자의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유지를 남겼기 때문에 그 의리를 지킨다는 뜻으로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 묘호를 영우원, 사당을 경모궁으로 높이는 것에 그쳤다. 어쨌든 사도세자는 왕으로 추존되지도 못했고 정조의 법적인 아버지의 지위도 되찾지 못했다. 혜경궁홍씨 역시 남편이 추존되지 못했기에 대비가 되지 못하게 돼서 정조가 죽은후에 설음을 많이 받게된것이다. 반면 정조는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그의 비는 효순왕후로 추존하면서 법적인 아들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훗날 고종 대에 이르러서야 사도세자는 장조로, 혜경궁은 헌경왕후로 추존되였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가 뒤주속에서 죽는 바람에 일찍 청상과부가 되고 아들의 법적 어머니의 지위까지 잃으면서 평생 어정쩡한 위치에 머물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게다가 친정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자들 가운데 끼여있었기 때문에 아들에 의해 친정이 풍비박산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아들의 효도를 받는 모순의 삶을 살았다. 한중록으로 이 세상에 더 알려진 비련의 여인! 서럽고 한많고 눈물많은 인생으로 한세상을 살다간 혜경궁에게 동정이 간다
위의 여러사진들은 알기쉽게 설명을 위해 드라마 이산에서 퍼온사진들입니다. ----------------------------------------------------- 위의 글은 평소 정조대왕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 용주사 융건릉등을 역사탐방차 방문한후 알기쉽게 역사조명을 다시 한번 해본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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