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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김만덕

김만덕(1739~1812)

김만덕(金萬德, 본관은

김해김씨 1739년 영조 15년~1812년 순조 13년)은 조선 시대의 여자 상인이다.

제주도에 대기근이 닥치자

전 재산을 풀어 육지에서 사온 쌀을 모두 진휼미로 기부하여

빈사상태의 제주도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이 때문에 제주에서는 ‘의녀’(義女)로 불린다.


생애 [편집]
유년시절과 상업 활동 [편집]


김만덕은 중개상인 김응열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려서 부모를 잃고 12세 고아가 되었다.

친척 집에서 겨우 목숨을 이어가던 만덕은 나이든 기녀의 집에 의탁하였다.

어른이 된 후,

만덕은 기녀가 천시받는 직업임을 알게 되어,

제주목사 신광익에게 탄원하여 양인(良人)으로 환원되었다.

양인이 된 만덕은 객주(客主)를 차려

제주 특산물인 귤, 미역, 말총,양태(갓의 재료)를

육지의 옷감, 장신구, 화장품과 교환하여 판매하는 상업에 종사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

이앙법(모내기)의 등장으로 농업기술이 발전하면서,

상업도 같이 발전한 18세기 조선의 시대 변화를 읽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편안하게 사는 것은

하늘의 은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검소하게 살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 [편집]


1793년 제주도에서는 세 고을에서만

6백여 명이나 아사할 정도로 심각한 흉년이 계속되었다.

“흉년이 들어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게 되었 습니다.

2만여 섬의 구호식량이 없으면 장차 제주 백성들이 다 굶어 죽을 것입니다.”

라는 장계를 받자, 2만 섬의 구호식량을 보내지만,

그마저도 1795년

수송 선박 다섯 척이 침몰하면서 구호정책은 실패했다.

이때 만덕은 전 재산을 풀어 5백여 석의 쌀을 사왔는데,

이중 450여 석을 모두 구호식량으로 기부하여

굶주림으로 죽어가던 제주도 민중들을 구원하였다.

정조(1752-1800)

전 재산을 풀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의녀(義女) 만덕의 알현을 받은 정조가

“너는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義氣)를 내어

기아자 천백여 명을 구하였으니 기특하다.”라고 칭찬한 것을 보면

당시 만덕의 선행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알수 있다.

이듬해인 1796년 만덕의 선행이 알려지자,

정조는 제주목사 이우현을 통해

만덕의 소원을 물어보는데,

만덕은 한양에서 궁궐을 보고,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하였다.

대답을 들은 정조는

“관의 허락없이 제주도민은 섬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라는 규칙을 깨고

만덕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또한 내의원 의녀반수

벼슬을 제수하여 그녀의 선행에 대한 보답을 하였다.

사후 [편집]
1812년 73세를 일기로 별세한 만덕의 묘는

가운이마루 길가에 조성되었으며,

1977년 정월 제주시 건입동의 모충사로 이묘되었다.

현재 제주도에서는 만덕상을 제정,

한라문화제 때마다 모범여인에게 수상함으로써 그녀의 선행을 기념하고 있다.

2010년 한국방송 1텔레비전에서는

《거상 김만덕》드라마를 제작하여 방영하고 있으며,

고두심, 이미연 씨등이 출연하고 있다.


정조시대 여성 최고의

벼슬에 올라 금강산을 유람하다


제주시 건입동 모충사에

자리잡고 있는 김만덕 기념관

김만덕 기념관

제주시 건입동 모충사에 자리잡고 있는

김만덕 기념관은 조선조 기아에 허덕이는 주민들을

구휼한 김만덕의 자선 정신을 높이 기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교훈을 주기 위해 마련된 살아있는 역사, 교육 현장이다.


김만덕(1739∼1812)은 1794년 제주도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자 전 재산을 털어 곡식을 구입해

십분의 일은 친족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관가에 보내 백성들을 기아에서 구했다.


진휼이 끝나자 제주목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니

임금이 소원을 들어 시행하라고 했다. 김만덕은 "소원하는 바가 없으나

서울에 올라가서 임금님 계시는 궁궐을 우러러보고

금강산에 올라가 일만 이천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소원해 서울로 올라갔다.

김만덕을 만난 정조 임금은 의녀반수를 제수하고

궁에서 살도록 했다. 만덕은 또 소원에 따라 금강산 일만 이천봉을 유람했다.

채제공 [蔡濟恭, 1720~1799]

조선 후기의 문신. 영조대의 남인,
특히 청남(淸南) 계열의 지도자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다.
대상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소상인의 활동 자유를 늘리는 조치인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주도하였다.


만덕이 궁 생활을 끝내고 돌아오려 하자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만덕의 거룩한 뜻을 담은 「만덕전」을 지어 건넸고,

병조판서 이가환(1742∼1801)은 만덕의 선행을 시에 담아 주었다.

헌종 6년(1840) 제주에 유배온 추사 김정희는

만덕의 진휼 행장에 감동하여 손수

'恩光衍世' 찬양한 글을 지어 양손 김종주에게 주었다 한다.


1978년 7월 14일 제주여성 만덕의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만덕관에는 만덕이 살았던

1739년(영조 15년)부터 1812년(순조 12년)까지의

각종 의상과 생활 용구, 영정 등 180여 점의

유물을 중요무형문화재 80호 자수장 한상수 씨에게 임대해 전시하다,

2000년 6월 소장자의 요구에 의해 자료가 반환됐다.

이후 2000년 8월부터는

한국화가 강부언 씨가 만덕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만덕은 사후 "제주성안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화북동에 안장됐다가,

지난 77년 1월 3일 묘가 있는 곳에

공장시설이 들어서면서

만덕묘는 도민의 이름으로 사라봉 모충사 경내로 옮겨졌다.


제주도는 만덕의 높은 은덕을 기리기 위해,

80년부터 매년 1명씩을 만덕봉사상

수상자로 선정해 한라문화제(현 탐라문화제) 만덕봉제 때 시상하고 있다.


2004년 현재 고수선 고혜영, 이창옥, 조금숙, 이옥이,

김서옥, 성귀량, 고춘옥, 김경생, 오태인, 김순이, 김진현, 홍정형,

박희순, 문초실, 장옥순, 고경자, 메리스타운톤, 진춘자,

양화순, 김태화, 김순자, 고길향, 김문자,고추월 씨 등 25명이 만덕봉사상을 받았다.


지난 2003년 11월 15일에는 뜻 있는 도내·외 제주도민들에 의해

김만덕 정신을 기리기 위한 김만덕기념회도 발족돼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

참고자료
제주도(1989), 『구원의 여상 김만덕』.
김봉옥(2000),『증보 제주통사』, 세림출판사
제주신문(1978.7월 14), '의녀 김만덕 추모전시관 문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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