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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겸재정선기념관

역사탐방

조선 후기의화가.

겸재정선 기념관 찾아가기

겸재정선 기념관은

바로 여기 서울 강서구 가양동 궁산 바로 아래에 있다


본관 광주 호 겸재·난곡 별칭 자 원백(元伯)


주요저서

《도설경해(圖說經解)》
주요작품 《입암도(立巖圖)》 《여산초당도(廬山草堂圖)》

《여산폭포도(廬山瀑布圖)》 《노송영지(老松靈芝)》



겸재 정선의 작품

정선 [鄭敾, 1676~1759]

처음에는 중국 남화(南畵)에서 출발하였으나

30세를 전후하여

조선 산수화(山水畵)의 독자적 특징을 살린

사생(寫生)의 진경화(眞景畵)로 전환하였으며

여행을 즐겨 전국의 명승을 찾아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심사정·조영석과 함께 삼재(三齋)로 불리었다.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로 하여

암벽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 단절되었다.



겸재정선 기념관에서 기념사진 한장



겸재 정선의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난곡(蘭谷)이다.

양반 가문이지만 몇 대에 걸쳐 과거를 통하여 출사(出仕)하지

못한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약관에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이 되었다고도 하는데,

40세 이전의 경력을 확실하게 입증할 만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양반으로서 중인(中人)들이 일하는 도화서 화원이 되었을 리 없으며,
41세 때인 1716년(숙종 42) 종6품의 관상감(觀象監)

천문학겸교수(天文學兼敎授)로 첫 관직에 올랐다는 것이 통설이다.


겸재 정선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났고, 처음에는

중국 남화(南畵)에서 출발하였으나 30세를 전후하여

조선 산수화(山水畵)의

독자적 특징을 살린 사생(寫生)의 진경화(眞景畵)로

전환하였으며 여행을 즐겨 전국의 명승을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심사정(沈師正)·조영석(趙榮?)과 함께 삼재(三齋)로 불리었다.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로 하여

암벽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 단절되었다.




필운상화 (弼雲賞花)

필운상화 (弼雲賞花), 영조 26년 (1750)경

종이에 엷은채색, 27.5 x 18.5 cm,

필운대(弼雲臺)는 그 옛날 장안을 굽어 보기에 제일 좋은 명당이었다.

필운대(弼雲臺)에서 보면 남산과 북악산이 좌우로 거의 같은 거리요,

맞은 편에는 낙산이니 서울 장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명당자리 였다.

필자의 다른 글 ‘필운대’ 에서 ’

필운대 주위는 옛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남긴 필운대(弼雲臺) 암각(岩刻) 글씨를 겨우 보기는 했지만, 글씨 주위환경이

차마 눈 뜨고 못 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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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정선은

문재(文才)가 없었으므로 다만 서명과

한두 개의 낙관만이 화폭의 구석에 있을 뿐 화제(畵題)가 없다.

저서에 《도설경해(圖說經解)》가 있고 그림 작품으로는

《입암도(立巖圖)》 《여산초당도(廬山草堂圖)》

《여산폭포도(廬山瀑布圖)》 《노송영지(老松靈芝)》 등이 있다.





한강송파진(송파나루)


독서여가(讀書餘暇)

초가 지붕아래 두 쪽 송판 툇마루 위에

사방관을 쓴 한 선비가 나와 앉아 왼손은 마루를 집고,

오른손에는 쥘부채를 펴든채 반쯤 기대어 앉아 앞을 응시하고 있다.


많지 않은 수염을 기르고, 눈매가 날카로우며,

이마가 훨칠하며, 체구가 작달만한 이 양반은 누구일까?

겸재가 50대 초반 북안산 아래 유란동에서 생활하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낸 자화상이라고 생각된다.(최완수)

이 그림 속에는 두 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하나는 책장 문에 장식되어 있는 그림이며,

다른 하나는 그림 속의 인물이 펼쳐든 쥘부채에 그려진 그림이다.

방안의 책장에는 책이 겹겹이 쌓여 있어,

책 읽기를 즐기는 선비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책장 문에 장식된 겸재 그림에서 이 방이 겸재의 서재임을 알 수 있다.

쥘부채에 그려진 그림 역시 겸재의 그림이다.

방의 열어젖힌 곁문을 통해 향나무 둥치가 보이며,

툇마루 앞 마당에는 난과 함께 모란꽃 화분이 놓여있다.

독서를 하다 남은 겨를에 꽃을 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물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꽃이 아니라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날카로운 눈매로 앞을 매섭게 쏘아보는 것이 사뭇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

책장의 문과 방의 곁문이 열린 방향은 어느쪽인가?

둘 다 바깥쪽으로 열려있다.

그러나 곁문이 열려있는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지고,

책장은 어떤 모양인지 문의 위치가 어색하다.

툇마루에 누워 있는 인물 또한, 툇마루와는 동떨어져 존재하는 느낌이다.

《경교명승첩》하권 맨 처음에 장첩된 그림으로

1740년(65세)에 그려진 그림으로 보는 견해와

인왕곡 인곡정사로 이사 가기 직전인 52세경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최완수)가 있다.




寺門脫蓑(사문탈사)

寺門脫蓑(사문탈사)는 "절 문에서 도롱이를 벗다"
라는 뜻이다

이 그림은 율곡 이이가 세밑의 어느 눈 오는날 소 타고 절을 찾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척재제시

겸재가 웅어꿰미를 보내면서 함께 그려보내

사천의 시심을 촉발시키려 했던 척재제시라는

고사도의 주인공인 척재는 과연 누구였을까.

이런 풍류와 호사를 누릴만한 인물로

척재라는 호를 가진 이는 전라감사를 지낸 척재 김보택 밖에없다.

무서운 기세로 뻗어올라간

파초의 형세에서 집주인의 기개를 엿볼수있는데

열린 아래위 창문 밖으로도 온통 푸르름이다.

이런 대담한 청록의 구사른 겸재 그림중에서도 매우 희귀한 예다.

조선시대 집권층 사대부 생활환경을 헤아릴수 있게하는 좋은 풍속도다.

척재가 살던곳은 지금 헌법재판소가 들어서있는 종로구 재동 83번지 일대다


출처

동아일보사간 최완수저 겸재의 한양진경




인곡유거



압구정





겸재 선생의 미술감상 잘했습니다

근처에 있는 남원골추어탕집 음식맛이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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