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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내고장명칭유래

탄천 [炭川]

탄천의 코스모스


경기도 용인시에서 발원하여

서울 송파구와 강남구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드는 길이 35.6㎞의 준용하천이다.


우리말로는 숯내라고 하며,

탄천은 성남시의 옛 지명인 탄리(炭里)에서 유래되었다.


탄리는 지금의

성남시 태평동·수진동·신흥동 일대에 해당하는 곳으로

예전에는 숯골·독정이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조선 경종 때 남이(南怡) 장군의

6세손인 남영(南永)이 이곳에 살았는데,

그의 호가 탄수이고 탄수가 살던

골짜기라 하여 탄골 또는 숯골이라 불렀으며,

탄골을 흐르는 하천이라는 뜻으로 탄천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밖에 중국의 동방삭(東方朔)과

관련된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는데,

삼천갑자를 산 동방삭이 번번이

저승사자를 피하자 옥황상제가

이 하천 근처로 저승사자를 보내 숯[炭]을 씻도록 하였다.

저승사자가 냇물로 씻은 숯


이 광경을 본 어떤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숯을 물에 씻는 까닭을 묻자 저승사자는

"검은 숯을 희게 하려고 씻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그 사람이

"내가 지금까지 삼천갑자를 살았건만,

당신같이 숯을 씻어

하얗게 만들려는 우둔한 자는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자,

저승사자는 그가 동방삭임을 알고

붙잡아 옥황상제에게 데려갔으며,

이로부터 숯내

또는 이를 한자로 표기한 탄천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내동 [藪內洞]

호숫가에 숲이 어울린 절경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동.
고려 공민왕 때 낙계(落溪)라고 불리던 곳이다.

조선 정조 때 청백리 이병태(李秉泰)가

마을 앞에 숲을 가꾸었기 때문에

'숲안'이라고 하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수내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운중동 [雲中洞]


산위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동.
국사봉 아래 있어

앞뒷산에 늘 구름이 많이 낀다 해서 붙여졌다.

수리산

대한민국의 자랑!

군포 수리고 출신 김연아

수리산의 수리는 독수리 모습과 비슷하다하여 지어진이름

수지(水枝)

이곳부터 물이 갈라진다


용인시 수지구
수지는 1914년 수진면과 지내면의

두 글자를 합쳐 수지(水枝) 라 불리게 되었으며

마흔가리를 기점으로

물이 갈라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속칭 깊은 말이라 하였는데

「용인현읍지」등에는 심곡(深谷)등으로 표기 되었다.

효종 경인년에 사액된

심곡서원이 있어서 서원말이라고 한다.


상리의 상자와 만현을

현자를 합쳐 부르게 된 上峴 동은

정암 조광조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후학을 가르치던

심곡 서원이 있는 서원말과 독같이 생긴 바위가 있는

옹암(독바위) 특히 이 마을은

독바위 줄다리기 민속놀이가

전승되고 있으며

깊은 말에는 조광조 선생을 묘소와 장수 바위가 있다.


또한 가산은

군부대가 주둔 하고 느진재는 현재의 만현(晩峴) 마을로

옛날 사람들이 현청이 있던 구성을 가기 위해 넘던 고개이다.


왕십리 [往十里]

무학대사

왕십리는 성동구의 중심지이다.
조선시대 초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태조(太祖)의 지시로

국도를 정하려던 때 한 농부가 소를 몰면서

“왕십리(往十里)하라”하며

북서쪽을 가리키므로

지금의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이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어보쇼 무학대사!

여기서 십리를 더 가서 궁을 지으시요!

그러면 나라가 적어도 오백년은 갈것입니다


행당동 [杏堂洞]

아름다운 은행나무 길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있는 동.

행당초등학교 동쪽 산 일대,

즉 아기씨당(阿祈氏堂)이 있는 곳에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다.


고덕동 [高德洞]

이성계 물러나라! 이성계절대 반대한다.


서울특별시 강동구에 있는 동.

고려 말기 형조참의를 지낸

이양중이 태조 이성계의 건국을 반대하여

이곳에 숨어 살면서 벼슬도 거절하고

굳은 절개를 지켜 주위로부터

덕이 높은 인물로 추앙받은 데에서 동 이름이 유래한다.

응봉동 [鷹峰洞]

임금님!내발을 풀어주시요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있는 동.

동 이름은 응봉산에서 유래하였다.

응봉산의 이름은 산 모양이

매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하며

조선시대 역대왕들이 이곳에서 매 사냥을 하였다고 한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각처에서

날쌔고 힘센 장사들을 모집해 대기시켰다가 왕명이나

공문을 각 지방으로 전달하게 하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장사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응봉 정상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리라초등학교

리라는 학교 설립자이신

권응팔선생님의 따님 이름이랍니다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번지에 있는 사립 초등학교.
개교연도 1965년

교육과 자녀 사랑에 남다른 권응팔 선생님은

1965년 큰딸인 '권리라'양의

초등학교 입학을 기념으로 학교를 설립하고,

학교 이름도 '리라'양의 이름으로 하였다.


대부분의 사립학교가

설립자의 이름이나 호를 교명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딸의 이름을 교명으로 선택한 것은 자녀사랑,

어린이 사랑의 본보기라 할 수 있으며,

그러기에

리라초등학교를 어린이의 천국으로 만든 것이다.

교복과 스쿨버스의 노랑색은 안전을 의미한다

안양(安養)

안양사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효공왕 4년(900)에

궁예의 후예인 왕건이

금주(시흥)와 과주(과천)등의

지역을 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산꼭대기의 구름이 5가지 빛으로

채색을 이룬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살피게 했다.


구름밑에서 능정(能正)이란 노스님을 만났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왕건의 뜻과 같으므로

이곳이곳(만안구 석수1동 산 2번지 일대)에 안양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이 안양사로 인해 안양이란 명칭이 탄생하였다.

조선시대에 정조대왕께서

부친 사도세자의

능행을 위해 가설한 만안교의 안(安)자와 함께,

양(養)자는

후세사람에게 인륜의 근본인 효의 뜻을 살리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짐작한다.

또한 1941년 시흥군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되며 쓰였는데

안양이란 불교에서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쉬게하는

극락정토의 세계로 모든일이

원만구복하여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는 자유롭고 아늑한 이상향이다.

귀인동 [貴仁洞]

나는 귀공자다.

여기서 이틀만 묵고 가자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에 있는 동.
조선시대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한양(서울)으로 과거를 보러

가다가 이 마을에 들러

머물다 가곤 했다고 하여 귀인(貴仁)이란 지명이 붙여졌다.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상서면 이동리(二洞里)였으며,

1914년 시흥군 서이면 이동리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1973년 안양시 평촌동으로 승격되었고,

1992년 동안구에 편입되었다.

1993년 평안동 관할로 되었다가

1994년 평안동에서 갈라져 나와 독립하였다.

정조 때(1789) 편찬한 《호구총수》에 의하면,

안양에서 인구가 가장 많아 귀인1·2동으로

분동되었을 만큼 번창했던 마을이라고 한다.


1960년대에는 명지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마을 뒷산에서 지석묘가 발굴되었다.

또 지석묘에서 서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서는 삼국시대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달안동 [達安洞]


비가 쏟아진다. 삿갓쓰고 달아나자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에 있는 동.

이 마을은 1944년 박흥식이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비행기 활주로 공사를 시작했던 곳이다.

지역이 넓어,

비가 오면 가릴 것이 없어 삿갓을 쓰고

달아나야 비를 피할 수 있다고 하여

'삿갓들[笠坪]' 또는 '다라니(달안이)'라고 불렸다.

다라니는 허허벌판이라 겨울이면 추워서 사람이 살지 못하는

불모지라고 하여 농경지 외에

민가가 없다가 1940년대 초에 마을이 들어섰다.


그후 이 일대가 평촌 신도시 구역에 편입되자

1989년 폐동되었다.행정동인 달안동의 법정동은 비산동이다.

안양시 동안구 飛山동(날뫼동)


인덕원(仁德院)


우리들은 덕을 베푸는 내시들입니다

조선시대에 내시들이 살던 곳으로,

비록 거세된 몸이지만

환관이라고 하여 궁중을 드나들며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래서 남에게 덕을 베푸는

사람이 사는 곳이란 뜻으로 인덕(仁德)이라고 하였다.

그후 공무(公務)로 여행하는

사람들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원(院)을 설치하면서부터 인덕원이라고 불렸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의 몸으로

아산을 향해 갈 때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는

기록이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적혀 있다.

옛날부터 명당길지로 알려져 있어

여러 선인들의 묘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왕림(旺臨)


정조대왕이 왕림하신다

고천지구대 옆 옥개도로을 따라

동쪽으로 백운산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곳은 조선조 연산군때 정주목사를 역임하고

청평군에 책봉된 김우증(金友曾)이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동쪽으로는 백운산(白雲山),

서쪽으로는 오봉산(五峯山), 남쪽으로는 지지대(遲遲臺),

북쪽으로는 모락산에 이르기까지

사방십리를 사패지로 받아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이래,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기

시작하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시대 그 이름이 높던

정조대왕이 수원의 융릉(사도세자의 묘소)을 참배하고

환궁하는 길에 이곳에 친림(親臨)했다고 하여

'왕림'(旺臨)이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본래는 왕림(王臨)이라고 해야 옳으나

사가(私家)에서는 임금 '왕'(王)자를 사용할 수가 없어

임금 왕(王)자 앞에 날 '일'(日)자를 쓴 것이라 한다.


이목동 [梨木洞]

아름다운 배꽃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에 있는 동.

마을에 배나무가 많아 배나무골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한 지명이다.

옛 지명에 윗배나무골·아랫배나무골·안죽골 등이 있고,

배나무골 북서쪽으로는 삼선봉과 옥녀봉이 있다.

서호천으로 유입되는 이목천이 흐르고,

1991년 준공된 교량으로 배다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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