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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화성행궁

화성행궁 방문

정조에 대한 역사이야기

화성행궁 [華城行宮]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

행궁터는 2007년 4월 1일 사적 제478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의 행궁(왕이 궁궐을 벗어나 머무는 곳)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던 곳으로, 수원 화성(華城:사적 3)의 부속물이다.

1796년(조선 정조 20)에 화성을 축성한 후

팔달산(八達山) 동쪽 기슭에 576칸 규모로 건립하였으며,

그 전까지는 1789년(정조 13) 수원읍치를 화산에서

팔달산으로 옮기면서 관아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부왕 장조(莊祖:장헌세자)의

능침(陵寢)인 화산릉(華山陵)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행궁에서 쉬어갔다.


일제강점기 때 화성행궁의

주건물인 봉수당에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훼손되고 낙남헌(洛南軒)만 남게 되었다.




화성행궁 [華城行宮]

1975년 화성 복원 결정과 함께 행궁 복원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96년 화성축성 200주년을 맞아

수원시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복원공사를 시작하였고,

2003년 7월 말 봉수당, 득중정, 궁녀와 군인들의 숙소 등

482칸의 복원을 완료한 1단계 공사가 끝났다.

이어 10월 9일 화성행궁 21개 건물 중

18개 건물과 정조의 영전(影殿)인

화령전 등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개관식을 가졌다.

화성행궁 [華城行宮]광장

인생수첩/강종영(박재홍)

가도가도 아득한
인생길- 눈보-라 길에
정-들면 타-향-도-좋더라
친구-도 사-귈 탓이-라
구비-구비-- 고생-구-비
서로-돕고 의지-해
부귀영화- 바랄것-이냐
인정 으로 살아가잔-다

가도가도 막막한
인생길- 눈보-라길에
뜻-맞아 나-가-면-좋더라
행복-이 따-로 없더-라,
구비-구비--온갖-설-움
서로-돕고 의지-해,
이게정말- 인정이-란다
이게 정말 사랑이더-라




행궁안에 있는 엄청오래된 고목

정조의 첫째왕비 효의왕후

(1753-1821.향년만68세).아이가 없었다.

정조의 첫째부인 효의왕후는 1762년 시집오자마자

이해5월에 시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1764년 2월 영조는 제3부인인 정빈 이씨의

소생으로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孝章)세자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

그러니까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뒤를 이은 것이 아니라

배다른 큰아버지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뒤를 이은것이다.


행궁안에서 조선시대 꽃부채를 만들고 있다

옛 친구 류송열회장과 함께

정조임금의 발자취를 생각하며 화성행궁을 돌아봤다



화성행궁에서 거행된

혜경궁홍씨 회갑연 진찬례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봉수당의 원래 이름은 정남헌인데,

정조가 모친 혜경궁 홍씨(경의왕후)의

회갑연을 이곳에서 베푼 후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봉수당으로 불렀다.


혜경궁 홍씨

헌경왕후(獻敬王后, 1735~1815.향년 만80세)

조선 영조의 아들 장조(莊祖:사도세자.1735-1762)의

부인이며 17세에 정조를 낳았다.

사도세자와는 동갑 나이로

남편이 비명으로 죽는바람에 만27세에 과부가 되였다

1744년(영조 20) 혜경궁의 나이 9살에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었고,

1762년 장헌세자(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혜경궁은 정조의 어머니인데도 대비가 못되고

며느리는 고사하고 손자며느리보다도 서열에서 밀리는 서러움을 당했다.

그것은 사도세자비 혜경궁홍씨는

아들인 정조가 사도세자의 아들이지만

영조의 명에 의해

죄인인 사도세자의 뒤를 이은것이 아니라

큰아버지 효장세자의 양자로 즉위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영조는 임오화변(뒤주사건)이

일어난 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에게서

'죄인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를 떼주기 위해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 부부의 아들로 입적을 시켰다.

1776년 혜경궁의

나이 41세에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宮號)도 혜경(惠慶)으로 올랐고,

27세에 남편을 비명에 잃은후

아들 정조가 죽은지 15년째 되던 해

1815년 12월(순조 15) 향년 만80세로 운명했다.


봉수당에는

국왕이 집무하는 편전공간이 연출되어 있다.


화성행궁 봉수당 [華城行宮奉壽堂]

봉수당(奉壽堂)이라는 건물 이름은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으로

정조가 獻敬王后(혜경궁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지었으며,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정조대왕에 대해서 궁안내자께서

역사사실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조대왕

정조(正祖, 1752-1800) 향년 만48세

이름 이산. 재위 1776년~1800년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는

할아버지인 영조의 제4부인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정조의 친할머니이며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는 1남 3녀

즉 사도세자 그리고화평옹주, 화완옹주, 화협옹주를 슬하에 두었다

다시말해 정조는 영조의 손자이며

생부는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이다

정조는 임금이 된지

18년째인 1794년에 발병한 절후(癤候),

즉 부스럼이 피부를 파고드는 병이 격무와 과로로

아주 심해져 1800년 6월 28일에 만48세로 일생을 마쳤다.

아버지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현륭원 옆에 묻고 건릉(健陵)이라 했다.

그래서 부모님의 융릉과

정조내외의 능인 건릉으로 융건릉이라고 하는 것이다.


정조대왕 족보

증조할아버지는 숙종(肅宗)
할아버지는 영조(英祖)

친아버지는 장조 의황제(莊祖懿皇帝

친어머니는 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외할아버지는 홍봉한(永豊府院君 洪鳳漢)
양아버지는 진종 소황제(眞宗昭皇帝)

정조의 부인들

효의선황후 김씨(孝懿宣皇后 金氏)

1753-1821.향년 만68세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1786. 향년 만33세

천금같은 아들을 낳아 (文孝世子.1782.9.7-1786.5.11)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아들이 만4세로 죽자아들따라 바로죽은 비운의 여인이다


수빈 박씨(綏嬪 朴氏)

1770-1822. 향년 만52세

순조임금의 어머니이다


원빈 홍씨(元嬪 洪氏)

1766-1779 향년 만13세

홍국영의 누이동생으로

만13살이란 어린나이로 일찍죽었다.

홍국영은정조의 정비 효의왕후의

독살 탓이라고 믿어 이후 효의왕후와 반목하게 되었다.

이후부터 홍국영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게된다


화빈 윤씨(和嬪 尹氏)

1765-1824 향년 만59세



정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조는왕위에서 물러나기전에 죽었다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펼쳐지는 여러 행사 도중 휴식을 취하는 데 사용하였다.


1794년(정조 18) 행궁을

증축할 때 5량 7칸의 규모로 새로 지었으며,

편액(扁額)은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나 전하지 않는다.

북쪽으로 낙남헌과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득중정과 통한다.

노래(老來)란 말은

‘늙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살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신풍초등학교

고종이 아관파천하던해에 개교 1896년 2월 10일

수원시는 2010년까지 이어질 2단계

화성행궁사업에서 신풍초등학교가

위치한 우화관과 맞은편에 위치한 별주,

내포사 등 화성행궁의 나머지 3개 건물 94칸과

행궁담장 등을 복원하여 세계적인 관광지로 조성할 계획이다.




풍화당의 사과나무


정조대왕에 관한 이야기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

영조의 부인들

1.정성왕후 서씨

2.정순왕후 김씨(정조와 대립각을 세운 인물)

3.정빈 이씨 (효장세자(진종).화순옹주)

4.영빈 이씨(사도세자.화평옹주.화협옹주.화완옹주)

5.귀인 조씨(화유옹주)

6.숙의 문씨(화령옹주.화길옹주)

1745년생 1735년생

시어머니(정순왕후) 며느리 혜경궁

시어머니 정순왕후가

며느리 혜경궁 보다 10살이나 아래였으니

혜경궁도 불편한점이 많았을것이다.

정순왕후는손자인 정조보다 7살 위였다

혜경궁홍씨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는

왕으로 추존되지도 못했고

정조의 법적인 아버지의 지위도 되찾지 못했다.

혜경궁홍씨 역시 남편이 추존되지

못했기에 대비가 되지 못하게 돼

정조가 죽은후에는

왕실서열이 며느리는 고사하고손주며느리 보다도아래에서 설음을 많이 받았다.

정조는 양부인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그의 비는 효순왕후로 추존하면서 법적인 아들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훗날 고종 대에 이르러서야

사도세자는 장조로,

혜경궁은 헌경왕후로 추존되였다.

정순왕후가

영조의 비로 간택될 당시일화

정순왕후

(1745-1805 향년 만60세)

정순왕후가 영조의 비로 간택될 당시

정순왕후는 15살 이었는데
당시 며느리인 혜경궁홍씨와 아들 사도세자(정조의 아버지)가
25살 이었으니
며느리 보다도 10살이나 아래였습니다.

하여간에

정순왕후를 중전으로 간택할때의 일화는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이 이야기는 내가 아득한 옛날 고등학생때
역사선생님이 들려주셨던 역사 이야기이기도 하다.

옛 역사선생님의 말씀이생각나 다시한번 쓴다.

영조가 왕비를 잃고 계비를 맞이하는 중에
세 규수가 최후로 3간택이 되었다.
영조가왕비후보 3명에게물었다.

영조(1794-1776.향년 만82세)

영조의 질문.1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 이름을 수놓은 방석을 깔고 앉지 않느냐?

다른 규수는 저는 누구 딸입니다 하고 아버지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아서
내가 판단하기 좋게 하는데 말이다."

"저는 우리 아버지 딸입니다.
딸이 어찌 아버지를 깔고 앉겠습니까?"
"......"

영조는 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갸륵하기도 하고 맹랑한 규수란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겠다.
왕비가 안되어도 좋다. 효녀로 살겠다.
아버지 이름이 새겨진 방석을 딸이 깔고
앉는것은 딸로서 도리가 아니다.
이말이렸다..으음..

영조의 질문.2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이 드는고?"

강원도에서 온 규수가 대답했다 "대관령고개입니다."
경상도에서 온 규수도 대답했다 "추풍령고개입니다."라고 하는데

김한구 딸인 김규수는 "보릿고개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였다.

보리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
세끼. 아니 두끼, 아니 심지어 한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리고개인데 김규수가 넘기힘든고개가
바로 보리고개라 하니
얼마나 명답인가!

모름지기 나라의 국모인 왕후가 되려면 백성이 겪는
그 고통이라는 대명사인 보리고개를 알아야 할 것이다.


영조는 이 대답을 듣고 과연 정답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김규수는 어렵게 살아왔기
때문에 보리고개를 잘알고 있었다.

몰락한 양반의 딸로 충청도 서산 당진 홍성
쪽에서 가난하디 가난하게 살다가 살다가 못 살아서
한양에 가면 아는 사람 연줄로 좀 벼슬이나
살까 한 아버지 뜻을 따라 가마를 빌려타고
보모랑 같이 서울에 왔는데

도중에 노비와 숙식비가 없어서 갖은 봉변을 다 당했었다

급기야는 벼슬을 살러가는
초행원님에게서 돈 좀 얻어가지고

한겨울에 상경을 한 적이 얼마 전에 있었다.

그렇게 가난한 김한구는 어찌어찌하여 벼슬을 살고 마침내
그의 딸이 이 간택에 뽑히게 된 것이다.

가난을 신물나게 겪어본 사람만이 보리고개가
가장 힘이 든 고개라고 할 것인데
바로 이 김규수가 그리 말을 한 것이다.


영조의 질문.3
"음, 이번에 문제는 꽃 중에서 무슨 꽃이 제일인고?"

강원도에서 온 규수는 " 목련꽃이 제일입니다."
경상도에서 온 규수는 " 꽃하면 연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김한구 딸인 김규수는 "목화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영조가 물었다


목화꽃이라?
목화는 화사하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데
왜 목화가 제일이라고 하는고?

김규수가 아뢰기를
목화꽃이 다른꽃들보다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지만,

목화꽃이 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듣고 영조는 생각했다
궁중에서 호의호식하는 왕비라도 백성이 헐벗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영조는 김규수가 마음에 쏘옥 들었다


이리하여 경주 김씨 김한구 딸 김규수는
영조 말년에 계비가 되었으니
바로 이 사람이 바로 정순왕후다.

정순왕후(1745-1805)

(남편 영조는 1694년생이므로 51살차이)

이 처녀가 구두면접시험을 기가 막히게 잘못덕택에

간택되여 왕비가 된

장복을 지으려고 상궁들이 옷감을 대 보면서
옷감 위를 재보기 위해

정순왕후에게 뒤돌아 앉아 달라고 했더니

이에 정순왕후가상궁 네가 뒤로 돌아가서 재라고 하였다고 한다.

훗날 정조를 못살게 굴얼던

숨겨진 성깔을 엿볼수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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