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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태종이방원

이방원 이야기

태종 [太宗, 1367~1422 향년56세]
재위 1400-1418

이성계가 건국을 앞두고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크게다쳤다.
이때 정몽주가 문병을 간다고 통보를 했는데

이방원과 그 측근들은 문병오는

것을 막으려고 했으나

이성계가 허락함으로서 정몽주가 문병을 오게된다.

이에 이방원을 비롯한 측근들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이성계의 옆에서 호위를 하였다.

문병하고 난 정몽주는 이방원과 함께 다과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게 된다.


담소를 나누다가 이방원이
먼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진심을 떠보고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시조를 읊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방원의 '하여가'입니다.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젊은나이 이방원의 시조실력이 대단하다.

하여가에는 '이미 타락할대로 타락한 고려 왕조를 그만 포기하고,

자신(이방원)과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칡덩굴처럼 얽히어져 함께 조선왕조를 세우자' 라는 뜻으로 시조를 읊픈것이다.

이렇게 이방원이 '하여가"를 읊고 나자,

정몽주는 자신도 시조를 하나 지어보겠다고 하였다


이방원이 흔쾌히 승낙하자 정몽주는

시조 한수를 읊었다.
이 시조가 유명한 정몽주의 '단심가이다.

'단심가(丹心歌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자신의 몸이 백 번이라도 죽는 한이 있고

뼈가 사무치더라도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 라는

뜻으로 이성계를 절대로 지지할수없다는 단호한 입장이였다.


정몽주의 죽음

정몽주 [鄭夢周, 1337~1392 향년56세]


고려의 멸망을 예견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소신을 굳건히 지키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였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결국 선죽교(善竹矯)에서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을 시켜 정몽주를 죽인다.

이때 정몽주의 나이 56세

이성계 58세, 이방원 26세 였다.


그 때 정몽주가 흘린 피가

아직까지 핏자국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때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을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가 호되게 야단을 쳤다고 하니

이성계도 정몽주를 깊이 존경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몽주의 묘

개성에서 죽은 정몽주의 묘가 어떻게 용인에 있나?

선죽교에 피를 뿌린 포은의 묘는 원래 개성 풍덕군에 있었다.

'生居眞川 死居龍仁'

살아서는 진천이요, 죽어서는 용인이라는 말처럼

포은 선생도 살아서는 용인과 인연이 없다가 복권이 된후

고향인 영천으로 천장되던

도중에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불어

상여의 명정(銘旌)이 날아가 이곳 모현면 능원리에 떨어겼다고 한다.

그래서 지관을 불러 알아보니 이곳이

명당임을 확인하고 묘를 이곳에 쓰게 됐다고 한다.


모현이라는 지명은 포은 선생의 어진 마음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유래된 지명이란다.
현재 정몽주의 묘는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에 있다.


이성계(1335-1408. 향년74세)

의 부인과 자식들

첫째부인
신의황후 한씨(神懿皇后 韓氏) (1337년 ~ 1391년 향년55)
이성계가 아직 벼슬을 하지 못하던 때에 영흥으로

시집와서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기 1년 전인 1391년에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남.이방우( 1354년 ~ 1393년 향년 40세)
2남.이방과( 1357년 ~ 1419년 향년 63세) : 훗날의 조선 정종


3남.이방의( 1360년 ~ 1404년 향년 45세)
4남.이방간( 1364년 ~ 1421년 향년 58세)


5남.이방원( 1367년 ~ 1422년 향년 56세) : 훗날의 조선 태종
6남.이방연( ? ~ ?)


둘째부인
신덕황후 강씨(神德皇后 康氏. 1356?-1396 )

7남.이방번(1381년 ~ 1398년 향년 18세 )
8남.이방석(1382년 ~ 1398년 향년 17세)


8남 이방석은 아버지 이성계가

세자로 결정하자 열받은 이복형 5남 이방원이한테 죽임을 당했다.

이성계의 둘째부인 강씨의 인연이 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호랑이 사냥하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물을 찾는데 저 아래 우물이 보여

급히 달려가보니 때마침 우물가에 한 규수가 있었다고 한다.

목이 매우 마른 이성계는 물 한바가지 떠 달라고 하자

그 규수는 물을 뜨고 버들잎 한줌을 물에 띄여주었는데

이에이성계가 화를 내자

규수는 갈증이 급할때 냉수를 급히 마시면

탈이 날것같아 일부러 버들잎을 띄여

천천히 마시시라고 버들잎을 띄였다고 대답했다

이성계는 그 말을 듣고

규수를 가만히 보니 특출한 미모와 그 지혜에 반해 인연이 됐다는 일화이다.

신덕왕후의 소생으로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같이

'제1차 왕자의 난'때 방원에게 살해당한 7남방번, 8남방석 형제와 경순공주가 있다.


자신의 아들인 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되도록 애썼으며 이와 관련해서 방원과 갈등이 깊었다.

정도전과 합세하여

자신의 둘째아들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였으나

1396년 8월 13일 방원이 일으킨 소란이 화근이 되어 화병으로 사망하였다.

신덕황후 강씨와 태조이성계

살아있을때 사랑하는 아들형제가

방원이 한테 죽임을 당하는것을 보았다면

아마도 피를 토하고 죽었을것이다. 강씨 사망후 2년후에아들형제가 죽었다.


신덕황후 강씨(神德皇后 康氏. ?-1396 ) 의 묘는

처음에는 도성 안 황화방(皇華坊) 북원(현 영국대사관 )에 묻혔으나


방원(조선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신덕왕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키고 여러차례 묘를 이장하였다.


1410년(태종 10) 큰 비로 청계천 다리가

무너지자 태조의 계비(繼妃) 강씨의 묘인

정릉(貞陵)의 12개의 석각신장(石刻神將)을 사용하여

석교(石橋)로 다시 축조하였다.

(1958∼1961년에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없어졌다.)


현재 신덕왕후 강씨가 묻혀 있는 정릉은

현재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태종이 강씨의 무덤을 여러 차례 이장한 것은

아버지 이성계와 계모 강씨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한 분풀이 였다.

제 1차 왕자의 난


1398년 왕위를 노리는

이방원이 일으킨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강씨 소생의 두 아들

방번, 방석(왕세자)과 사위, 반대파 정도전, 남은 등이 살해되었다.

도담삼봉


정도전(鄭道傳)이 이곳 중앙봉에 정자를 짓고

이따금 찾아와서 경치를 구경하고 풍월을 읊었다고 하며,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고 한 것도 도담삼봉에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이성계는 즉위한 직후에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

둘째부인 계비 강씨의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첫째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높았다.

특히 이성계의 등극에 엄청많은 공헌을 했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불만은 대단했다.

첩의 어린 아들을 세자로 하시다니..

계모와 우리아버지 정말 너무 하시네

이방원은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일곱째아들 방번과 세자 방석 을 함께 살해했다.

다시말해 계모의 자식들인 이복동생들을 모두 죽인것이다.

이때 방원의 나이는 혈기왕성한 32세였다.

139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두고

흔히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아버지 이성계가 와병 중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이성계는 몹시 상심한 나머지 그해 9월에

둘째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한씨 소생의 형제들이 단합하여

강씨 소생의 왕자들을 참살한 '제1차 왕자의 난'은

조선 개국의 역 사를 피로 얼룩지게 만든 첫번째 사건이었다.


제2차 왕자의 난 [第二次王子─亂]

1400년(정종 2) 왕위(王位)를 탐하여

이성계의 4째아들 방간이 일으킨 변란(變亂).을 말한다.


즉 이성계의 넷째아들 방간이

동생 방원의 세력을 꺾고 자기가 왕이 되기위해 군사를 일으킨 변란이다.


방간은 왕위계승에 대하여 야심을 품고 있었으나,

인격 ·공훈(功勳) ·위세(威勢)가 아우인 방원(芳遠)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왕위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방원에 대한 시의심(猜疑心.남을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제1차 왕자의 난에

큰 공을 세운 박포가 그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자연 방간과 박포는 서로 뜻이 맞아,

둘이 공모하여 방원의 세력을 꺾으려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방원이 동복형인 방간의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 이 되었다.

함흥차사 [咸興差使]

조선 개국 이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여 노년의 이성계를 아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이렇듯 이성계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 열받아 왕위를

둘째아들 정종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가버린 뒤,

후에 임금이 된 방원(태종)이

그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고자 함흥으로 여러 번 사신을 보냈으나

이성계는 그 사신들을 죽이거나 잡아 가두고 보내지 않았으므로,

한번 가면 깜깜소식이라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심부름을 간 사람이 소식이 아주 없거나

또는 회답이 좀처럼 오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고있다..

-편집 주인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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