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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南陽洪氏時享祭


南陽 洪氏 時享祭

남양홍씨 시향제 2011.10.27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천등리 산 67-1

남양홍씨중앙화수회.com


시조단비 재정비

남양홍씨 시조비단을

2010.5/31-6/3일에 걸쳐 재정비하였다

화성시 송산면 천등리 산67번지






南陽洪氏(土洪)始祖

洪先幸(홍선행)

시조 홍선행(洪先幸)은 당성(남양)에 대대(代代)

살아온 선비의 집안으로

고려(高麗)때 금오위 별장동정을 지냈으며

가문(家門)의 기틀을 잡아 가세를

크게 번창(繁昌)시켰으므로

후손(後孫)들이

시조(始祖)로 모시고 본관(本貫)을 남양(南陽)으로 하였다.



남양홍씨시조- 6세조의 묘비



남양홍씨 시향제 준비

남양홍씨 시향제를

지내기 위해 전국각지에서

홍씨후손들이 많이 모였다



승열조카도

남양홍씨 시향제 참석 기념으로


남양홍씨 28世

남양홍씨 화수회 총무이사 승훈조카와 승열조카 함께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천등리 들판모습


남양홍씨 제7세

홍덕의 할아버지의 묘


남양홍씨 제7세 홍덕의 지묘

제7세 홍덕의 할아버지부터 묘가 있다

고려조때 공조전서를 지낸분이다.

공조전서 [工曹典書]란?

공조전서란 고려와 조선초기때 관직으로

산림 소택 공장 건축 도요공등의

일을 총관한 공조의 장관이다.

조선시대의 공조판서(工曹判書]

지금의 지경부장관이나 국토행양부장관 이라고 볼수있다.

봉익대부 [ 奉翊大夫 ] 란?

1310(충선왕 2) 제정되었으며,

1356(공민왕 5) 영록대부(榮祿大夫),

1362년 다시 봉익대부(奉翊大夫)로 고쳤다.

1369년 종2품 상()으로 하여 다시 영록대부로 고쳤다


제7세 홍덕의 할아버지

묘앞의 남양홍씨 후손들 모습







南陽洪氏()系派

南陽洪氏系派5이다.

分派 課程을 보면 다음과 같다.

9世 益生에게는

貴海, 貴湖, 貴演3兄弟分이 있었는데

둘째 貴湖後孫主簿公派로 분파되고,

세째 貴演後孫大護軍公派分派되었다.

10世 貴海에는

浩(호), 泂(형), 湜(식), 瀚(한), 溥(부)等 5兄弟分이 있었는데

장남 孫子代에 이르러 無後하고,

3은 아들 世弼과 함께

1504年 燕山君甲子士禍時斬刑되었으니

世譜無單으로 나와있어 絶孫된듯 싶다.

結局 泂(형), 瀚(한)의 형제분이 後嗣(후사)를 이었는데

吏曹參議後孫參議公派分派되었다.

11世 泂士弼, 彦弼, 彦光3兄弟分이 있었는데

장남 士弼無后이고,

차남 彦弼

官職領議政에 이르러 그 後孫文僖公派를 이루었다.

12世 彦光子 曇(13)

吏曹判書에 이르러 그 后孫貞孝公派이다.

泂 (형) 멀형. 멀다. 깊고 넓은 모양

湜(식) 물 맑을 식. 물이맑다

瀚 (한) 넓고큰모양 한

() 펼부.펴다.베풀다

諱(휘) 숨길 휘. 숨기다.피하다. 죽은어른의 생전의 이름을 표기하거나 칭할때 ()라고 한다.

無後(무후) 대를 이어갈 후손(後孫)이 없음

衣履葬(의이장)

옷 의

밟을 이. 신발 이.

장례 장

고인의 시신을 찾을 수 없을 경우 대신 그가 평소입었던 옷 신발 모자등을 넣어 장례를 치르고 묘지를 만드는 것을 뜻한다.(동아일보)

參議公 洪瀚

((참의공 홍한.1451-1498. 향년48)

참의공파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역임한 홍귀해의 4

연산군때 이조참의에 올랐으나

연산군4년에 무오사화 때 구금되여

고문을 엄청받아 상처를 입고

경흥부(함경북도 북동부에 위치)로 귀양가다

정평(함경남도 남부에 위치)에서 사망

참의공 홍한의 조상

고조부남양홍씨7세 홍덕의

고려시대 공조전서(공조판서)

증조부 남양홍씨8세 홍자경

호조참판

조부 남양홍씨 9세 홍익생

동지중추원사

부 남양홍씨10세 홍귀해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증 병조판서

참의공(본인) 11세 홍한

이조참의

이와같이 날리던 집안이였으나 연산군으로 인해 집안이 엄청난 고난을 맞음

중종 즉위후 사후복권되여 이후영의정등 후손들 배출

무오사화 [戊午士禍]

1498(연산군4) 김일손(金馹孫)

신진사류가 유자광(柳子光) 중심의

훈구파(勳舊派)에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史禍)

조선시대 4대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이다.

사초(史草) 때문에 일어난 사화라고 하여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사림파의 중앙진출을 보면,

세조 때 중앙집권·부국강병을 지나치게 추구하고,

훈구 대신들이 권력·재산을 모으자,

성종 때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 정계로 진출하였다.

3(三司:司諫院 ·司憲府 ·弘文館)

언론직(言論職) 및 사관직(史官職)을 차지하면서

훈구 대신의 비행을 폭로·규탄하고,

연산군의 향락을

비판하면서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였다.

한편 훈구파는 사림파를 야생귀족(野生貴族)으로 보고,

사림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게 한다고 비난하여

연산군 이후 그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종직과 유자광은 일찍이 개인감정이 있었고,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성종 때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의 비행과

세조의 찬탈을 사초(史草)에 기록한 일로

김일손과 이극돈 사이에도 반목이 생기게 되었다.

유자광·이극돈은

김종직 일파를 증오하여 보복에 착수하였다.

1498성종실록을 편찬하자,

실록청(實錄廳) 당상관(堂上官)이 된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 하고,

이를 문제삼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이와 같은 죄악은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었다.

사림파 김일손·권오복(權五福이목(李穆

허반(許盤권경유(權景裕) 등은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한 죄를 씌워 죽이고,

정여창(鄭汝昌강겸(姜謙이수공(李守恭

정승조(鄭承祖홍한(洪澣정희랑(鄭希良)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 죄로,

김굉필(金宏弼이종준(李宗準

이주(李胄박한주(朴漢柱임희재(任熙載강백진(姜伯珍)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보냈다.

한편, 이극돈·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어세겸(魚世謙)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하였다.

이로써 사화 발단에 단서가 된 이극돈이 파면된 뒤

유자광은 그 위세가 더해진 반면, 많은 사림파 인사들이 희생되었다.



홍시주+완산이씨 > 홍이하 홍이징 홍이부

홍시주+해주최씨 홍이석 홍이연


洪湜(홍식)

1449(세종31) -1504(연산군10) 향년 56

좌승지

남양홍씨 참의공파 시조 홍한의 형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4)에 연루되어 전라도 부안에 부처되었다가,1504(연산군10) 갑자사화때

아들 세필과 함께 참형되여 후손이 없다.

충남 천원군 직산에 衣履葬(의리장)으로 뫼시다가 1966.2.26.일 중앙화수회에서 화성군 천등리로 이장하였다.

衣履葬(의리장)이란

옷과 신발등 고인의 유품을 묻는 장례

참의공파

홍한 (洪瀚)1451(문종원년) -1498(연산군4)

이조참의 남양홍씨 참의공파 시조

자경(子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익생(益生)이고, 아버지는 수군절도사 귀해(貴海 )이며, 어머니는 민효열(閔孝悅)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1431(세종13)-1492(성종 23) 향년 62)의 문인이다.

1485(성종 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490년 지평을 거쳐 1493년 헌납(獻納)이 되었다. 1495(연산군 1) 응교(應敎)가 되고, 그 뒤 전한·부제학을 역임한 뒤 1498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 해에 무오사화(1498)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장형(杖刑)을 당한 뒤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가다가 도중에서 죽었다.

그 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지난날 홍문관에 있을 때 연산군의 후원관사(後苑觀射: 내궁에서 활을 쏘는 것을 관람함)를 논계(論啓)한 일이 들추어져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중종 때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홍언필(洪彦弼)

향년 74

1476(성종7)~1549(명종4) ]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1504(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이듬해 중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저작(著作) ·지평을 지냈다.

1519년 사가독서(賜暇讀書) 후 우승지(右承旨)가 되었으나, 1519(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몰려 투옥되었다가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변호로 풀려났고, 1526년 형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대사헌을 여섯번 역임하고 각조의 판서를 거쳐 1535년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가 김안로(金安老 1481-1537 향년 57)의 모함으로 파직되었다.

2년 뒤 김안로가 실각하자 호조판서에 복관되고, 우의정에 올라 좌의정을 거쳐 1544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 해 인종이 즉위하자 유관(柳灌)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었다가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전임하고, 1545(명종 즉위) 위사(衛社)공신에 책록되고 익성(益城)부원군에 봉해졌다. 1548년 좌의정 ·영의정에 재임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하고, 문집으로 묵재집이 있다. 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평소 몸가짐이 검소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멀리하였고 집안의 법도가 엄격하여 주변의 칭송이 높았다고 전한다.

기묘사화 [己卯士禍]

1519(중종 14) 남곤(南袞 1471-1527 향년57) ·홍경주(洪景舟 ) 등의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1482-1519 향년 38) 등의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이 숙청된 사건

홍섬 (洪暹), 1504~1585 향년82]

홍섬은 남양홍씨(土洪系)의 대표적 인물로 남양홍씨 문희공파 시조인 영의정 홍언필의 아들로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홍섬의 어머니 여산 송씨(1487-1580.향년 94) 로서 종종 때의 영의정 송질(1454-1520.향년 67)의 따님이다.

따라서 홍섬은 영의정의 외손자에 영의정의 아들이라 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곁드려 그의 어머니 송씨는 영의정의 딸로 영의정의 아내가 되어 영의정을 낳으니,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영의정인 세상에서 가장 복 많은 여성으로 꼽혀, 궁중의 왕후도 송씨를 자못 존경 하였다.

근대 미국에서 간행된 <세계유명여류인사>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송씨부인이 실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홍섬은 젊은 도학자 조광조에게 배워 중종2628세때 문과에 올라 홍문관의 정9품 정자(正字)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사가독서로 학문을 닦기도 했던 홍섬이 사헌부정언을 거쳐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권신 김안로의 전횡을 탄핵하고 나섰는데, 도리어 김안로 일당인 허항(許沆)의 터무니 없는 무고로 홍양에 유배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2년 뒤 간신 김안로가 처형되고 득실거리던 간신배들이 쫏겨 나니 홍섬은 풀려 홍문관수찬으로 화려하게 복직하였다.

이후 홍섬은 지평·교리·전한·장령·집의·부제학·사간·대사성·이조참의·도승지 등, 영향력있는 청요직은 모두 역임하고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예조참판·대사헌·공조참판·지중추부사·한성판윤 등 고위직을 거치는 동안 그의 깨끗한 품행이 들어나, 청백리에 녹선 되는 영광을 안았다.

따라서 명성이 높았던 홍섬의 벼슬길은 탄탄대로였다. 곧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명종9년 공조판서에 올라 마침내 6경 반열에 들었고, 이듬해 예조판서에 지의금부사를 겸했다가, 세자좌빈객·우찬성을 역임한 뒤, 명종13(1558) 좌찬성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듬해 대제학까지 겸하니, 삼대임(三大任)은 불가하다는 인사 내규에 의하여 좌찬성 자리는 사임하였다.

그러나 명종15년 명종비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李樑)이 이조참판이 되어 횡포를 부리자 이를 보다 못한 홍섬이 탄핵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량은 효령대군의 5대손으로 종친인데다 왕후의 외삼촌이었으니 그 막강한 배경에 밀려 홍섬은 도리어 파직 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량은 왕실을 배경삼아 등과 8년만에 당상관에 올라 지나치게 목에 힘을 주고 뇌물을 챙겨, 집 앞에는 뇌물 먹이려는 행렬로 난장판을 이루니, 사람들은 이량을 윤원형·심통원과 함께 당대의 3흉이라며 매우 더럽게 여겼다.

마침내 이량은 처가쪽 조카 심의겸의 탄핵을 받아 평안도 강계로 귀양 보내져 죽고 말았다. 민심은 곧 천심이라 비루한 자는 사라지고 올바른 자는 되 살아 나는 법, 홍섬은 곧 판의금부사에 복직하여 예조판서가 되고, 선조가 즉위하자 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불의를 보고 몸을 사리지 않았던 홍섬이, 이번에는 일찍이 조광조 등 사림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남곤의 죄상을 논박 했다가 또 파직 당하니, 벼슬길에 나온 이후 세 번째 직을 빼앗긴 셈이 되었으나 이름은 높아졌다.

한데 청백하고 올 곧은 기개 높은 홍섬의 명성이 세상에 떨치니, 그는 곧 좌의정으로 발탁되고, 선조7(1574) 471세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다.

이후 세 번이나 영의정에 오르내리며 국정을 보살피던 홍섬은 15852월 노환으로 세상을 뜨니, 맑게 누린 천수 82세 였다. 시호는 경헌공(景憲公), 경기도 화성 안곡서원에 제향 되어 후세의 기림을 받고 있다.

홍섬은 문장에 능하고 경서에 밝았으며 생활이 늘 검소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고향에 효자정문이 세워져, 오늘날 화성시의 향토유적으로 관리 되고 있다.

경기도 화성시 흥법리 고향에 그의 묘소가 있고, 묘역에 좌의정 김귀영이 짓고 승의랑 한호가 글씨를 썼으며 예조참판 남응운이 전액을 새긴 신도비가 있다.

명상 이덕형(1561-1613.향년 53)이 우찬성시절에 판서 홍섬의 행실을 눈여겨 보고 느낌을 그의 수필집 <죽창한화(竹窓閑話)>에 이렇게 썼다. 정승 홍언필의 아들 섬이 판서로 있을 때였다.

홍공의 가법이 몹시 엄정해서 판서가 웃옷을 입지 않고서는 들어가 뵙지를 못했다. 손님이 왔을 때 정승이 만일 편치 않으면 판서 홍섬을 시켜 접대하게 했는데, 검소한 베옷 차림에 겸손한 말씨와 모습에 처음 보는 사람은 그가 판서임을 알아채지 못하다가 뒤에야 늦게 알고 놀라 감탄하며 깨달았다. 홍섬은 양관대제학을 겸하고 세 번 영상이 되었으며 나이 82세에 졸했다. 문헌이 집에 전하여 현상(賢相)이라 일컫는다.

이로 보건대 부자간에는 효도와 공경을 다해야 하고, 벼슬하는 집에서는 겸손하고 삼가는 것을 주장으로 삼아야 함을 알겠으니 남의 자식 된 자는 삼가지 않을 수 없다.

홍섬의 아들 기영(耆英.1549-1612 향년 64)은 장악원첨정이 되어 우의정 심수경의 사위가 되고, 딸은 선조의 형인 하원군 이정()에 시집가니, 홍섬은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과 사돈이 되고, 딸은 선조의 형수가 된 셈이었다.

홍섬의 어머니

여산 송씨(1487-1580 )

향년94.홍언필의 繼妃)

남편.아들. 친정아버지 3명 모두가 영의정을 한 그런 복많은 여인이다.

따라서 궁중의 왕후들도 송씨를 자못 존경해 마지않던 조선역사상 유일 무이한 복많은 여인이였다

친정아버지 송질(1454-1520) 영의정

남편 (문희공파 시조) 홍언필(1476-1549) 영의정

아들 홍섬() (1504-1585 향년82) 영의정

그외에도

시아버지 (홍형.1446-1500) 부제학 승지

조카인 洪曇(홍담.1509-1576 정효공파 시조) 이조판서

시댁 작은아버지 洪湜(홍식 1449-1504) 좌승지

홍익한 [ 洪翼漢 ]

1586(선조 19)1637(인조 15).

남양(南陽) 홍씨 대호군파 15

진사 홍이성(洪以成)의 아들이고 큰아버지인 교위 홍대성(洪大成)에게 입양되었다.

1615(광해군 7) 생원이 되고, 1621(광해군 13) 알성문과에 급제했으나 파방(罷榜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발표를 취소함.)되었다. 1624(인조 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사서(司書)를 거쳐, 1635년 장령이 되었다.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시하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걸고 사신을 보내오자, 제호(帝號)를 참칭한 죄를 문책하고 그 사신들을 죽임으로써 모욕을 씻자고 상소하였다. 마침내 그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론(和議論)을 극구 반대하였다.

이 난으로 두 아들과 사위가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아내와 며느리도 적에게 붙들리자 자결하였다. 이 때문에 늙은 어머니와 딸 하나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이듬 해 화의가 성립되자 조정의 권유로 청군(淸軍)의 화를 피해 평양부서윤으로 나갔다.

그러나 청나라의 강요로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갔다. 그곳에서 그는 청장 용골대(龍骨大)에게 작년 봄에 네가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나 한 사람뿐이다.”했고, 갖은 협박과 유혹에도 끝내 굽히지 않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처형 장소나 매장처도 확실치 않아, 그가 평소에 타던 안마와 의금(衣衾)만을 수습해 경기도 평택 서쪽 경정리에 장사지냈다. 1653년 도승지로 추증되고, 1686년 이조판서와 충정(忠正)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 뒤 1705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경기도 평택시 팽성면 본정리로 이장하였다.

남양홍씨 항렬자 배행도

아래 항렬자배행도(行列字排行圖)는 토홍 남양홍씨계보에 대한 대수(代數) 관계를 나타내는 돌림자를 도표화 한 것으로 항렬이나 항렬자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과, 또한 남양홍씨라고 하면 토홍과 당홍이 있는데 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 본인이 돌림자가 아래 항렬자배행도에 해당되는지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아래 예시된 순서에 따라 토홍 남양홍씨 혈족의 방계(傍系)에 대한 대수(代數) 관계를 나타냈고, 그 말을 항렬(行列)이라 하고, 이 항렬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름자에 넣는 글자를 항렬자(行列字)라고 합니다.

, 항렬은 돌림, 항렬자는 돌림자라고 지칭하여 사용하는데 아래에 예시된 순서에 따라 위쪽에 세(), 아래쪽에 항렬자를 배치해 26세는 사(), 27세는 선(), 28세는 승()과 같이 세와 항렬자가 위아래(세로)로 어울리도록 도표로 만든 것이 항렬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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