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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좋은글

옛시조감상

名詩感想(명시감상)

우탁의 탄로가(嘆老歌)

한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一手杖執(일수장집) 又一手荊棘握(우일수형극악)
老道棘握防(노도형극방) 來白髮杖打(래백발장타)
白髮自先知 (백발저선지) 近來道(근래도)

사인 역동 우탁 작(舍人易東禹倬 作)

우탁 [禹倬, 1263~1342]은


본관 단양(丹陽)
호 백운(白雲) ·단암(丹巖)
별칭 자 천장(天章) ·탁보(卓甫),

시호 문희(文僖), 역동선생(易東先生)

본관 단양(丹陽). 자 천장(天章) ·탁보(卓甫). 호 백운(白雲)

·단암(丹巖). 시호 문희(文僖).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불렸다.

문과에 급제,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어

민심을 현혹한 요신(妖神)의 사당(祠堂)을 철폐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 때

충선왕이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밀통한 것을 알고 이를 극간한 뒤 벼슬을 내놓았다.

충숙왕이 그 충의를

가상히 여기고 누차 불렀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뒤에 성균좨주(成均祭酒)를 지내다가 치사(致仕)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정주학(程朱學) 서적을 처음으로 해득,

이를 후진에게 가르쳤으며, 경사(經史)와 역학(易學)에 통달하였다.

우탁을 제향하는 역동서원은

1696년(숙종 22년) 안동군 월곡면 송천동에 창건되었으나,

1991년 안동대학교가 명륜동에서

송천동으로 이전하면서 역동서원이 교내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해 4월 안동대학교에 기증하게 되면서

안동대학교 부속서원으로 박물관에서 소장, 관리하고 있다.

충북 단양군 대강면에 있는

사인암은 그의 행적 때문에 지어진 기암절벽으로 유명하다.

사인암

사인암은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인암리에 있는 명승지이다.

단양 팔경의 하나로,

단양의 강변에 있는 가파른 암벽이다.


우탁이 사인(舍人.임금 가까이 모시던 정4품)벼슬에 있을 때

청유(淸遊.속진을 떠나 명산에 휴양)하던 곳이라 해서

조선성종때의 단양군수 이제광이 사인암이라 명명했다한다.

'단양팔경'(丹陽八景)은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 구담봉,

옥순봉, 도담삼봉, 석문, 사인암 등을 지칭한다.

사인 [舍人]은
신라시대의 관직으로

궁중에서 국왕·동궁(東宮)을 받드는 일을 맡았다.

신분계층상 제5계층인 4두품 의

상한(上限) 관계인 12관등

대사(大舍)와, 13관등 사지(舍知)를 총칭한 것이 다.


암벽에는 우탁의 친필 감회가 새겨지고

시비에는 우탁의 탄로가(嘆老歌)가 전한다.

이세상 나이이길 장사 어느 누가있으며,

가는 세월앞에 초연할수 있으랴..


늙는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고 하였더니

백발은 저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는 것을 ..

순리인줄 알면서도 희끗한 백발과

늘어가는 깊은골(주름)을

여유롭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몇이나 될것인가!


우탁의 탄로가(嘆老歌)


춘산에 눈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듸 없다
져근덧 비러다가 마리우희 불고니져
귀밋테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가 하노라

사인 역동 우탁 작(舍人易東禹倬 作)

春山(봄동산.청춘)에 눈녹인 바람 잠깐 불고 간데없다
잠시동안 빌려다가 머리위로 불게하고 싶구나

귀밑에 해묵은 서리(백발)을 녹여볼까 하노라


눈을 녹인 춘풍을 붙들어

귀밑에 해묵은 서리(백발)를

검게 하고 싶다는 감탄스러운 시구가 정말 멋지다.

봄이 오는 산에 남아있는 희끗한 잔설과

검은머리에 생겨나는 희끗한 백발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이화에 월백하고

(다정가) 이조년

이화(梨花)에 월백(月白) 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야

잠 못 들어 하노라.


하얗게 핀 배꽃에 달은 환히 비치고

은하수는 돌아서 자정을 알리는 때에,

배꽃 한 가지에 봄날의 정서를

자규가 알고 저리 우는 것일까마는

다정 다감(多情多感)한 나는 그것이 병인 양,

잠을 이루지 못하여 하노라.


봄날의 한밤중을 배경으로 하여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눈물을 머금은 듯한 배꽃,

어디선가 피를 토하듯

두견의 울음소리가 더욱 애상적인 정서를 안겨 주는데,

어이 다정 다감한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잠을 이룰 수 있으랴.

이시조를 감상하다보면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그리움을 노래하면서도 슬프고 감상적이다.

이조년 [李兆年, 1269~1343]


본관 성주(星州). 자 원로(元老). 호 매운당(梅雲堂) ·

백화헌(百花軒). 시호 문열(文烈).

1294년(충렬왕 20)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안남서기(安南書記)와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 ·비서랑을 역임하였다.

1306년 (충렬왕32) 비서승 재임 중, 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을 충렬왕의 후계로 삼으려 했다.

이조년은 이에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충렬왕을 보필하였으나

결국 누명을 쓰고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

유배 후 13년간 고향에서 숨어지냈다.

1330년 충숙왕 귀국 후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郞)을 거쳐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승진,수차례 원나라에 다녀왔다.

1340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왕의 음탕함을 간하는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듬해 사직했다.

후에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이 되었다.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

충혜왕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를 남겼다.


이조년[李兆年,1269~1343. 향년75세]은

우탁[禹倬,1263~1342.향년80세]보다 6년 아래로 같은시대사람이다



두견새는

자규, 촉조, 촉혼, 접동새, 소쩍새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철새다.

그 울음소리가 ‘솟적솟적’ ‘접동접동’으로 들리기도 하고
‘어쩜… 어쩜…’으로 들린다고도 한다.

전설에는 촉나라에서 쫓겨난 망제의 혼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해 원한에 사무친 울음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시나노래 가사에 두견새가 많이 등장한다.

두견새우는 사연. 두견새우는 청령포



두견새가 슬피우는 사연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촉왕본기(蜀王本紀)〉

및 《화양국지 (華陽國志)》 〈촉지(蜀志)〉 권3에 전한다.

중국 촉나라 왕인 망제의 혼이

두견새가 되었다는 내용의 전래민담으로 전하는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옛 중국의 촉(지금의 쓰촨성)에

이름은 두우(杜宇), 제호(帝號)는 망제(望帝)라고 불린 왕이 있었다.

어느날 망제가 문산(汶山)이라는 산 밑을 지날 때

산 밑을 흐르는 강에

물에 빠져 죽은 시체 하나가 떠내려오더니

망제 앞에서 눈을 뜨고 살아나는 것이었다.

망제는 이상히 생각하고 그에게 물으니

"저는 형주(刑州) 땅에 사는 별령(鱉靈)인데,

강에 나왔다가 잘못해서 물에 빠졌는데

어찌해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망제는 하늘이 자신에게

어진 사람을 보내 준 것이라고 생각해

별령에게 집과 벼슬을 내리고 장가도 들게 해 주었다.

망제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마음도 약했다.

정승자리에 오른 별령은연중 불측한 마음을 품고

대신과 하인들을 모두 자기 심복으로 만든 다음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때마침 별령에게는

천하절색인 딸이 있었는데,그는 이 딸을 망제에게 바쳤다.

망제는 크게 기뻐하여 국사를

모두 장인인 별령에게 맡기고 밤낮으로 미인과 소일하며 나라를 돌보지 않았다.

이러는 사이 별령은 여러 대신과 짜고

망제를 나라 밖으로 몰아내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하루아침에 나라를 빼앗기고

타국으로 쫓겨난 망제는

촉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온종일 울기만 했다.

마침내 망제는 울다가 지쳐서 죽었는데,

한맺힌 그의 영혼은 두견이라는 새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不如歸:돌아가지 못한다는 뜻)를 부르짖으며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었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은

이 두견새를 망제의 죽은 넋이 화해서 된 새라 하여

'촉혼(蜀魂)'이라 불렀으며,

원조(怨鳥)·두우(杜宇)·귀촉도(歸蜀途)·망제혼(望帝魂)이라고도 불렀다.

구전설화로서 동물 변신담에 속하며

한(限)이 많은 우리 민족의 정서와도

잘 어울려 서정주(徐廷柱)의 시 《귀촉도(歸蜀途)》와

오영수(吳永壽)의 소설 《소쩍새》 등 많은 문학작품의 소재로 쓰이고 있다.

출처. 두견새설화


두견화(杜鵑花)

진달래를

두견화(杜鵑花)라고 하고

접동새를 일명 두견새라고도 한다.


두견새는 봄에 오는 철새로서 이로운 새인데

두견새의 특징은 숲속에서

홀로 살며 둥지를 짓지 않는다고 합니다.

알은 휘파람새 등의 둥지에 한 개씩 낳아 놓음으로써

다른 새가 대신 새끼를 기르게 하며

자신은 조금도 자기의 새끼를 돌보지 않습니다.

무슨 사정이 있어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래서인지 두견새의 울음은

듣는 이에 따라서는 처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거기에는 애달픈 전설이 전합니다.

옛날 옛날 중국 촉나라(유비의 촉한이 아님)의

임금 망제는 이름이 두우였습니다.

그는 임금에서 내쫒겨 도망하여 복위를 꿈꾸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어 그 넋이 두견새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한이 맺힌 두견새는

밤이고 낮이고

"귀촉, 귀촉(고향-촉-으로 돌아가고 싶다)"하며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새를 귀촉도라고도 불렀습니다.

이와 같이 죽은 망제의 혼인 두견새는

그 맺힌 한으로 하여 피를 토하며

울고 토한 피를 다시 삼켜 목을 적셨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 한이 맺힌 피가 땅에 떨어져

진달래 뿌리에 스며들어 꽃이 붉어졌다고 하고,

또 꽃잎에 떨어져 붉게 꽃잎에 물이 들었다고 합니다.

두견새는 봄이 되면 밤낮으로 슬피 우는데

특히 핏빛같이 붉은 진달래만 보면 더욱 우지 진다 하고,

한 번 우짖는 소리에 진달래꽃이 한 송이씩 떨어진다고도 합니다.

당나라 백거이의

<산석류, 원구에게 붙인다>라는 시에

"두견이 한번 울 때마다 두견화는 한 가지씩 핀다"는

구절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촉견폐일 蜀犬吠日


식견이 좁은 사람이 현인(賢人)의

언행을 의심하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중국 촉나라는 산이 높고 안개가 항상 짙어

해가 보이는 날이 드물기 때문에

개들이 해를 보면 이상히 여겨 짖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촉나라 땅은 사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데다가

하늘에는 운무가 짙게 덮여 좀처럼 해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모처럼 해를 보게 되면 개가 이를 보고 짖었다 함

두견새와 촉견폐일

고대의 촉나라는 지금의

사천성(四川省)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사방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큰 분지이다.

따라서 중원 지역과는 교통이

여의치 않아 고립된 지세에 의지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촉(蜀)’이라는 글자는 누에의 모습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촉나라의 성립이 잠업(蠶業)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는 사실이다.

아닌 게 아니라 촉나라를 처음 세운 영웅은

잠총(蠶叢)이라는 누에를 잘 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누에 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황금빛의 좋은 누에를 수천 마리나 길러 매해 정초에 집집마다

한 마리씩 나눠주었는데 그것을 기르면 반드시 크게 번식하였다 한다.

잠총은 이러한 공로로 인해 처음

촉나라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나중에는 신으로 추앙되었다.

그는 세로 눈을 한 기이한 모습이었고

누에 치는 법을 가르치러 시골을 돌아다닐 때

항상 푸른 옷을 입었기에 후세에 청의신(靑衣神)이라고도 불리웠다.

잠총 다음으로는 백관(栢灌)이라는 사람이 임금이 되었고

그 다음은 어부(魚鳧)라는 사람이 임금이 되었다는데

이 두 사람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잠총, 백관, 어부 이 세 명의 임금은

각각 수백 세를 살았고

나중에는 신이 되어 죽지 않았다 하니

촉나라의 초기 임금들은 어질고

신성한 자질을 지닌 존재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왕위를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덕있는 사람에게 양보했던 것으로 보아

요(堯) 순(舜)과 같은 중원의 초기 임금들과 비슷한 점이 있다.

세 명의 성군들 다음에

촉의 임금이 된 이는 두우(杜宇)라는 사람이다.

그는 어느날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그런데 동시에 강가의 우물에서 리(利)라고 하는

여인이 솟아나와 둘은 부부가 되었다.

백성들은 두우를 곧

네번째 임금으로 맞이하였으니 그가 곧 망제(望帝)이다.

망제가 다스린 지 백 여년쯤 되었을 때였다.

촉나라의 동남쪽 형(荊) 땅에

별령(鱉靈)이라는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그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

시체는 강물을 거슬러 촉나라까지 흘러와서 소생하였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망제는 그를 재상으로 삼았다.

이때 옥산(玉山)이라는 산이 물길을 막아 큰 홍수가 났다.

그것은 마치 요 임금때 중원 전체를 휩쓸었던 대홍수와 같은 재난이었다.

백여 년 동안 잘 다스려왔던

망제도 이러한 사태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별령이 물에 익숙했던 사람임을 생각해내고

그로 하여금 옥산을 뚫어 물길을 터놓도록 하였다.

별령이라는 이름이 자라의 혼이라는 뜻 아닌가?

별령은 망제의 명을 받고 홍수를 다스리러 떠났다.

그런데 별령이 떠난 후 망제 두우는

평소 마음에 두었던 별령의 아내를 유혹하였다.

둘은 마침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고 알았다.

별령은 숱한 고난 끝에 옥산의 물길을 뚫어 홍수를 진정시켰다.

백성들의 환호성 속에 별령은 개선장군처럼 수도로 귀환하였다.

별령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본 망제는

내심 자신이 한 짓을 생각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별령은 백성들을 위해 저토록

큰 일을 했는데 자신은

신하의 아내와 밀통(密通)이나 하고 있었다니!

부끄러움과 회한(悔恨) 끝에 망제는

큰 공을 세운 별령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서산(西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그러나 숨어 산다고 해서 자책은 덜하지 않았다.

어느날 홀연 그의 몸은 두견새로 변하였다.

새로 변해 훨훨 날아 부끄러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일까?

봄에 우는 두견새의 울음소리는

망제의 회한을 대변하듯 구슬펐다.

촉나라의 백성들은 두견새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래도 한때는 명군이었으나 한번 실수로 모든 것을 잃고

만 망제의 신세를 생각하고 슬픔에 잠겼다 한다.

망제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별령은 이후

개명제(開明帝)라고 불리웠고

그의 후손이 대를 이어 12대까지 촉나라를 다스렸다.

촉나라의 건국신화는 특색이 있으면서도

구조적으로 중원의 성군신화와 많이 닮아 있다.

우선 선양(禪讓)이라는 양보의 방식에 의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그러하고

홍수를 평정한 영웅으로부터

부자 상속의 왕위 계승이 이루어지는 점도 그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망제 두우는 순(舜) 임금과 닮아 있고

별령은 우(禹) 임금과 비슷하다.

특히 망제와 순은 그 최후가

비극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수많은 고대 작품에서

통한의 울음을 우는 봄새로 출현하는

두견새의 신화적 기원은 망제 두우에 있었다.


두견새는

두우조(杜宇鳥), 자규(子規), 불여귀(不如歸)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성군들의 시대 이후 촉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개명제의 12대손이 왕 노릇을 하고 있을 무렵

촉나라의 이웃에는 강국 진(秦)나라가 있어서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촉 땅이 험준하여 쉽게

침범하기 어려움을 깨달은

진의 혜왕(惠王)은 계략을 쓰기로 했다.

그는 돌로 소 다섯 마리를 만들게 하고

아침마다 소의 꽁무니에 황금을

쏟아놓고는 돌소가 황금똥을 눈다고 소문을 내었다.

촉 왕은 이 소문을 듣고 탐이 나서

사신을 보내 한번 그 돌소를 구경할 수 있겠느냐고 청하였다.

혜왕이 허락하자 촉 왕은 다섯 명의

유명한 장사인 오정역사(五丁力士)를 시켜

길을 닦고 다섯 마리의 돌소를 운반해 오게 했다.

그러나 돌소는 황금똥을 누지 않았고

속은 것을 안 촉 왕은

대노하여 그것들을 도로 진나라에 돌려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중에 진 혜왕은 촉나라로

가는 안전한 길을 확보할 수 있었다.

혜왕은 다음 계략을 시행하였다.

촉 왕이 여자를 밝히는 것을 알고

그에게 다섯 명의 미녀를 보내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촉 왕은 기뻐하며

오정역사를 시켜 그녀들을 데려오게 했다.

일행이 재동(梓潼) 땅에 이르렀을 때였다.

큰 뱀 한 마리가 동굴 속으로 막 들어가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한 장사가 뱀의 꼬리를 잡았으나

힘이 못 미쳐 딸려 들어가자

다섯 명이 전부 소리를 지르며 뱀을 잡아 당기는 순간 산이 무너져 내렸다.

순식간에 오정역사와 다섯 명의 미인 모두가 깔려죽었고

산은 다섯 개의 언덕으로 변하였다.

비보를 듣고 촉 왕은 미인들이 죽은 것을 안타까워하며

그곳을 오부총(五婦塚)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곳을 오정역사를

기념하여 오정총(五丁塚)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로부터 얼마후 진 혜왕은 앞서 돌소들이

지나갔던 길을 통해 촉나라를 침공하였다.

촉 왕은 항전하였으나 패배하였고

무양(武陽) 땅까지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살해됨으로써 개명제의 나라는 마침내 망하였다.

이태백은 ‘촉도난(蜀道難)’이라는

시에서 촉나라 가는 길은 하늘에 오르는 일보다 더 험난하다고 노래한 바 있다.


‘촉견폐일(蜀犬吠日)’이라는 고사성어 역시

촉나라의 지세가 험준함을 표현한 것이다.

촉나라는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해를 좀처럼 볼 수 없다,

그래서 모처럼 해가 제대로 나타나면

그것이 신기해서 개들이 일제히 짖어댄다는 이야기다.

이 고사성어는 견문이 좁아서

편협한 견해를 지닌 사람을 비유할 때에도 쓰인다.

그러나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어렵고

천혜의 방어 여건을 갖춘 촉 땅은 중원에서

패배한 영웅들이 휴식하면서 힘을 기르는 지역으로 자주 활용된다.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에게

일시 패한 후 촉 땅으로

통하는 외나무 다리를

불태우고 들어가 역전의 기회를 노렷고

촉한(蜀漢)의 유비(劉備)는

제갈량(諸葛亮)의 계책에 따라

이곳에서 한실중흥(漢室中興)의 대업을 도모하였다.

또 자연환경이 수려한 촉 땅은

상상력과 감성이 뛰어난 시인들도 많이 배출하였다.

사마상여(司馬相如) 이태백(李太白)

두보(杜甫) 소동파(蘇東坡) 등

대시인들이 이곳 출신이거나

이곳을 바탕으로 불후의 시편을 창작하였다.

중원과 떨어져서 나름의 독특한 문화를

이룩해온 촉 땅은 1980년대 이후 집중 발굴된

삼성퇴(三星堆) 지역의 유물들을 통하여 그 존재를 입증한 바 있다.

근대에 발굴된 종목인면상(縱目人面像)은

세로 눈을 했다는 잠총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어 흥미롭다.

출처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한강 전망대 가는 길

동작대교

동작역 1번 출구로 나와 70미터 직진. 버스는 502번

구름카페 (3476-7999), 노을카페(3481-6555)

잠실대교

잠실역 7번 출구에서 1km 걸어야 된다. 버스는 302, 2412번.

한강 전망대역 (415-4952)

한남대교

강남에서 한남대교 건너 강북방면 버스 470, 420, 144, 142.

한남대교 전망대역, 레인보우(511-7345)

광진교

천호역 2번출구나 광나루역 2번 출구에서 걷는다.

광진교 리버뷰 8번가(476-0722)

양화대교

합정역 5번출구에서 5712번, 602번, 604번 버스

선유(3667-7345), 양화(2631-7345)

한강대교

노들역 2번 출구, 신용산역 3번출구

노늘(790-0520), 리오(796-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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