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친구.동창

초등학교선생

철없는담임처녀여선생!


잊지못할 철없는 우리 2학년담임여선생!

앞줄 우측끝에 앉아있는 신아무개 여선생

1946년 초등학교 2학년 여름,

집에서 차가운 방치돌을 뺨에대고 낮잠을 자다

그만안면마비가 되여 입이 돌아간적이 있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복도에서나를 본 담임선생은 까르르 까르르 웃었다.

입돌아간것이 그렇게 우스웠나보다

그러고는

나를 교무실로 데리고 가더니 여러 선생님들한데이아이좀 보라고

하면서 또 까르르 웃으면서

깔깔대며 선생님들 한테

나를 가리키며 구경을 시켜주는것이 아닌가.

이렇게 어린 나를 선생님들한테

개망신을 준 철없는 처녀아가씨 선생이다.

집에와서너무 분하고 창피해 많이 울었다

어린마음에도 이 여선생을얼마나 미워했던지..

지금이라도 살아있다면 찾아가서

옛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이미 몇해전에 고인이 되였다고 하니..

어른들 특히 학교선생님들은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절대로 상처주는 말은 하지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초등학교 동창생 류송열 회장과 함께














가운데 안경쓰신분이

제8대 김대원 교장(1951.7.1-1953.3.31)선생님이시고

맨우측이 우리담임 류종열선생님이시다

뒷줄3번째줄 좌로부터 이완형 강신봉홍충선(주인장)








뒷줄 좌로부터
신동순 백명현 김완숙 이상순 김진필

안진희 한상은 박민호 이면우 박길순 류송열

앞줄좌로부터
신운철 류무웅 박범호 홍충선 이종인 종인사모님 이윤규

초등학교를 1951년에 졸업했으니 반세기가 훨신 지났다.

소꼽장난하던 친구들이 이제 모두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였다.

동창회에 모이면 어린시절 옛이야기를 하며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모두들 동심으로 돌아간다


여학생 일동

사진 좌로부터 신동순 김진필

이상순 백명현 안진희 종인사모님 이면우 김완숙




1945년 초등학교 입학사진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들이

많아 나(홍충선)는 항상꼬마였다

1945년 입학사진을 보니 내가 제일 작아 보인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1945년 3월! 내 나이 7세(만6세)때 고천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

입학하던 그해 8월15일에 해방이 되였다.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할때는 일본제국시대라 교장 선생은 일본사람이였고

담임선생등 여러선생들은 모두 군복같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수시로 일본병정들이 학교로 찾아오곤 했는데

선생님들은 무서워 벌벌 떨었다.
이때가 일본이 한참 망하는 시기라 학교에서 공부는 안시키고

매일 학교지하 방공호에서 원자폭탄 떨어지면 열손가락으로

눈 코 입 가리는 방법과 방공호에 숨는 법 등을 연습시켰다.

이름은 일본이름으로 만들어주고는 출석때는 일본이름으로 불렀다.

소위 창씨개명이 된것인데 내 이름은 마쓰모도 쥬셍 (松本忠善)이라고

학교에서 제멋대로 만들어 주었다.


어떤 친구의 이름은

이누쿠소 구라에(大糞食衛.똥이나 먹어라)도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뜻을 모르는 애들이라 아무것도 몰랐다.

그리고 서로 이름을 부를 때 한국이름으로 부르면 벌을 주곤하였다.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일본말을 무조건 하라며 일본말을 빨리

배워야된다며 닥달하던 생각이난다.

그래서 우리는 글도 모르면서 헤따이 벵꾜 센세이 등 단어를 외고 다닌 기억이 난다.

1948년 내가 4학년때 초등학교 담임 김아무개

선생은 문제의 선생이였는데 실력은 별로였고

깡패같은 인상의 선생이였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따로 떨어져 공부하던 것을 당시에는

그야말로 혁명적으로 요즈음 같이 남학생과

여학생을 짝으로 자리배치를 해주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교실에서 떠들면 전원을 일으켜 세우고

남학생과 여학생 짝끼리 마주보고 따귀를 수십 대씩

거의 매일 서로 때리게 했다. 반에서 전원이 서로 마주보고

서서 따귀 때리는 소리가 철썩철썩 밖에서도 들렸다.

한바탕 따귀를 서로 부치고 나면 얼굴이 벌겋게 부어오르곤 했다.

지금도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동창생 할머니들과

만나면 따귀선생의 이야기가 단골이다.


내 짝은 골우물 사는 박아무개라는 여학생 이였다.

내가 너무 쎄게 때려서 미안한 생각이 들어 동창회에 나오면

사과하려고 했는데 동창회에 참석을 안해서 사과를 못하고 있다.


그리고 1949년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때인데 6월 26일

백범 김구선생이 서거하신 해이기도 하다.

누나가 6학년때 학교소풍을 서울창경원으로 갖다 왔는데

그때 누나가 집에와서 하는말이 서울서 들었는데

김구선생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우리는 처음으로 알았다.

누나는 나보다 학교는 1년 선배이다.


전쟁 중에도 학교는 다녔다

1950년 내가 초등학교 6학년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전쟁 발발후 대략 3개월 남짓의 공산치하에서도 학교에 다녔다.

내가 다니던 고천초등학교 건물은 인민군

내무서인가 뭔가 하는데서 사용하였다.

말하자면 징발을 당해 우리학생들은 학교에서

쫒겨나 마을 동네의 어느 집이던가

아니면 학교근처 나무 그늘에서 공부했다.

공부를 했다기 보다는 매일같이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 어쩌구 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만 배웠다.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 장백산이란것도 나는 이때 처음 알았다.

노래 배우다가 쌕쌕이 전투기가 나타나면 선생님이

"집안으로 들어가 숨어"하고 소리치면 냅다 뛰어가 숨었다.

아이들은 재미나서 낄낄대면서 숨었다.

이 당시 풍경은 동네 담벼락과 거리에 새파랗게

젊은 김일성 사진과 콧수염의 스탈린 사진이 많이 붙어있었다.

전쟁중이라 대부분의 남자선생님들은 피난가고

우리를 가르친 선생님은 왕곡리 사는 김아무개란

여선생 이였는데 위에서 말한대로 주로 공부보다는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가르키던가 북한 국기

그리기등 북한을 찬양하는 것을 가르쳤다.

김아무개 여선생은 이때 인민군쪽에서

교장으로 승진시켰다고 들었다.

9/28수복 이후 이 여선생은 빨갱이라고 해서 모진 고생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초등학교졸업


우리는 1951.08.21 전쟁중에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시절 졸업식광경이 생각난다. 졸업식을 할때

재학생이 송사를 하고 졸업생이 답사를 한다.

이렇게 송사와 답사가 끝나면 졸업노래를 부르는 것이 순서였다.

1절은 재학생인 5학년이 부르고 2절은 6학년 졸업생이 부른다.

그리고 3절은 졸업생과 재학생이 합창으로 부른다.

졸업식 노래중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라는

노래가사 때문에 남자 아이들은 왜 언니만 있느냐

오빠도 있지 하고 불평하던 생각도 난다.

요즈음도 이노래가 있는지 모르겠다.

1절 (재학생이 부른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 잘하며
우리는 언니뒤를 따르렵니다

2절 (졸업생이 부른다)

잘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우리나라 새일꾼이 되겠습니다

3절(졸업생과 재학생 합창으로 부른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가 울려 퍼지면 그때부터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훌쩍대는 울음소리가 나기 시작해 6학년이 부르는 2절 가사인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라고 노래 소리가 진행되면....학생도 울고 선생님들께서도 같이 울었다.

특히 졸업하는 여학생들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엉엉 울었다.

지금 아이들은 상상 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면 이 당시에 왜 울었느냐 하면 가정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 진학을 못하니 더 더욱 서럽게 울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졸업하면 중학교 진학을 못하니 학생신분은 영영 끝나는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반에서도 50여명 졸업생가운데 전쟁중이라 졸업을 같이 못했던 학생도 많았지만 중학교에 간 학생은 몇명뿐이였다.

졸업사진은 한 장짜리 흑백으로 사진하단에 고천국민학교 제12회 졸업기념이라고 쓰고 그 사진속에 여학생들은 치마 저고리를 입었다. 신발 또한 운동화가 아닌 고무신이다.


졸업식장에 부모님이나 가족은 모두들 안오셨고 카메라가 없으니 사진을 찍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그 흔한 꽃다발 하나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초등학생들이 제일 좋아하는 짜장면은 도시 학생들이나 먹었지 시골학생들은 이름도 몰랐다.


나도 짜장면은 중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먹어봤다. 졸업장한장 달랑 둘둘말아 들고 집에 온것으로 그만 이었다.


이상은 나의인생일기 자서전 유유자적에서 발췌한글이다



1951년 초등학교 졸업사진

뒤에서 세번째줄 좌로부터 이완형 강신봉 홍충선(주인장)




한국전쟁중 아침도 죽, 저녁도 죽만 먹던 중학생시절!

소풍가던날 어머님께서 모처럼 김밥을 찬합도시락에 가득히 넣어주셨다

게눈 감추듯 다먹어버린 내 도시락이우측아래에 보인다

'친구.동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 신봉  (1) 2008.10.11
고교동창생박영환  (0) 2008.10.02
동창모임  (3) 2008.08.07
초등학교동창  (0) 2008.07.20
초등학교동창회  (0) 2008.04.30
초등학교동창생  (0) 2007.10.23
48방우회  (0) 2007.10.19
강신봉의 글모음  (2) 2007.08.06
한재후 따님  (0) 2007.07.03
옛친구  (3) 2007.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