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길상사

吉祥寺(길상사)의 역사

서울 성북구 성북2동 323. 02-3672-5945/6

1987년 공덕주 길상화 김영한님이 법정스님께 음식점이던

 대원각을 청정한 불도량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청하였다.1995년 법정스님께서

 그 뜻을 받아들이셔서 6월 13일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등록을 하고 주지에 현문 스님이 취임했다.


1997년에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등록하고

 같은 해 2월14일에 초대 주지로 청학 스님 취임 및

 1차 도량정비불사 회향을 했다.

한편 법정 스님께서는 김영한 보살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주셨다.

법정스님의 입적으로길상사개원의 역사속에 숨겨진

백석과 김영한의 애절하고 안타까운 사랑이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시인 백석과

연인 길상화 김영한의 애절한 사랑

백석(1912--1995)향년 83세) 김영한(1916-1999)향년 83세

길상사는 법정스님으로 인해 널리 알려진 사찰이다.

하지만 길상사는 백석 과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의 애절한 사랑으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가난한 탓에 병약한 남편에게 시집 갔던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는 남편이 죽고 시어머니에게

고된 시집살이를 당하다가 결국은 집을 뛰쳐나오고 만다.

하지만 집을 뛰쳐나온 미망인 입장에서 택할 수 있는 것은 춤추고 노래하는 기녀의 길밖에 없었다.

황진이


김영한은 조선시대의 명기 황진이를

 쏘옥 빼닮은 춤 노래 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소질이 있는 여인이였다.

글도 잘써 잡지에 수필을 낼정도로 글을 잘썻다.

백석과의 인연은 당시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였다고 한다.


당시 투옥된 스승을 만나러 함흥에 갔다가 스승은

 만나지 못하고 운명적으로 백석을 만나게 되는데 백석 총각 영어선생은 한눈에 김영한에게 반했다고 한다.

즉 함흥 영생여고 교사들 회식장소에서 기생이였던 자야를 만났다.

함흥에서의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사랑 이별과 해후의 반복 사랑을 위한

 현실 도피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는 진향(영한의 기생이름)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子夜(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백석의 나이 26세. 김영한은 미망인이였지만 꽃다운 나이 22세라..,.

요즈음의 여대생 나이였다

.백석은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와의 사랑을 위해 영생여고 영어교사도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 란 시도 자야(子夜)와 관련된 시라고 한다.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하지만 백석의 부모는 과부 기생에 빠져있는 아들을 가만두고는

 볼 수 없어 백석을 강제로 어느 처녀와 결혼시켜버렸다고 합니다.


백석은 마음에 없는 결혼이라 곧 이혼하고 또 어느 처녀와 결혼시키면

 또 이혼하고 해서 3번이나 결혼과 이혼을 했다고 한다.

이혼하고는 바로 김영한이한테 오고 또 결혼했다가는 김영한이한테 오곤 했답니다.
이렇게 마음에 없는 결혼을 부모가 강제로 시켰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였습니다.

나중에는 백석이 이혼하고 김영한한테 와서는 부모님 몰래 만주로 둘이서 도망가서 살자고 했답니다.

 

그러나 마음 착한 김영한은 자신이

백석에게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거절을 했답니다.
결국 해방후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백석은 북쪽에 김영한은

 남쪽으로 떨어지게 되어 다시는 만날수없게 되엿답니다 .

                                                            남북이 가로맊혀 애달픈 이별의 사랑이 되고 만것이였다.


가거라 삼팔선

아 - 산이 막혀 못오시나요
아 - 물이 막혀 못오시나요
다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련만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리길
꿈마다 너를 찾어 꿈마다 너를 찾어
삼팔선을 탄한다

아 - 꽃필 때나 오시려느냐
아 - 눈올 때나 오시려느냐
보따리 등에 메고 넘든 고개길
산새도 나와 함께 울고 넘었지
자유여 너를 위해 자유여 너를 위해
이 목숨을 바친다.

 


이런 사연으로 백석은 월북작가는 아니지만

 재북작가이기에 그의 작품은 1980년대 말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김영한은

사랑하는 백석을 평생을 잊지못하고 최고급 요정인 대원각을 운영하며

 돈을 모으는데 집중하며 드디여 엄청난 재산가가 된 것이다.

백석과 재회가 이루워졌다면 재산도 많겠다 부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수있었을텐데..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1일 만 되면 항상 곡기를 끊었다고 한다.

 사랑에 상실감때문이였는지. 아니면 못이룬 사랑을 그리워 해서인지 ..

 

 


이렇게 힘들게 모은재산을 당시의 1000억원 정도의

 가치를 지닌 대원각을 1991년 법정스님에게 시주한 것이다.

너무나 어마어마한 금액의

 시주이기에 법정스님도 몇 번씩이나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법정스님을 얼마나 믿었으면

어마어마한 재산을 미련없이 시주했을까 머리 숙여진다.

김영한의 애절한 사랑과, 평생애써모은 전재산을 시주한

 김영한님께부처님의 자비가 천당에서도 계속되기를 빕니다.

 

기생 진향

18세때 김영한이 기생으로 있을때

그 엄청많은 재산을 시주하고 무소유를 직접 실천하고 이세상을 하직한 여인 김영한!

이 여인이야말로 모든사람들로 부터 추앙받아야 될 인물이 아닐까! 젊은시절의 사진이 없어 아쉽다.


무소유

“나는 가난한 탁발승(托鉢僧)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圓卓會議)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 K.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語錄)>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地上)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일상에 소요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主客)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이름 있는 난초(蘭草)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 왔을 때

아는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 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이라는 비료를 바다 건너 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나는 떨면서도 실내 온도를 높이지 않았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개인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 노사(耘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 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이때에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나는 이 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執着)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착해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僧家의 遊行期]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 하고 말았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날을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 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초를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所有慾)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을 뿐이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고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不辭)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利害)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맹방(盟邦)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사절을 교환하는 사례(事例)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 관계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無所有史)로

그 틀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까.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많은 물량(物量)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 볼 교훈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건청궁의비극  (0) 2010.08.23
화성행궁  (0) 2010.07.28
김만덕  (0) 2010.06.07
夢遊挑源圖  (0) 2010.06.02
알랑미  (0) 2010.05.24
태종이방원  (0) 2010.02.27
내고장명칭유래  (0) 2010.02.26
우리의선조  (0) 2010.02.20
성종중종  (0) 2009.12.20
겸재정선기념관  (0) 2009.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