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성종중종

선능의 슬픈역사

지하철 2호선 선능역을 이용하지만 선능의 슬픈역사를 아는사람은 드물다

성종(成宗)

(1457.7.30-1494.12.24 향년 만37세)

조선의 제9대 왕(재위 1469년 음력 11월 28일~1494년)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훗날 덕종으로 추존됨)와 왕세자빈 한씨(소혜왕후로 추존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도량이 넓어 세조로부터 태조를 닮아 기상과 학식이 뛰어날 것이라는 칭찬을 들으며 무척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1461년 5살이 되던 해에 자산군(者山君)으로, 의경세자의 동생인 해양대군이 예종으로 즉위하면서 자을산군(者乙山君)에 봉해졌다가 예종이 즉위한 지 10개월 만에 서거하자 (세조의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모두 일찍 사망)

당시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은 4살이었고, 또 형인 월산군은 병환 중이었기 때문에 정희왕후의 명령에 따라 1469년(예종 1년) 음력 11월 28일에 조선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즉위 초반에는 자성대왕대비 윤씨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당시 유력한 국왕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한명회와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올랐던 만큼 섭정을 받은 7년 동안 국정의 모든 결정권은 신숙주, 한명회 등의 원로 대신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수렴청정을 끝낸 1476년(성종 7년)부터는 원로 대신들이 국정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원상 제도를 폐지하여 결재권을 되찾았다.


임사홍, 유자광 등의 공신들을 유배시키는 한편, 성균관을 비롯한 각 도의 향학에 전결과 서적을 주어 교육과 문화의 진흥에 힘썼으며, 김종직 등 사림파를 과감히 등용함으로써 신진세력을 형성시키고 정치적 기반을 만들었다.

그해 숙의(淑儀) 윤씨(尹氏)를 왕비로 삼았으나 1479년(성종 10년)에 폐위하고 이듬해 사사(賜死)하여 연산군 때 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조선 시대 초기 문물 제도는 성종 때에 거의 완성되었으며, 백성들은 건국 이후 가장 태평성대한 세월을 맞이했다.

재위 기간 중 세종·세조 때 이룩한 초기 문화가 은성(殷盛)하게 개화했고, 조선 초의 문물제도가 일단 정비되었다. 숙의(淑儀) 윤씨(尹氏)를 왕비로 삼았다가 폐위한 뒤 사사(賜死)하여 연산군 때 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재위 기간 25년 동안 내내 선정을 베풀었던 성종이지만 여러 부인들을 거느려서인지는 몰라도 1494년 음력 12월 24일 38살의 한창 나이에 승하하였다. 능은 강남구 삼성동 선릉(宣陵)이다.


성종의 부인들

1.공혜왕후(恭惠王后)

1456년 음10.11-1474.음4.15. 향년 만18세)


조선 왕조의 제9대 왕 성종(成宗)의 원비(元妃)로, 한명회의 막내딸이다.1474년 음력 4월 15일, 19세의 젊은 나이로 자손없이 죽었다.능은 파주에 있는 순릉(順陵)이다


2.폐비윤씨(廢妃尹氏)

(1445.-1482. 향년 만37세) 제10대 왕 연산군(1476년- 1506년) 의 어머니이다.

성종 5년(1474년)에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그로부터 2년 뒤에 숙의였던 그녀가 임신중인 몸으로, 왕비로 승격되어 4개월 뒤 원자(연산군)를 낳았다.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여자 관계가 복잡한 남편인 성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성종이 자신의 처소에 들르지 않고 다른 후궁들의 처소만 찾자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왕대비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는 설이 있으며, 일련의 사건 등으로 마침내 1479년 음력 6월 2일에 폐비되었다.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서인이 된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점,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살려 두고자 하였으나,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인수대비)와 엄숙의, 정숙용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면서 1482년 음력 8월 16일, 결국 사약을 받아 사사되고 말았다.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고, 결국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면서1504년에 갑자사화 등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로 인해 한명회 , 한치형 등의 사람들이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 이외의 사람들이 사사되거나 유배되었다.

참고로
성종은 1457년생이고 폐비 윤씨는 1445년생이다. 그렇다면 성종임금보다 12살 년상의 여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즉 성종이 만 19세때 윤비의 나이 만31살때 왕비가 되였다.
우리나이로 20살 청년과 32살 여인이 정식 결혼을 했다는 말인데 ...?? 혹여 1445년생이 아니고 1555년생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 주인장 내생각 -

3.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년-1530년 향년68세) 파평윤씨.조선 성종의 세 번째 왕비이다. 중종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1479년 중전 윤씨(연산군의 어머니)의 폐위로 새로이 왕비로 책봉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때 반정의 주도 세력이 진성대군(중종)을 왕위에 세울 것을 주청하니 이를 승낙하였다. 능은 강남구 삼선동의 선릉(宣陵)이다.


그외 성종의 부인들

합동기념사진


4..명빈 김씨 5.귀인 정씨
6.귀인 권씨 7.귀인 엄씨
8.숙의 하씨 9.숙의 홍씨
10.숙의 김씨 11.숙용 심씨
12.숙용 권씨



중종(中宗)

(1488-1544. 향년.56세.

재위 1506년 - 1544년(만38년간)

조선의 제11대 왕으로 성종의 차남으로 정현왕후 소생이다.

1494년에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해졌다가 1506년에 음력 9월 2일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이 성공함에 따라 조선의 새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당시 진성대군은 자신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온 반정군을 적으로 여겼을 정도로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 성종보다 한사람 모자라는 11명의 부인을 두었지만 대장금이 차려준 영양가 많은 진수성찬을 먹어서인지 몰라도 38년 2개월이라는 긴 세월 을 왕위에 머물러 있었다.

중종은 정국이 혼란을 거듭하는 바람에 이렇다 할 만한 업적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준 다음날인 1544년 음력 11월 14일, 57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서울 삼선동 선정릉에 안의 정릉(靖陵)으로 능원에 중종 혼자만 묻혀 있다.

중종은 살아 생전에도 탈이 많았던 왕이었는데, 능의 중종시체가 행방불명되여
썩은 시체의 주인공을 찾느라 조정중신들을 괴롭게 하는등 죽어서도 수난을 당했다

중종의 부인들

1.단경왕후(端敬王后)

1487년-1557년 음력 12월 7일 향년 만70세)

11대 중종의 첫째 부인이다. 조선의 왕비 가운데 최단 재위 기간을 보유하고 있으며, 홀로 자식도 없이 외롭게 살다가 숨을 거두었다.


1499년(연산군 5년) 12살의 나이에 당시 진성대군에 봉해져 있던 중종과 결혼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면서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도 자연스럽게 왕비에 올랐으나 반정세력에 의해 7일 만에 폐위되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는 폐위된 이후 쓸쓸히 지내다가 1557년(명종 12년) 음력 12월 7일에 71살의 나이에 죽었다.능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위치한 온릉(溫陵)이다.


2.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년~1515년)

중종의 계비(繼妃)이자 제 12대 왕 인종의 친어머니이다.

1507년에 단경왕후가 폐위되자 같은 반정공신의 딸인,다른 후궁들을 제치고 정비에 책봉되었다.


1511년에는 중종의 맏딸인 효혜공주(孝惠公主)를,1515년에는 적통 대군인 원자(인종)를 낳았으나 안타갑게도 산후병(産後病)으로 엿새만에 새파란 나이 25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능은 경기도 고양에 있는 희릉(禧陵)이다.

3.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1501년 ~ 1565년 향년 만 64세)


조선 중종의 제2계비(繼妃)이자 명종의 어머니이다.

1515년에 중종의 제1계비였던 장경왕후가 죽자,1517년 간택되어 17살의 나이에 왕비에 책봉된다.


그녀는 3살 난 원자 호를 보호할 책임이 있었고, 이것은 훗날 그녀가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는 명분이 되었다.


1534년 아들이자 중종의 차남 경원대군을 낳기 전까지는 세자 호를 보호해 줬지만, 막상 경원대군을 낳은 문정왕후는 자신의 친아들에게 세자 자리를 앉히고 싶어하는 마음에점점 세자 호를 경계하여, 자신을 언제 죽일 거냐는 독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야사에 따르면, 문정왕후가 동궁에 쥐를 이용하여 불을 질러 세자였던 인종을 죽이려 했다느니, 문정왕후가 대접한 다과를 먹고 인종이 죽었다느니 하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로 문정왕후와 인종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1545년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아들 명종의 뒤에서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게 되어 20여년 간 권력을 누렸으나그 도가 지나쳤고 독실한 불교 신자인 그녀는 승과를 부활시키고, 승려 보우를 가까이 하는 등 불교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정난정을 아꼈다. 하지만 그녀가 죽고 난 뒤 불교는 보우가 요승으로 몰려 귀양갔다가 살해당하는 등 다시 탄압받게 된다.

조선의 측천무후로 활약하던 문정왕후는 65세로 돌연 사망한다. 능은 태릉(泰陵)이다.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문정왕후(1501~1565)의 태릉(泰陵)과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1534~1567)의 강릉(康陵)은 통틀어 태강릉이라고 하며 아름다운 푸른 숲으로 둘러싸여 시민들의 발길이 잦다.


세상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던 문정왕후에게도한 가지 못 이룬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중종과 나란히 잠드는 일이었다.


희릉의 장경왕후와 잠들어 있는 중종을 파내기 위해문정왕후는 1562년 보우를 먼저 봉은사 주지로 임명했다.

보우에 대한 문정왕후의 지극한 신임은 조선조에 유래 없는 승려 병조판서까지 만들어냈다.
보우가 명당이라며 천거한 지금의 강남구 삼성동 성종의 선릉 옆 줄기로 이장한 중종의 정릉은 해마다 재실의 절반이 물에 잠겼고 정자각까지 물이 들어찼다.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보우가 주지로 있고 선정릉 원찰이 된 봉은사에는 승려가 우글우글 몰려들었다.


침수된 재실과 정자각 보수, 복토를 위해 해마다 많은 돈이 소요되었으며 이 공사는 봉은사에서 맡았으니 국고는 비게 되지만 봉은사는 저절로 부자가 됐다.

기타 중종의 부인들



4.경빈 박씨(敬嬪 朴氏) 5.희빈 홍씨(熙嬪 洪氏)

6.창빈 안씨(昌嬪 安氏)는 중종의 6번째 부인이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 아들이고,

제14대 선조(宣祖, 1552-1608) 임금이 손자이다

7.숙의 홍씨 8.숙의 이씨(淑儀 李氏)
9.숙의 나씨 10.숙원 이씨
11.숙원 김씨


파혜쳐진 선정릉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조선조 왕릉으로 세 개의 능이 있다고 하여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이 곳에는 조선 9대 임금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인 선릉과 성종의 아들인 11대 중종의 무덤인 정릉이 있다.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합쳐 선정릉(宣靖陵)이라 하는데,선릉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1495년에 성종의 능인 선릉을 세웠고, 그 뒤 1530년에 성종의 제2 계비인 정현왕후(貞顯)의 능을 선릉의 동쪽에 안장하였다.

그 후, 1544년에 만들어진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이1562년에 문정왕후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참고

강남구 삼선동 중종의 정릉(靖陵)과 성북구 정릉동 태조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의 정릉(貞陵)은 음은 같지만 다르다.


원당리의 풍수 지리가 좋지 않아 옮긴 것인데, 이곳 또한 매년 여름이면 능이 침수되어 재실에 물이 들어가는 피해를 입었다.


결국,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던 문정 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홀로 안장되어 있다.

선정릉은 임진왜란 때 왜병(倭兵)에 의해 파헤쳐지는 등 수난을 겪었다.선릉과 정릉은 임진왜란 때 파헤쳐져 재궁(관)이 전부 불타 버렸기 때문에, 선릉과 정릉의 세 능상 안에는 시신이 없다.

정릉의 경우는 좀 더 특수한데,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침에서는 아예 잿더미들만 나왔지만중종의 능침에서는 시신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 위해 원로 대신에서부터 궁중의 나인들까지 동원되어썩은 시체를 살펴보았지만 중종이 죽은지 오래 되어 외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없었고 남은 사람들도 고령이라 확인이 힘들었다.

남아있던 기록과 시신의 모습이 달랐고 중종이 죽었을 당시가 더운 여름이었는데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남아있다는 점 때문에왜군이 왕릉을 욕보이기 위해 가져다 둔시신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혹시나중종의 시신일지도 모르기에 사람들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선조는 누구의 시신인지 알 수 없는 이 시신을 다른 곳에 잘 묻어주라고 명령했다

(지금이라도 정부에서는이 무덤의 시신이 누구인지 검사해서 선조임금이 그토록 궁금해하던 숙제를 풀어주기를 바란다. 내생각)

이후 전해져오는 야담에는 능에서 밤마다 비통한 울음소리가 들려와 사람들은 옥체를 능에 모시지 않은 탓이라고 했었다는데,어쨌든 선정릉의 세 능상은 모두 비어있으며

(정확히는 보수하면서 새로 만들어 올린 의복만 묻혀있다),

그 시신이 정말 중종의 시신이었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확인할 방법은 없다.

성종임금과 정현왕후 그리고 중종의 혼백이 오늘날도 삼성동 선능하늘에 떠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위의 인물 사진들은

역사설명을 쉽게 하기위해인터넷에서 빌려온 사진입니다.

-편집 주인장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랑미  (0) 2010.05.24
길상사  (0) 2010.03.13
태종이방원  (0) 2010.02.27
내고장명칭유래  (0) 2010.02.26
우리의선조  (0) 2010.02.20
겸재정선기념관  (0) 2009.10.15
허준박물관  (0) 2009.10.15
세종의며느리  (3) 2009.09.23
쌍용  (2) 2009.08.06
제례의 상식  (0) 2009.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