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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건청궁의비극

건청궁의 비극

명성황후의억울한 죽음

경복궁 전경

경복궁 향원정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위의 사진을 보면서

1895년 10월 8일. 지금으로부터 115년전

억울한 죽음을 당한 명성황후를 추모하며 이글을쓴다


2010.8.15

광화문 복원 현판식

을미사변 (乙未事變)


명성황후 [明成皇后, 1851~1895] 향년 45세
'고종'의 비(妃) 가 일본 낭인들로부터 살해된 사건이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총56명으로 구성된

민비(명성황후)시해

일본낭인들은 광화문을 수비하고 있던

조선훈련대 홍계훈을 사살하고는 경복궁안으로 밀어닦쳤다.


광화문을 경비하던 조선순검과 병사들은

아무런 대항조차 하지 않은채 놀라 도망쳤다.

군부대신 안경수도 도망쳤다.

前 군부협판(현 국방차관)은

일본인 깡패들과 손 잡고 閔妃 시해에 가담하였다.

훈련대의 세 대대장도 일본측에 동참,

國母를 죽이는 데 협력하였다.

물론 흥선대원군 이하응도

일본측에 협력하여 며느리를 죽이는 일을 도왔다.

건청궁전경


일본 미우라 공사가 미리 포섭해놓은

조선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은

훈련대 병사를 이끌고

낭인들과 함께 광화문을 통과하여 건천궁으로 향했다.

이넘이 미우라 이다

민비의 침전인옥호루에서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막아서자 낭인들은

그를 무참히 살해하고 민비(명성황후)

침전에 들어가

궁녀들을 닥치는대로 살해했다.

민비의 얼굴을 몰랐기 때문이였다.

우범선

한편 이때 우범선(39세)은

훈련대 병력을 풀어 담을 에워싸고 파수를 봤다.


1895년 양력 10월8일 05시 30분경

어둠이 채 가시기전의 왕비(명성황후)침전은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새벽의 공기를 가르고 사방으로 퍼졌다.

여인들중 민비(명성황후)를 찾아내

마지막으로 칼로 목을 친 사람은 데라자키 다이키치 였다.

시신의 얼굴이

누구인지 확인시켜준 사람은

미우라공사와 우범선이었다.

그리고 낭인들은 민비(명성황후)의

옷을 벗겨 국부검사까지하며

시간(屍姦)까지한 천인공노할 노릇을 하였다.

시신은 건청궁 동쪽 녹원

숲속에서 장작에 석유을 뿌려 불태웠다.

을미사변은 조선조 역사뿐만이 아니라

우리민족 역사중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다.

궁궐을 쳐들어온 자들은

조폭수준의 일본낭인들이다.

일본 정규군인도 아니고 깡패 낭인의 집단한테

조선 왕궁수비대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지금의 덕수궁과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을 보노라면

민비시해도 막지 못한 허수아비 왕궁수비대를 떠올리게 한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날이 밝은 뒤 타다남은 유골을 궁궐을 순시하던 우범선이 발견하여

우범선

향원정 연못에 버리려는것을

훈련대 참위 윤석우가

혹시 민비(명성황후)의 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를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북악산 오운각 서쪽 봉우리에 묻었다고 한다.

이해 12월1일 고종은 정식으로

민비가 승하했음을 발표했으나

일본인의 관련에 대해서는 일체언급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더욱 기가막힌 일은

민비(명성황후)의 시신을 수습한

윤석우를 범인으로 몰아 처형했다는 사실이다.

일본 정부는 사건이 발생한후

처음에는 시치미를 떼고 일본인의 관련을 부인했다.


사건 당일의 진상을 알고 있던

윤석우(尹錫禹), 이주회 등을

사건이 탄로날 것을 우려하여 진범으로 몰아 처형한것이였다.


윤석우 이분도 분하고 억울해 지금도 눈을 못감고있을것이다

(훗날 사면복권됨)

경복궁내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

2년여후 명성황후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유해를 수습할 때 뼈에 재와

모래가 뒤섞여 신체 부위가 판명되지 않아

고양군에 사는 환관을 불러 그의 말을 들으면서

석회를 바르고 비단옷을 수십벌 입혀

구부리고 포개고 묶어서 관에 넣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궁내관 정만조가 이광경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1895년 10월 8일 새벽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법부 협판 권재형의

보고서에 의하면 고종은 이날 흉도들의 주의을 따돌려

명성황후의 피신을 돕기위해 밀실의 뒷문을 모두 열고

흉도들이 잘 보이는 방 문앞에 나와 서 있었는데

흉도들은 칼날을 휘두르며 그 방에 들어가

고종임금의 어깨와 팔을 끌고 다니기도 하고

고종임금 옆에서 권총을 쏘고 궁녀들을 난타하여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또한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임금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주저앉혔으며

고종임금과 태자(순종)

태자(순종)도 다른 방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관이 벗겨지고 칼등으로

목줄기를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는 것이다..

정말로 우리민족의 치욕중에 치욕의 날이였다

이렇게 조선의 임금을 비롯

태자의 수모와 함께 고종임금의 부인

민비(명성황후)는 1895년 한창 나이 45세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때 시아버지 흥선대원군(1820-1898) 76세.

고종 44세.아들 순종의 나이 22세였을때다.

아마도 명성황후는

지금도 억울해 편히 눈을 감지못하고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방조하고 동조한 조선사람 우범선(39세)이 그 자리에 있었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2년여가 지난후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1897년 11월 22일

청량리 천장산에 처음 장사지냈으며,

1919년 1월 21일

고종임금이 68세의 나이로 죽자 1919년 3월 4일에

현재 위치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洪陵)에 고종과 함께 합장했다.

을미사변 무렵부터

고종은 허수아비 임금이였다.

대군주폐하라는 이름이 아까웠다.

거기다가 친일파 김홍집내각은

김홍집 김윤식 조희연 서광범 정병하등 민황후가 시해당하고 나자

서인으로 폐위시키자는 조서에 서명하였다.

이처럼 민비는 일본놈들한테

개망신당하며 죽은것도 억울한데 거기다가

영혼마저 중전에서 평민으로 내쫒기는 신세가 된것이다.

이때 일본은 조선인들끼리의

내부 알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계획을 세우고 민황후와 사이가 좋지않았던

대원군을 마치 고부간의 갈등관계로 몰고 가려고 했다.

흥선대원군(1820-1898)

하여간에 부인을 잃어

억울하고 분해 잠을 못이루던 고종임금은

조칙을 내려 친일파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장박의 등 5대신을 을미5적으로 규정했다.

이완용등 을사오적이 생각난다.

김홍집(1842-1896.향년 55세)과 정병하는

민비학살에 대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극도에 달해

1896년 광화문에서 역적으로 몰려 군중들에게 얻어맞아 죽었고

어윤중도 지방에서 붙잡혀 살해되였지만

유길준 조희연 권형진 우범선은 일본으로 내튀였다.

폼 안나는 모습

임금의 체면이 말이 아닌 고종은

그러나 1897년 10월 12일(음9/17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하고 민비를 명성황후로 책봉 추존하였다

한편 만고 역적 우범선은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1896년 세인의 눈을 피해 교묘히 일본으로

내튀여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다사카이 나카라는 일본여자와 결혼하여

우범선

2남1녀를 두었는데 우범선의 장남이

훗날 그 유명한 씨없는 수박의 육종농학 박사 우장춘이다.

사람들은 씨없는 수박의 대명사

우장춘박사가

역적 우범선의 장남이라는 사실에 모두 놀란다.

우장춘박사

한편 다른사건(폭탄투척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망명해 있던 고영근이 1903년 11월 24일 우범선을
칼로 찔러 살해했다.

만고의 역적 우범선도 이렇게 47세의 생을 마감했다.

이때 고영근의 나이는 51세. 아들 우장춘(1898년생)의 나이 6세였다

애국지사 고영근

(1853년-1923년. 향년71세)

일본경찰에 붙잡힌 고영근은 떳떳하게

나 개인의 사감이 아니라

국모의 원수를 갚기위해 원수의 목을 베었다고 말했다.

훗날 안중근의사를 떠오르게 하는 애국자다.


한민족과 고종 그리고 민황후의 한 맺힌 원한을

민황후가 1995년

죽임을 당한지 8년만에 일부나마 원수를 갚은것이다.


고영근은 우범선을 살해한

죄목으로 일본감옥에 수감되였는데

고종임금이 하야시공사와 이등박문에게 부탁하여

일본에서수감생활을 마치고 1909년 귀국하였다.

과거 병마절도사까지 지낸 고영근은

훗날 고종과 민비의 무덤 홍릉의 능참봉이 되어

지하에 있는 고종임금과

민황후를 보살폈으니 이런 만고의 충신이 또 어데있는가..

훗날 능참봉을 그만두고서도

남양주 홍릉근처 숲속에 초가를 짓고

고종과 민황후의 홍릉을 바라보며 71살에

이 초가에서 세상을 떠났다 하니

우리나라 역사에 보기드문 만고의 충신이였다.


고영근

(1853년-1923년. 향년71세)

고영근(高永根)은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종2품 경상좌도병마절도사(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의 무관)를 역임한 고위관료였다.

을미사변 때 훈련대 병력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데 동참했던

당시 조선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은 이후 일본에 망명하였는데,

일본에 다른사건으로 망명해있던 고영근이

1903년 11월 24일 히로시마 현 구레 시의

자신의 집에 우범선을 초대한 후 살해하였다.

그는 살해 후 바로 경찰에 자수하였다.

이 일로 일본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영근은 고종의 선처 부탁으로 5년여의 복역을 마치고

1909년 한국으로 돌아와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홍릉의 능참봉(陵參奉.능을 맡아보는 종9품벼슬)이 되어 무덤을 지켰었다.
위키백과


우범선

(1857.5.24-1903.11.24. 향년47세)


무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7살 때부터 한학을 배웠고,

1876년 과거 무과 시험에 급제한 뒤

황해도 지역에 배치 받아 근무하다가,

1881년 별기군이 창설되었을 때 여기에 참가하였다.

우범선은 일본의 사주로 창설된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참여하면서부터

일본을 배후로 둔 개화 세력과 가깝게 지냈으며

이로 인해 명성황후의 민씨 척족들과는

대척점에 서서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1894년 일본군이 민씨 세력을 실각시킨 뒤

개화파가 집권하자 군국기무처에서 갑오경장에 참여했으며,

1895년 일본의 주도로 훈련대가 창설되었을 때

이두황, 이주회 등 친일파 군인들과 함께 대대장을 맡았다.

이 무렵 명성황후의 반일,

친러 노선으로 러시아 세력의 득세가 예상되었고,

이에 반발한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는

훈련대의 간부들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 계획을 세웠다.

우범선은 훈련대 군인 동원의 책임자였으며

명성황후의 소각된 시신을 마지막으로 처리하는 과정에도 가담했다.

그러나 이듬해 아관파천이 일어나면서

친일 김홍집 내각이 몰락했고, 그는 일본으로 피신했다.

도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일본 여자 사카이 나카(酒井ナカ)를 만나 결혼하였다.

당시 미우라 고로가 우범선에 대해

“사람은 좋지만 언제 피살당할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평하였음에도 청혼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결혼 후 1903년 구레(吳)로 이사한 뒤

집들이를 하던 날

다른 사건으로 망명해 있던 고영근에게 암살되었다.

우장춘박사

대한민국 농학 발전의

기초를 닦은 유명한 육종학자인 우장춘은

우범선이 도쿄에서 사카이 나카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로서,

우범선과 사카이 나카가 결혼할 때

일본 승려, 회운사 주지승 아라이가 우범선이 피살되면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을 키워주기로 했던 약속대로 키워주게 된다.

위키백과

고종 서거후의 사건들

사진 좌로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종비. 덕혜옹주.

영친왕 이은의 어머니 엄황귀비

영친왕 이은


고종(1852~1919)의 부인은

1.명성황후

2.귀비엄씨

3.귀인이씨

4.귀인장씨

5.소의이씨

6.귀인정씨

7.귀인양씨

등 부인이 7명이나 두어 많은 자식들이 있었으나

성장해서 혼인한 아들은

명성황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2남 순종(1874~1926)과


귀인 엄씨(순헌황귀비 엄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7남 영친왕(1897~1970),
귀인 장씨와의 사이에서 난 6남 의친왕(1877~1955),
이렇게 3명이 전부다.

중앙은 고종의 셋째 아들인 영친왕과

영친왕비(이방자 여사)와 아들 이구,

왼쪽은 순종과 순정효황후 윤씨, 오른쪽은 고종과 엄귀비다.


박정희최고회의 의장과

한국으로 귀국한 이방자여사


일제는 영친왕을 약혼녀였던

민갑완과 강제로 파혼하게 하고,

일본 왕실의 나시모토 마사코(이방자)와

1920년 정략적인 결혼을 시켰다.

한많은 여인 민갑완(1897-1968)은

평생 홀로 살다가 72세에 사망했다.

황실의 후손을 끊으려는

일제는 일본 어의에게 불임녀라고

판정받은 마사코와 결혼시켰지만

1921년 8월 18일에 아들 진(晉)이 태어났다.


1921년 8월 18일에 낳은

영친왕과 이방자여사의 귀한 아들 진(晉)

1922년 4월 26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는

생후 8개월 된 황손 진을

순종에게 보이고 혼인보고도 할 겸 하여 동경에서 귀국했다.

이들 영친왕 부부는

5월 12일에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날인 11일에

어린 아기인 진이 덕수궁

석조전에서 돌연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아기의 입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고 하여

독살일 거라 했지만 배앓이로 죽었다고 공식발표를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의 피가 절반 섞인 황손을

인정할 수 없다 해서 독살했다는 설과

일제가 황실의 손을 끊으려 독살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 진위는 지금 알 수 없다.

순종은 이를 슬퍼하고 애석히 여겼고,

어린 아기지만 왕실의 전통을 깨고

특별히 왕자의 예를 갖춰 장례를 지내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불행한 어린 아기 진은 5월 17일에 할머니 곁에 묻혔습니다.

지금 숭인원은 쓰러져 가는

조선의 비애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을미사변으로 비참한 최후를 당한 명성왕후와

그리고 1살 어린 나이에

죽은 아기 진(晉)의 슬픈 이야기를 보면서,

힘없는 왕조, 나라를 빼앗긴 왕조의 비참함을 몸소 느낄 수 있습니다.


우범선 [禹範善, 1857~1903]

본관은 단양(丹陽) 우씨이다.

1857년 5월 충청북도 단양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무인의 맥을 이었다.

어려서부터 병서를 익혔으며

1876년 무과에 급제하여 황해도에 배치되었다.

1881년(고종 17) 별기군(別技軍)에 자원하여

참령(參領)이 되고

김옥균이 주도하는 개화파에 가담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대원군파로 몰려

평안북도로 귀양을 갔다가

평안감사 민병석에 의해 장위영(壯衛營) 영관으로 발탁되었다.

1894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의원이 되고 갑오개혁에 가담했다.

1895년 일본이 주도하여 훈련대가 창설되자 제2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해 10월 7일 명성황후는

친일성향의 훈련대에 위협을 느끼고 해산과 무장해재를 명하였다.

1895년(고종 32) 10월 8일

훈련대 해산 다음날 우범선은 이두황(李斗璜)과 함께

휘하장병을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와 궁궐에 침입,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弑害)하는 을미사변에 가담하였다.

우범선 그는 명성황후의 시신에 석유를 부어

태우는 마지막 처리 과정에도 가담하였다.

우범선은 조선을 개화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고,

명성황후를 제거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오판(誤判)하였다.

1896년 고종황제의 아관파천 뒤 일본으로 망명,

도쿄[東京]에 거주하였다.

일본 여성 사카이[酒井]와 결혼하였고,

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농학자(農學者) 우장춘(禹長春)이다.

어린시절의 우장춘

이후 히로시마 인근 구레시[吳市]에 거주하였다가

본국에서 폭탄투척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도주한 고영근(高永根), 노원명에게 암살되었다.


우장춘 [禹長春, 1898~1959.8.10]

씨없는 수박을 우리나리에 보급했고.

강원도감자. 제주도귤을 개량품종으로 바꾼사람이다.

1898년 4월 9일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을미사변(乙未事變)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禹範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일본 여인 사카이 나카[酒井仲]이다.

아버지 우범선은 개화파로서

한국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근무하였고 1903년 살해되어 사망하였다.


6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극빈한 가정형편으로

도쿄의 어느 고아원에 들어갔다가 경제사정이 나아지자

어머니를 따라 히로시마[廣島]로 이사,

중학교까지 그곳에서 마치고

1916년 도쿄제국대학 실과[東京帝國大學實科]의

농학과 청강생으로 입학하여 1919년에 졸업하였다.

우장춘박사


1923년 일본인 와타나베 고하루[渡邊小春]와 결혼하였는데

당시 고하루의 집안에서는

결혼을 강하게 반대하였고 고하루는 그녀의 집안과 의절하며 지냈다.

1926년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이라는 일본이름을 얻었고

그의 자녀도 스나가 성을 따랐다. 하지만 우장춘은 우씨 성을 사용하였다.

1919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취업하여

1년 후 기수(技手)가 되고 육종학(育種學) 연구에 착수,

1930년 겹꽃 페튜니아(Petunia)

꽃의 육종합성에 성공 등으로 인정받는 연구자가 되었다.

유채와 배추과 작물의 게놈(Genome)을 분석하였고

세계최초로 자연종을 합성하여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는

종(種)의 합성설(合成說)로

1936년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장춘은 박사논문으로 일본뿐만아니라

해외에서도 유전육종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고등관 기사가 되지 못했고

1937년 농사시험장을 사직하자 기사(技師)의 임명장만 받았다.


교토[京都] 다키이[瀧井]에 위치한

종묘회사 연구농장장[瀧井硏究農場長]으로 근무처를 옮겼으며

이때부터 한국인들과 교류가 있기도 하였다.

일본이 패망하고 8·15광복이 되자 다키이 농장을 그만두었다.

이후에는 교토 근처의 장법사(長法寺)에서

농장을 경영하려고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1947년 우장춘 환국추진운동이 일어났고

지인들이 그를 설득하여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 결과 1백 원을 모금하여 우장춘에게 전달하였다.

1950년 3월 한국정부의 초청을 받고

귀국하여 한국농업연구소장에 취임하였다.


한국정부에서는 그에게 농림부 장관직을 제한하기도 했지만

그는 과학자로서 육종사업과 후진양성에만 전념하였다.


우장춘은 강연시에 한국어를 몰라

일본어로만 소통하였고 이로 인해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1952년 농업재건 임시위원회위원,

이듬해 임시농업지도요원 양성소 부소장,

같은해 중앙원예기술원원장을 역임하고 다음 해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채소종자의 육종합성에 성공하고

벼의 수도이기작(水稻二期作)을 연구하였다.

우장춘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농업과학협회에서 개발된 여러 작물 종자들을

보급하기 위해 홍보용으로 만든 것이었다.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사람은

일본인이며 기하라 히토시가 1943년에 만들었다.

우장춘 박사는 이것을 한국에서 만들어

시연하였기에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1957년 부산시 제1회 문화상 과학부문상을 받았다.

1958년 농사원 원예시험장장이 되고,

1959년 두 번째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다.

그의 연구소는 학생들의

수학여행 견학코스가 되기도 하였고 연구소에서는

늘 고무신 차림이었기에 '고무신 박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한국에 온 지 9년이 되던 1959년 8월 10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서에 《십자화과(十字花科)의

게놈(Genom) 분석과 유채(油菜)의 합성》이 있다.

-두산백과사전


우장춘기념관

[禹長春記念館, Woo Jang-Chun Memorial Hall]
우장춘 박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기념관.

설립연도 1999년 10월 21일
소재지 부산 동래구 온천2동 850-48
규모 대지 약 1000㎡, 연건평 241㎡


인연은 돌고돌아 우장춘의 넷째사위가

박지성이 일본 J리그에서 축구선수생활할때 교토퍼플산가의 구단주였다

지난 역사를 덮고 잊고 사는 민족은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 할뿐이다.
역사가 우리에게 준 교훈을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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